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54화 (254/318)

5.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말을 몰고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었다.

대충 살펴보아도 스무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건장한 사내들은 산동성 평원현을

출발한 이괘교의 젊은 청년들이었고,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박지현과 이민화였다.

벌써 몇 시간 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곳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사람도

지치고 말도 지쳤건만 쉬지 않고 달렸다. 중간에 말을 갈아타면서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것을 제외하면 엄청난 강행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관도(官道)에는 오가는

사람의 인적이 끊겨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무 필이 넘는 말이 질주하는 소리는

한낮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나, 중간 중간에 길 안내를 하는

신원미상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안심하고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산동성 평원현에서

천진(天津)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간단했다. 산동성 서북부의 대도시 덕주(德州)에서

그대로 북진하면 천진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천진까지 이어지는 관도는 비교적

잘 닦여 있었고, 주변에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탄한 지형이었기에 말을

달리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게 없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서

어둔 밤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기에 수월하게 말을 달릴 수 있었다.

화북평원(華北平原) 북동부 끝자락에 자리잡은 천진은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이유 때문인지 1860년에 개항장이 되었다. 개항장이 된 천진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데 새로 조성된 신 시가지는 주로 외국 공관과 개항장, 청국 관청들이

자리잡았고, 구 시가지는 주로 중국 현지인들이 사는 것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를 나누는 지점에는 자연적인 경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진 시내를 관통하여 발해만(渤海灣)으로 빠지는 해하(海河)였다.

평원현을 출발한 박지현과 이민화가 이끄는 이괘교의 젊은이들은 지금 천진의 구

시가지에 와 있었다. 천진에는 이미 대정원이 포섭한 현지 조력자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조력자의 안내로 구 시가지의 허름한 중국식 가정집에 들어간

박지현과 이민화는 이괘교 청년들에게 잠시 휴식을 준 다음 자신들과 협조하기도

되어있는 사내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모든 준비는 끝마친 상태입니까?"

"이미 분부하신 대로 모든 준비는 마친 상태이옵니다. 그리고, 물건도 준비되어

있구요."

대화는 청국말에 익숙한 이민화와 임강(林崗)이라는 현지 조력자가 주도하고 있었다.

임강이라 불리는 조력자 우두머리는 변발한 땋은 머리를 이마로 돌려 묶은 모습이

여느 중국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가끔씩 번뜩이는 안광으로 봐서는 상당한 수련을

쌓은 사람으로 보였다. 임강이라는 사내는 이민화에게 커다란 나무 궤짝을 하나

들이밀었다. 그 나무 궤짝은 단단한 자물쇠로 봉해져 있었고, 따로 노란 봉인이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간 중한 물건이 아닌 듯 싶었다. 이민화는 나무 궤짝을

박지현에게 다시 밀었다. 박지현은 즉시 열쇠를 들고 자물쇠를 열어 물건을 확인했다.

물건은 주문한 수량과 일치했다.

"좋습니다. 이제 시작할 일만 남았군요."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폭파가 일어나면 예정된 대로 일을 추진해 주십시오."

"알겠사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갖춰놨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예. 수고하시옵소서."

박지현과 이민화는 임강이라는 사내와 헤어진 후 바로 이괘교의 젊은이들이 쉬고

있는 한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현은 아무 말 없이 나무 궤짝을 열었다. 그 안에는

노란 기름 종이에 쌓인 도시락 크기의 네모난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바로

화약이었다. 보통 화약도 아니고 조선에서 제작된 특제 화약이었다. 박지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도시락 모양의 네모난 화약을 젊은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박지현이

나눠주고 있는 동안 이민화가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이 화약은 오늘 밤 거사를 위해 특별히 제조된 것이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폭탄을 설치한 다음에 여기 빠져 나온 줄을 당기기만 하면 자동으로

터지게 된다. 줄을 당기고 나서 폭탄이 폭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반에 반각(半刻)

정도다. 그 사이에 너희들은 탈출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질문 있나?"

이민화의 물음에 청년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무겁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반에 반각이라면 겨우 3, 4분 정도에 불과한 시간이다. 그 안에 폭탄을 작동시키고

탈출해야만 하는,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일이었지만 누구도 이 일을 왜

하는지, 폭탄을 작동시키고 나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교의 수뇌부들이 시키는 일이기에 묵묵히 따를 따름이었고, 행여 이 일을 하다가

죽게 되더라도 한 점 후회할 일도 없었다. 이미 탈출 과정에 대한 것을 철저하게

교육받았기에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지도 몰랐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섬뜩한

기분을 느낄게 분명했다. 그것은 한쪽에서 이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박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위에서 시키니까 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새삼 종교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박지현이었다. 청년들의 무반응에 이민화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다. 가자!"

구 시가지를 빠져나온 이민화와 박지현, 그리고 이괘교의 젊은 청년들은 신 시가지로

가기 위해 해하로 행했다. 신 시가지와 구 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몇 개 있었지만

그 다리에는 포도아문의 초소가 있었다. 하여, 배를 타고 해하를 건너 신 시가지로

진입하려는 생각이었다. 해하에는 이미 현지 조력자가 준비해 놓은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홍콩 영화에서 많이 본 바다에서 사는 중국인들의 배 모양 그대로였다. 제법

커다란 배는 지붕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는 아늑했다.

박지현과 이민화, 그리고 이괘교의 청년들이 두 척의 배에 나눠 타고 해하를 건넌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5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아직 한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2월이라서 그런지 사위는 깜깜했다. 해하를 건너 신 시가지에 도착한 박지현

일행은 행여 누가 볼 새라 빠른 걸음으로 어딘 가로 향했다. 신 시가지는 구

시가지와는 달리 새로지은 서양식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거리는 깨끗했으며

석유등이 길 양옆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대단히 이질적인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청국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나라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가고 있었고,

외세의 진출은 그에 반하여 하루가 다르게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라의

위정자라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다툼에만 눈이 멀어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외면하고

있었다. 천진의 신 시가지는 그런 모습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신 시가지는 예상대로 조용했다. 포도아문(捕盜衙門)의 순검들만 가끔씩 순라를 돌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박지현과 이민화가 이괘교 청년들을 이끌고 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지 얼마나 됐을까? 멀리로 높다란 담장에 둘러 쌓인 한 채의

중국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붉은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고, 그 대문

앞에 돌로 된 사자 한 쌍만이 덩그라니 큰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건물처럼 보였다. 그 건물이 나타나자 박지현과 이민화는 청년들을

이끌고 건물의 뒤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월담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박지현과

이민화는 한참을 청년들을 이끌고 뒤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걸음을

멈췄다. 이민화는 청년들을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다. 너희들은 그저 평소에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 모두들

무운(武運)을 빈다!"

이미 평원현에서부터 상당한 시간을 들여 오늘 침투할 이 건물의 조감도를 가지고

예행 연습을 했기에 이민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이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이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성공한다면 이번 거사는 성공이라고 말 할

수 있었다. 박지현과 이민화는 착잡한 표정으로 청년들을 훑어 본 후 담장 앞에 섰다.

그리고는 무릎을 약간 굽히고 양손을 깍지낀 채 앞으로 모았다. 이괘교 청년들이

담장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손 발판을 만든 것이다. 청년들이 이괘교도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기공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다란

담장을 아무런 도구 없이 뛰어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취한 동작이다. 박지현의

눈짓을 받은 청년들은 차례로 손 발판을 밟고 뛰어 올랐다. 기공의 고수들답게 날랜

동작이었다. 한 명, 두 명, 차례로 담장을 뛰어 오르는 청년들의 숫자는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마지막 청년이 담장을 뛰어 오르자 박지현과 이민화는 자신들도 모르게

담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담장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반복

연습을 통해 각자 맡은 구역으로 쏜살같이 달려간 것이다. 박지현이 이민화를 보며

말했다.

"가시죠. 형님."

"그래, 가지. 어차피 화살은 시위를 떠났으니, 이제 차분히 결과만 기다리면 될 일."

박지현과 이민화는 청년들을 기다리지 않고 이제까지 왔던 길을 역순으로 밟아서

다시 해하로 향했다. 이민화의 말대로 이제는 자신들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차분히 결과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살아 돌아올지 모르는 이괘교

청년들은 천진의 조력자들이 마중 나갈 것이기에 자신들이 굳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언뜻 보면 무책임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지만 조선이 오늘 일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은 절대로 숨겨야할 비밀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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