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64화 (264/318)

4.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공친왕은 분통이 터져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요망하기 이를 데 없는 여우같은 서태후를 찢어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동안

씩씩거리며 방안을 돌아다니던 공친왕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직예총독 이홍장이었다.

"왕야. 저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의수.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인데..."

공친왕은 이홍장이 들어오자 얼굴이 약간 펴졌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자신만만하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이홍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총리각국사무아문으로

들어오면서 여러 관헌들이 수군거리던 터라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왕야."

"말씀하세요. 의수."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이상한 소리요?"

"저의 회군이 어쩌니저쩌니 하면서 여러 관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들었사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왕야."

"저도 그 일 때문에 의수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예..."

이홍장의 직책은 직예총독이었다. 조정의 대관이 아닌 지방의 총독에 불과했다. 물론

직예성이 북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성이기 때문에 그 정치적 위상이라는 것이

결코 적을 수 없었으나 황제가 임어하는 조정 중신회의까지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오늘 중신회의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건청궁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의수께서도 들으셨겠죠? 오늘 폐하께서 임어하신

중신회의가 있었다는 것을..."

"예. 속하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야를 찾은 것이구요."

이홍장이 비록 중신회의에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조정 돌아가는 사정까지 무심하게

넘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정치적 야심이 상당한 사람인 만큼 조정

돌아가는 사정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설립하고 관리하던

상해의 강남제조국과 남경의 금릉기기국, 천진의 천진기기국이 모조리 파괴된

마당이라 그런 관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천진의 천진기기국 같은

경우에는 만주 귀족 출신의 숭후(崇厚)가 세웠지만 이홍장이 직예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그가 직접 관리하여 기존의 공장을 두 배 이상으로 키울 만큼 열과 성을

다해 발전 시켰던 곳이다. 이런 곳들이 모조리 파괴된 상태인지라 이홍장이 관심을

가지고 조정 돌아가는 사정을 살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폭동과 소요사태로 제일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이홍장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사태의 추이와 변화를 관심을 자기고 지켜보는 것은 당연했다.

"폐하의 성지(聖旨)가 떨어졌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여우같은 서태후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지만..."

"예... 헌데, 성지의 내용은...?"

"의수의 회군을 동원하여 강남의 폭동을 진압하고 폭도들을 색출하랍니다."

"회군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척정이 죽고 없는 마당에 이미 해산하여 껍데기만 남은

상군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의수의 회군을 강남으로

파견하랍니다."

"그럼 조선군은 어떡하구요? 조선군이 오늘내일 천진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왕야. 그래서 영·법·미 3국 공관 소속의 외교관들과 조선 공사관

소속의 외교관들이 지금 천진에 와 있습니다. 저들을 맞이하는 일로 분주한

모양입니다."

"음... 저들 공사들은요? 공사들도 와 있습니까?"

"공사들은 보이지 않고 하급 외교관들만 분주히 오가고 있습니다."

"일단 조선군은 그냥 놔두라는 폐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저들 영·법·미 3국 군대

대신에 치안유지만 맡을 예정이라니까 우리로서는 달리 손 쓸 여건이 안되지요."

공친왕은 거의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 1860년에 체결된 북경조약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조약 때문에 서양 제국(諸國)

군대가 서양 제국(諸國)의 거류민들의 보호를 위해 주둔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비록 그 군대가 조선군이라 하여도 서양 제국(諸國)의 정식 요청을 받은

상태라면 청국 조정에서는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거지같은 일이었지만 청국

조정이 그 조약을 체결한 직접 당사자라는 측면에서 달리 할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체결한 북경조약으로 인해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나저나 의수께서는 회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출정해 주셔야겠습니다."

"예. 왕야."

"언제쯤이나 출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 가는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출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폭동을 진압하여, 하루라도 빨리 중앙으로 올라오셔야 합니다만..."

"출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동북지방에 주둔한 조선군을 응징하기 위한

출정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으니까요. 다만..."

"말씀하세요. 의수."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제가 강남으로 내려간 뒤의 일입니다."

"뒤의 일이라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북경에 남아있는 왕야의 안위가 조금 걱정이 되는지라..."

"하하하하!"

공친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자신이 서태후의 견제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릴만한 인물은 조정 내에서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공친왕이었다. 아무리 허울뿐이라고는 하지만 외무부라고 할 수 있는

총리각국사무아문과 국방부라고 할 수 있는 군기처를 장악하고 있는 자신을 노릴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에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왕야."

"왜요. 의수는 이 사람이 호락호락해 보입니까?"

"제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왕야."

공친왕의 코웃음 비슷한 반응에 안타까운 심정의 이홍장이 언성을 약간 높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야. 제가 회군을 이끌고 남하한다면 왕야의 측근에는 힘을 쓸

수 있는 군대가 거의 없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없기는 왜 없습니까? 효기영(驍騎營)과 전봉영(前鋒營)이 있지 않습니까? 효기영

통령(統領)인 니이혁(泥爾赫)과 전봉영 통령인 아극단(雅克旦)은 우리 사람입니다.

효기영과 전봉영이 있는데 누가 나를 노리겠습니까? 기우(杞憂)입니다. 기우."

원래 만주족의 군제는 팔기를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주 팔기는 백홍황남(

白紅黃藍)의 4색이 각각 정(正)과 양( )을 구분으로 해서 나뉘어진다. 즉, 정백기(

正白旗), 정홍기(正紅旗), 정황기(正黃旗), 정남기(正藍旗), 양백기( 白旗), 양홍기(

紅旗), 양황기( 黃旗), 양남기( 藍旗), 등 팔기로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각 팔기에서 일개 영(營)을 차출하여 황도와 황궁을 경비하게끔 하였는데

후에 나라가 안정되고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각지로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황궁의

내삼영(內三營)인 호군영(護軍營)과 효기영, 전봉영만이 황궁을 수비하고 나머지는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황궁 내삼영 외에도 황제를 가장 근거리에서 보위하는

금군(禁軍)이 있었지만, 금군은 어느 기(旗)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고, 황도인 북경을 수비하는 일반 군대가 있었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른

팔기와 마찬가지로 훈련과 기강은 극히 문란하였다. 황궁 내삼영은 각각 2천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금군이 황제 최측근의 근위부대라면 삼영은 황궁을

수비하는 친위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공친왕은 황궁 내삼영 중 2영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별 다른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의 생각은 달랐다. 효기영과 전봉영이 공친왕을 지지하고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훈련과 기강이 문란하기 이를 데 없는 각각 2천의 군사로는 유사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근대식 무기인 소총은 단 한

자루도 보유하고 있지 못한 두 영이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에 총과 같은

상서롭지 못한 무기는 들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말만 황제 친위부대지 실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오나, 왕야. 효기영과 전봉영은 기본적으로 폐하를 보위하는 친위부대입니다.

유사시에 폐하의 명이 떨어진다면 저들이 거부할 명분이 없습니다. 더구나 효기영의

통령 니이백과 전봉영의 통령 아극단의 사이는 물과 불입니다. 지극한 앙숙이란

말입니다. 이런 저들이 아무리 왕야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을 통일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왕야."

"... 음..."

공친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도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었다. 겨우겨우

그 문제를 봉합해 놓고는 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았다. 원래

효기영은 정백기 소속이었고 전봉영은 양남기 소속이었다. 문제는 효기영이 속한

정백기와 전봉영이 속한 양남기가 지극한 앙숙이라는데 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

앙숙이 아닌 200년이 넘는 앙숙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흔히 만주 팔기가

단합이 잘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원래부터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족의 통합체가 팔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각 기별로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다만, 여진족을 통합한 누르하치의 강력한 지도력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르하치 사후에 각 기의 분쟁이 많았는데 특히 강희제

등극 초기에 그런 분쟁이 많았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강희제는 각

기의 분쟁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고 자연히 일부 힘있는 기가 다른 기를

누르던 형국이었다. 다행히 영명한 강희제가 친정을 하면서부터 그런 움직임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때의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는 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백기와 양남기였다.-이 문제는 나중에 기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공친왕이 이홍장의 걱정을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수의 우려는 내 잘 알겠습니다. 허나, 저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들도

청국을 개혁하려는 우리의 대의를 알고 있는 한 문제를 크게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소소한 다툼 정도에 그칠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오나, 왕야."

공친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자신의 위엄과 덕망으로 충분히 두

사람을 다룰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의수께서는 강남의 폭동을 하루 속히 진압하시고 중앙으로 올라오시는 게

급선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왕야.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오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榮祿)이란 자가 통령으로 있는 금군은 어떻습니까? 저들이 금군을

동원한다면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영록이라는 자는 서태후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의 애인이었던 자다. 그러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 영달의 길에 올라선 무뢰배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서태후의 애인은 앞에서 언급한 안득해와 금군의 통령인 영록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연영(李蓮英)이다. 서태후는 이연영의 아이를 배고

유산한 것을 일생의 한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연영과 정이 깊었다. 참고로 이연영도

환관이었다. 참, 개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이

금군의 통령으로 있으니 이홍장의 걱정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금군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정잡배에 불과한 자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의수께서 중앙으로 복귀하시는 날! 우리는 그동안의 모든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겝니다."

"왕야... 그 말씀은...?"

이홍장은 말문이 막히는지 더듬더듬 물었다. 자신의 머리를 스치는 무슨 생각이

있었지만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하고 공친왕만 쳐다봤다. 공친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의수께서 중앙으로 복귀하시는 그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 왕야..."

새로운 세상이라고 했다. 이홍장이 강남의 폭동을 진압하고 중앙으로 복귀만 한다면

바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제도적 개혁만으로 우리 청국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왕야..."

"척정의 죽음을 전후로 해서 국제정세가 여러모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를

노리는 세력도 있구요. 이런 상태에서는 지금까지의 제도적 개혁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자각했습니다. 인적 청산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청국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왕야..."

"아무튼 그리 아시고 의수께서는 속히 강남을 평정하시고 오세요. 내 그동안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왕야. 하루라도 빨리 폭도들을 색출하여 강남을 안정시키겠습니다."

공친왕이 말은 안 했지만 그가 느끼는 위기의식은 심각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증국번이 죽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팔인 이홍장이 강남으로 출정한다고 했다.

더구나 조선이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자신을 노리는

서태후의 수구세력도 문제였다. 무엇하나 자신에게 이롭게 돌아가는 게 없었다. 이런

상태였으니 그동안 조용조용 개혁을 이루려던 생각에 심각한 회의가 드는 것이

당연했다. 하여, 이홍장이 강남을 평정한 연후에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기만 한다면

그동안 사사건건 자신의 발목을 잡아온 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려는 거사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의수께서는 이제 그만 가서 일보세요. 먼 길을 가자면 준비할 게 많을 겝니다."

"알겠습니다. 왕야. 보중(保重) 하십시오."

"예. 그럼, 다녀오세요."

이홍장은 공친왕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깊게 인사를 한 이홍장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문을 열려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 공친왕이

있었다.

"왕야..."

"어서 가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의수의 건강이나 잘 챙기세요. 아시겠습니까?"

"왕야..."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이홍장이었지만 이제는 가야만 했다. 이제가면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한동안 보지 못할 주군(主君)의 모습을 가슴 깊이 새기려는

생각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이홍장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고

나갔다. 떠나보내는 공친왕이나 떠나가는 이홍장이나 마음이 쓰리기는 한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다 낳은 내일을 위해서 잠시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할 때라는

것을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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