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접니다. 합하."
"들어오세요. 한 원장."
김영훈은 자신의 사랑인 아재당에서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한상덕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한상덕의 손에는 하얀 종이 같은 것이 들려
있었는데, 어디에서 올라온 전문인지는 몰라도 급한 전문인 것처럼 보였다.
"합하. 북경 주재 오경석 공사의 암호 전문입니다."
"역매(亦梅)의 암호 전문요? 무슨 일이랍니까?"
"한번 보십시오. 합하. 청국 주재 3국 공사가 직접 우리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해왔다고 합니다."
"음..."
한상덕의 설명을 들으면서 김영훈은 천천히 암호 전문의 내용을 읽고 있었다.
오경석이 보낸 암호 전문은 영·법·미 3국 공사의 요청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어지간히 다급했나 보구만..."
"그렇습니다. 합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모든 대소신료들을 창덕궁으로 불러모으세요. 주상전하의 뜻과 중신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종완 해군사령관과 근위천군의 김욱 중장, 친위천군의 안용복
중장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임어하시는 어전회의를 오늘 오후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도록 하겠습니다."
"김욱 중장과 안용복 중장까지 부르십니까?"
"그렇습니다. 조정의 중론이 파병으로 모아진다면, 청국에 흩어져 있는 각국 조계지(
租界地)의 특성상 대규모 부대를 파병해야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르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합하."
외지에 있는 양헌수와 김종완을 부르는 것은 전신이 서울과 그들의 임지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리고, 3국 공사의 요청이나, 청국에 산재한 각국의
조계지를 생각해 봐서는 아무래도 대규모의 부대를 파병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일선
부대장들까지 부른 것이다. 김영훈은 한상덕이 나간 후에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3국 공사의 급작스런 파병요청이 조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를
가늠하는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창덕궁의 희정당에는 국무대신 김병학을 비롯한 모든 대소신료들이 상석에 앉아 있는
김영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지 좌중에
자리한 모든 중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모두들 김영훈의 말 한 자락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이런 이유로 영·법·미 3국 공사가 청국 주재 오경석 공사에게 우리 조선군의
파병을 정식으로 요청했다고 합니다. 여(余)는 이에 대한 여러 중신들의 고견을
듣고자 이렇게 주상전하를 모시고 오늘의 회의를 마련한 것입니다. 여러
중신들께서는 가슴에 품고 있는 의문이나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좌중은 고요했다. 마치 찬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도 선뜻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의문 나는 사항을 문의하지 않고 있었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섭정공 김영훈의 의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임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정의 모든 권한을 섭정공
김영훈에게 물려주고 뒤로 물러앉은 임금이었지만, 아직까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나
외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기에 먼저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김영훈도 원하고 있던 바였다.
"숙부."
"예. 전하."
"숙부께서 보시기에 이번 청국에서 벌어진 소요사태가 장기화 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단 시간에 진압이 될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절대 단 시간 내에 진압될 소요사태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 이유는요?"
"전하께서도 들으셨지만, 이번 소요사태는 청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산동에서, 내일은 직예에서, 모레는 호북에서. 이런 식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폭동과 소요사태는 오합지졸 청국군의 힘만으로는
쉽사리 진압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것은 지난 철종대왕 시절에
청국에서 벌어졌던 장발족의 난(태평천국의 난의 다른 말)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사옵니다. 더구나 한족이 세운 명조를 무너뜨리고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조는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아니, 오히려 청국 백성들의
민심은 지금의 청조를 떠났다고 볼 수 있사옵니다. 또한, 청국의 공친왕이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하던 양우운동과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각지에 세운
근대적 군수공장들이 모조리 파괴되었다고 하니 공친왕을 시기하는 반대파의 공세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이러한 고로, 청국의 정치상황은 한층 혼미를
거듭할 것으로 생각되옵고, 그에 따라 자칫하면 지금 청국 조정의 실권자인 공친왕이
실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진압하기 어려운 소요사태는 확산일로에
처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전하."
"호-오. 그럼 우리 조선으로서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과인이
보기에는 이러한 청국의 혼란을 틈타 우리 조선의 이득을 취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될
것이나, 행여 말 잘하는 유림에서 남의 어려움을 틈타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한다고
말하기 딱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사대만이 최선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일부 유림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구요."
제법 식견을 갖춘 듯한 임금의 말에 김영훈은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올해 초에 간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직접관리를 한다고 했을 때도
상당한 반발이 있었던 터였다. 김영훈이 막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라 이번에는
외무대신 박규수가 입을 열었다.
"전하. 신 외무대신 박규수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환재 대감."
"황공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옵서도 잘 아시다시피 국제정세라는 것은 참으로
냉혹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지난 광해·인조 년간이 그러하옵고 지금이 그러하옵니다.
당시 우리 조선에서는 실리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대명(對明)
사대외교를 추구하던 인조대왕을 옹립한 결과,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결국
인조대왕께서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시었사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이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서세동점(
西勢東漸)의 높은 파도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차인 청국이 지금의 이 난국을 헤쳐
나오지 못한다면 결국 낙오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청국의 눈치를 살피며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다면 영영
오늘과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음... 과인의 뜻이 환재 대감의 뜻과 전적으로 같소. 비록 지금과 같은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 조선이 홀로 설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지금과 같은 천금의 기회를 져버리는 우를 범하고 싶지도 않소."
여기까지 말한 임금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김영훈을 쳐다보았다.
"어떻습니까? 숙부. 과인의 생각으로는 우리 조선이 홀로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환재 대감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참으로 옳으신 생각이옵고 영명하신 결단이옵니다. 전하. 저도 지금의 기회는 결코
놓쳐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사옵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이제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야겠군요."
임금은 김영훈의 칭찬을 듣자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런 임금을
바라보던 자애로운 표정으로 김영훈은 시선을 중신들에게로 돌렸다.
"모두들 잘 들으셨겠지요. 전하와 여의 뜻이 바로 이와 같으니 모든 중신들께서는
이러한 전하의 뜻을 받들어 청국에 파병할 우리 군대의 지원에 대한 논의를 해
주십시오. 또한 어느 군의 어느 부대를 파병해야할 지에 대한 의견도 말씀해
주시고요."
"예. 합하."
좌중의 중신들은 깊이 대답한 후 김영훈의 말대로 파병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처음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다른 활기에 넘치는 분위기였다.
법무대신 이세보가 나서서 청국과 서양 제국(諸國) 간에 체결된 각종 조약의 검토에
대한 의견을 말했고, 외무대신 박규수가 나서서 파병에 관련하여 3국 정부와
맺어야할 협정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는 등 파병에 관련된 여러 부처에서 활발한 의견
개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파병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과연 파병부대를 어느 부대로 정할 것이며, 어느 정도
규모의 부대를 파병하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특성상 해군이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서양 거류민 거주지역에 대한 치안을
담당해야하는 지상군을 결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친위천군의 예하 부대를 파견해야
한다. 아니다. 근위천군을 파견해야 한다. 모두 틀렸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해병대를
파견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외국에 나가는 데 당연히 외인부대를 파병해야 한다.'
는 등 말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의견 접근이 쉽지 않았다. 결국 최종 결론은
김영훈이 내리게 되었다. 먼저, 지상군 파병부대는 안용복이 이끄는 친위천군으로
결정되었다. 임금을 최 측근에서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의 특성 상
근위천군은 처음부터 논의에서 배제되었어야 옳았고,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사단은 영·법·미 3국 포로들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뺄 수도 없었다.
결국 남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친위천군에게 청국으로의 파병이라는 영광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지상군 파병부대의 규모는 친위천군의 전 병력을 파병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어차피 청국에 도착해서는 각 대대 혹은 연대 단위로 흩어져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친위천군 전 병력이 파병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해군에서는 김종완 해군사령관이 휘하의 제 1왕립 근위함대
전 함정을 이끌고 파견하여 파병부대의 수송과 지원, 호위를 전담하기로 결정했다.
굳이 제 1왕립 근위함대를 청국이나 다른 서양 제국(諸國)에게 노출시킬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선의 힘을 꼭꼭 숨기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힘을 드러냄으로써 조선의 잠재적 가상적국에서 행여 딴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자는 섭정공 김영훈의 의견을 따른 결과였다. 이는 다분히 청국과
영·법·미 3국을 겨냥한 조치라고 볼 수 있었다. 김종완이 이끄는 제 1왕립
근위함대가 빠진 공백은 장보고급 잠수함이 전담하기로 결정되었고, 동해안의 원산을
모항으로 하고 윤정우가 지휘하는 제 1왕립 친위함대는 평소대로 북해도와 북양도를
수시로 오가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따로 함정을 차출하지는 않았다.
최종적으로 서양 거류민 보호를 위한 파병부대의 총사령관에는 김종완 해군사령관 겸
제 1왕립 근위함대 사령관이 임명되었고, 지상군 사령관으로는 안용복 친위천군
사단장이 임명되었다. 이렇게 파병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가닥이 잡혀가자 김영훈이
입을 열었다.
"김종완 해군사령관과 친위천군 안용복 사단장은 잘 들으세요."
"말씀하시옵소서. 합하."
"예. 합하."
"두 분도 아시겠지만 이번 파병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각별합니다. 비록 청국 내에
있는 서양 거류민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파병이지만 그 지닌바 의미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해병여단을 왜국에
파병한 바도 있지만 그때의 파병과 지금의 파병은 그 격이 다릅니다. 그때는 우리
조선의 힘을 최대한 숨긴 상태에서의 파병이었지만 지금의 파병은 우리 조선의 힘이
어느 정도 드러난 상태에서의 파병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파병은 왜국의 막부에
반기를 든 일개 반군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파병은 자칫하면 청국군
전체를 상대할지도 모르는 파병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양 거류민 거주지역의
치안유지만 담당하면 되는 단순한 임무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두 분도 잘
아실 겝니다."
잠시 숨을 고른 김영훈은 김종완과 안용복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희정당에 자리한 중신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국은 오랫동안 우리 조선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청국 조정에서 우리 조선군의
파병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영·법·미 3국의 정식 파병
요청이 있었고, 그들이 정식으로 청국 조정에 이 일을 통보했다고는 하지만 저들이
우리 조선군을 쉽게 용납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연히 우리 조선군에 대한
온갖 음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하온데, 합하."
"말씀하세요. 안 장군."
지금이야 일국의 최고 권력자와 일개 일선 부대장이라는 신분의 벽이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안용복은 김영훈의 육사 후배이자 특전사 후배 출신이었다.
근위천군 사단장 김욱과 더불어 각별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김영훈은 그런
안용복에게 '말씀하세요. 안 장군.'이라고 말하는 게 어딘지 어색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용복은 김영훈에게 말했다.
"만일 청국군이 의도적으로 우리 조선군을 도발한다면 어떻게 해야하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파병부대 사령관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전장이 될지도 모르는
곳에 출진하는 장수가 조정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씀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분명 청국군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조선군을 자극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우리가 굽실거려야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안에 따라 처리 방법이 결정될 것이지만, 저들의 가당찮은 도발에는 단호히
응징하여 다시는 우리 조선을 얕잡아보지 못하도록 하세요. 우리 조선군 병사 하나가
피를 흘리면 저들은 열 명의 피를 우리에게 지불해야한다는 것을 각인시키도록
하세요."
"알겠사옵니다. 합하."
아직까지 정식으로 청국에 대한 사대청산을 천명하지는 않았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적극적인 의사표현도 없었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의 마음에는 머잖아
청국에 대한 사대를 청산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만 결정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어쩌면, 김영훈은 이번 기회에
사대청산이라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김영훈이
김종완을 불렀다.
"그리고, 김 사령관."
"예. 합하."
"만일 안 장군이 이끄는 친위천군과 청국군과의 불상사가 생길 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지원하도록 하세요. 무력시위도 좋고 해상봉쇄도 좋습니다. 반드시
청국 조정이나 청국군이 힘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어버리세요."
"알겠사옵니다. 합하."
"조선 최초의 육해군 합동 작전이 이번의 파병입니다. 두 분과 파병부대 장병들의
뒤에는 주상전하와 이천만 조선 동포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하기 바랍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합하."
김종완과 안용복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한 김영훈은 이번에는 좌중에 자리한 모든
중신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들으세요. 모두들 잘 아시겠지만 세종대왕께옵서 돌아가신 소현왕후 심씨를
위해 지은 가사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월인천강이라는
말은 '부처가 수많은 세상에 몸을 바꾸어 태어나 중생을 교화하심이 마치 달이 천
개나 되는 강에 비침과 같으니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는 우리
조선이 부처가 세상을 비치듯 다른 여러 나라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력만으로 다른 나라를 억누르는 나라가 아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를 잘 이끌어줄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강자의
부당한 압력과 억압에는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하여 물리칠 수 있고, 약자의 억울함과
고달픔은 우리 일처럼 앞장서서 해결해주는 그런 나라로 우리 조선을 만들고
싶습니다. 말 그대로 정의가 살아 숨쉬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제 청국에 우리
조선군을 파병하여 서양 제국(諸國)의 백성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
기회를 잘 살려 우리 조선이 진정한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십시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국에 진출한 서양
제국(諸國)이 청국 백성들에게 배척 당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청국 백성들에게 배척 당하고 불신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서양인 특유의 교만과 독선, 위선과 아집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서양 제국(諸國)의 이와 같은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앞으로 우리 조선의 힘이 더욱 뻗어나간다 할지라도,
오늘 여가 한 말을 명심하여 진정으로 강한 나라, 진정으로 다른 나라의 귀감이 되는
나라로 우리 조선을 만들어 나가십시다. 모두들 아시겠습니까?"
"명심하겠사옵니다. 합하."
"합하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김영훈의 말을 끝으로 청국에 있는 서양 제국(諸國) 거류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파병에 대한 회의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당당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중신도 있었고,
일말의 우려를 표시하는 중신도 보였다. 이번 파병 결정이 조선이 다시 웅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고,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심각한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모든 것을 뒤로하고 파병을 위한
최대한의 준비와 지원을 갖추는 일만이 남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처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시작된 회의는 밤이 되어서야 끝마칠 수 있었다. 모두들 피곤하고 시장했지만
그동안 상국으로 받들던 청국에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중대한 일을 논의하느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회의에 임했다. 돈화문을 빠져 나와 운현궁으로 향하는 말 위에
앉아있는 김영훈도 피곤했다. 아직은 팔팔한 나이의 김영훈이었지만 심력을 극도로
소모하는 오늘과 같은 회의에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널찍하게 뚫린
돈화문 앞 도로에는 이미 어둠이 깃들어 있었고, 양옆으로는 가로등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른바 세계 최초의 전기를 이용한
가로등이었다. 동그랗고 반투명한 가로등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은, 김영훈의
눈에 마치 엄청나게 많은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영훈은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허! 이거야말로 달이 천(千) 개의 강에 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좋구나! 정말
좋구나!"
*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 yskevin에게 있으며, 이 글은 오로지 유조아의 소설란과
다음카페(데프콘 포레버러브, 1904대한민국, 흉겔의 소설나라)에서만 연재되고
있습니다. 타 게시판이나 사이트에 이 글의 부분 및 전체에 대한 어떠한 업로드는
금지되어 있으며, 기타 지적재산권 보호에 관한 법률의 보호를 받습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글에서 오탈자 및 오류, 또는 의견, 건의를 보내실 분들은
리플이나 감상, 비평란 또는 저자의 개인 전자우편 [email protected]이나
[email protected]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택되신 의견이나 건의는
저자가 판단하여 글의 진행에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케빈입니다. 오늘 연재 분량은 조금 적습니다. "달이 천(千) 개의 강에 비치고"
챕터의 마지막이라 조금 적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연재는 내일이나
모렐 올리겠습니다. 이미 전에 공지했듯이 지난 챕터 "오직 바다만이 알고 있다."의
뒷얘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연재본에는 넣지 않고 출판본에만 넣을까 하다가
그래도 한 번 선보인다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잠시 그동안 독자의 주문 사항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 독자들께서 문단을
좀 띠어서 올려줬으면 하는 리플을 많이 올렸습니다. 눈이 피곤하다는 이유와 함께요.
.. 솔직히 저도 다른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한 문장 쓰고 한 칸 띠고 한 문장 올리고
한 칸 띠고, 하는 식으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작가들처럼 한 문장 쓰고
엔터키를 눌러 다른 칸으로 옮기고 하는 짓도 할 수 있답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간단히 분량을 늘이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솔직히 어떤
글들을 보면 본문보다 여백이 더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식의 글을 쓰는
게 싫습니다. 지금도 대화와 설명 사이에 여백을 두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원래는 대화와 설명 사이에 여백을 두지 않고 있다가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여백을 둔 것이지 처음부터 여백을 둔 것은 아니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그냥 여백 없이 꽉 채운 분량으로 항상 독자들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그럼, 이만...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115 오직 바다만이 알고 있다... 못 다한 얘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