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51화 (251/318)

2.

시간은 두 달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신년(壬申年 1872년)이 시작된지도 어언

두 달여가 흐른 어느 날 공친왕 혁흔은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자신의

집무실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저기에서

올라오는 보고로 정신 없이 바쁜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지금은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방금 군기대신(軍機大臣)의 마지막 보고를 끝으로 잠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신년에 조선에서 동북지방에 군대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공친왕은 즉시 동원 가능한 군사들을 소집시킬

것을 지시했다. 즉각적으로 팔기군(八旗軍)을 소집하고 각 병영의 한인(漢人) 녹영병(

綠營兵)을 동원할 것을 군기처(軍機處)에 지시하였다. 그리고, 조선 공사 오경석을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강력하게 항의하고 응징할 것을

천명하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선의 힘이 몰라볼 정도로 강대해졌고, 반대로

청국의 힘은 쇠퇴일로를 치닫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이번 사태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 와중에 병석에 누워있던 증국번까지

공친왕을 예방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시시각각

조선을 응징해야한다는 보수 왕공 대신들의 주청이 줄을 이었고, 결국 왕공 대신들의

주청을 공친왕 혁흔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리하여, 산동(山東)과 직예(直隸)

일대의 팔기병들에 대한 소집령이 발동되었으며, 각 지부와 지현의 녹영병들도

덩달아 소집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가 군기대신이 보고한 군사들의 동원

현황이었다. 비록 강희(康熙)·건륭(乾隆) 년간의 성세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비교적

순조로운 동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만족한 공친왕은 느긋한 표정으로 차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보이차(普 茶)는 언제 마셔도 좋단 말이야. 특히 오늘처럼 감기 기운이 있는 날은

더욱 좋아!"

공친왕은 차 뚜껑을 한 손으로 잡더니 약간 휘젓는 듯한 중국인 특유의 동작으로

차를 식히면서 한 모금씩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빛깔의 보이차는

운남(雲南) 지방의 특산이다. 여러 가지 몸에 이로운 약리 작용이 있는 보이차지만

공친왕이 보이차를 마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끔씩 감기 기운이나 몸살 기운이

있을 때는 굳이 의원을 찾지 않아도 보이차를 한 잔 마심으로써 그러한 기운이

말끔히 가시는 것을 좋아하는 공친왕이었다. 특히 약간 흙 냄새가 나면서 텁텁한

듯한 보이차를 마시면 몸 안에서 열이 나면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단숨에 감기

기운이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감기 기운이 약간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보이차를 마시는 공친왕이었다. 공친왕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보이차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급한 보고이옵니다."

"에잉! 어서 들라!"

달콤한 차 한 잔의 여유를 빼앗긴 공친왕은 급한 보고라 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젊은 관리에게 대뜸 짜증부터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리 허둥대느냐!"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일이 너무도 화급을 다투는 일인지라..."

"말해 보거라!"

들고 있던 찻잔을 한 쪽에 내려놓은 공친왕은 소매를 한 번 휘젓더니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달콤한 차 한 잔의 여유는 깨어진 터, 화급한 보고가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방금 호북성(湖北城) 형주부(荊州府) 강릉현(江陵縣)에서 급한 장계가 도착했사온데,

그 장계의 내용이 실로 황망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옵니다."

"형주부 강릉현에서? 그래 그 내용이 무엇이더냐!"

"형주부 팔기주방(八旗駐防) 장군의 보고에 따르면 관내 영지에서 팔기병 일부가

한인 백성들 여럿을 죽이고 그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강릉현의 지현(知縣)을

구타하였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분노한 한인 백성들이 팔기주방 군영으로 떼를

지어 몰려왔고, 급기야는 팔기병과 한인 백성들이 충돌하였다고 하옵니다."

"뭐시라!"

공친왕은 감기가 확 달아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호북성 형주부가 어디던가?

장강변에 위치한 형주부는 북경과 운남성(雲南城) 및 귀주성(貴州城)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였다. 1681년(강희 20년)에

삼번(三藩)의 난(亂)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인 1682년(강희 21년)에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부 강릉현에 북경과 서안(西安), 강녕(江寧) 등에 주둔하던 팔기병 3543명을

주둔시켰다. 3543명이라고 하면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국에 재배치된 팔기병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형주부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7천을

헤아리는 지경이었다.-실제로 1875년에 형주부에 주둔하던 팔기병의 수는 7228명으로

증가했다(荊州駐防八旗志 1879) 참조- 어찌됐든 그런 형주부에서 팔기병과 한인

백성들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호북성 형주부의

위치는 대륙에서도 중앙부에 위치한 곳이다. 중앙부에 위치한 만큼 그 파장은 손쉽게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더구나, 운남과 귀주 등 사천지방과 호북성 인근은

지난 가경(嘉慶) 년간에 있었던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亂)의 중심지라는 측면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공친왕은 젊은 관리가 내민 장계를

펼쳐보았다. 장계에는 형주부 강릉현에서 일어난 일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사실은 사소한 일에서 출발하듯이 형주부 강릉현에서 일어난

한인 백성들과 만주 팔기병 사이의 무력 충돌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에서

출발한다. 원래 강릉현에는 팔기의 기인(旗人) 덕수(德壽)라는 자가 다른 기인 금옥(

金玉)이라는 자와 함께 패거리를 이루며 근동을 주름잡던 건달패의 우두머리였다.

덕수와 금옥은 임신년(1872년) 1월 초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한인 건달 손홍발(

孫洪發)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금옥이라는 자가 소를

사려고 하는데 손홍발이 방해하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금옥은 손홍발의 방해로

원하는 소를 사지 못하자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덕수를 찾아갔고, 덕수는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손홍발을 찾아다녔다. 덕수 일당이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을 눈치 챈

손홍발은 잠시 그들과의 다툼을 피할 요량으로 몸을 숨겼는데 덕수 일당이 자신이

경영하던 주막에 와서 자신의 어머니를 때리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에 격분하여 자신의 패거리를 이끌고 덕수 일당과 충돌하게 되었다.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 것은 자명한 이치. 결국 덕수 일당은 손홍발

패거리에 패하여 만성(滿城)-팔기가 주둔하던 군영(軍營). 한인들은 만주 팔기의

주둔지를 군영이라는 이름보다는 만주인이 사는 성이라는 뜻의 만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으로 쫓겨났다. 만성으로 쫓긴 덕수와 금옥 일당은 즉시 다른 팔기병을

소집하여 손홍발 패거리에게 다시 도전하였다. 그러나, 동네 건달에 불과했던 손홍발

패거리는 중무장한 팔기병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손홍발 패거리는 덕수 일당의

팔기병에게 무참히 패배하게 되었고, 물경 10명이 넘는 한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민가 7채가 파손되었다. 사건이 이 상태로 끝났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나,

문제는 다음에 발생했다. 만주 팔기병과 한인 백성들이 충돌하여 1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즉시 형주부 강릉현의 지현에게로 전해졌다. 강릉 지현

유병찬(劉秉粲)은 즉시 관헌들을 이끌고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진상 조사 결과,

사상자의 대부분은 팔기병들이 쏜 총탄에 상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고, 그 원인도

팔기 기인인 덕수와 금옥의 잘못으로 판명되었다. 강릉 지현 유병찬은 만성으로

들어가 덕수와 금옥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원래 만주인들은 팔기의 주둔지에 군영을 세우고, 그 군영 안에서 생활하였다.

그것은 팔기 기인의 가솔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인 백성들과의 불필요한 충돌과

마찰을 방지하고 만주족의 한인화(漢人化)를 방지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리고 그

군영인 만성 안에서는 한인 관리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만주 팔기 기인들은 한인에 비해서 월등한 사회적 지위와 혜택을 누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만성에 한인 지현과 관리들이 들어와서 충돌 사태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는 소식은 즉시 덕수와 금옥 일당에게 전해졌다. 덕수와 금옥 일당은 무식한

팔기병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감히 한인 관리 주제에 어디서 만주인들을

조사하느냐! 하는 덕수 일당의 선동에 분위기는 삽시간에 한인 지현과 관리들을

몰아내자는 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강릉 지현 유병찬과 관리들은 별다른 조사도

하지 못한 채 뭇매를 맞고 만성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1) 온 얼굴이 팅팅 붓고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생긴 모습으로 만성에서 쫓겨난 지현과 관리들의 모습을 본

형주부 강릉현 한인 백성들은 격분했다. 관리의 정당한 법 집행도 막는 무식한 만주

오랑캐놈들의 작태를 더 이상 두고볼 수만은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뒤에는 덕수 일당에게서 어머니를 잃은 손홍발의 선동이 작용하고

있었다. 아니, 손홍발의 선동이라기 보다는 형주 땅 한인들의 자존심이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형주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촉한(蜀漢)의 유명한 장수 관우(關羽)의 얼이

살아있는 충절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남달랐다.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하여

중국인들 사이에서 신으로까지 추앙 받는 관우이고 보면, 그가 일생을 다하여

지키려고 했던 형주 땅의 한인 백성들은 그만큼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백련교도의 난 당시에도 청나라 팔기병들을 산악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던

경험이 있던 형주 땅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원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농사꾼들은

난리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농사지을 때 사용하는

각종 농기구들이 순식간에 무기로 돌변하는 일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격분한

형주부 강릉현 한인 백성들은 너도나도 손에 삽과 곡괭이 쇠스랑과 같은 농기구를

들고 만성으로 몰려갔다. 일부는 집안에 고이 모셔둔 화승총 나부랭이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 상태가 열악하고 무장도 중앙의 팔기군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지방의 팔기군이라도 군대는 군대였다. 더구나 팔기군이 주둔하고 있던

강릉주방 만성은 동서로 3.65km 남북으로 1.85km에 이르는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냥 야지(野地)에 주둔한 군대도 쉽사리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데 두툼한

성곽의 보호를 받는 군대를 무찌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한인

백성들은 팔기군에 의해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만성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팔기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승전한 팔기군이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강릉현 관내로 진입하여 마을을 수색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할 때는

쥐죽은듯이 잠자코 있거나 인근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소수의 팔기병들이

돌아다니거나 이동할 때는 어김없이 한인 백성들이 공격하여 팔기군을 살육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에서 사용되어 그 효용성이 입증된 게릴라식 산악전의

재등장이었다. 강릉현 팔기주방 장군 상정(祥亭)은 격분했다. 하루가 다르게

사상자는 늘어만 갔고, 시일이 흐를수록 강릉현의 지현뿐만 아니라 형주부의 지부(

知府), 호북성의 총독(總督)과 포정사(布政司) 등 상급기관으로 알려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되면 자신에게도 결코 좋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강릉현 팔기주방의 군사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행하였으나,

역시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열흘이 지나면서부터 형주부와

호북성 총독의 진상조사단이 강릉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강릉현 팔기주방 장군 상정은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으나, 이제는

간단하게 수습할 수 있는 단계는 벌써 지나고 말았다. 단 열흘 사이에 한인 백성

180명 이상이 죽거나 상했고, 100명이 넘는 팔기병이 죽거나 상했다. 그리고,

만주족과 팔기군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벌써 그런

움직임은 주변의 자질구레한 군·현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장계를 읽는 공친왕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문제라는 것이 쉽사리 진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만주족이 한족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건국할 때부터 내재되어 있던

뿌리깊은 민족 간의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사태를 조기에

진화하여야지 그렇지 않고 약간만 시간을 주어도 삽시간에 일파만파(一波萬波)의

파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친왕은 활짝 펼쳐서 읽고 있던 장계를 두

손으로 신경질적으로 구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어떻게!!!"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 이, 이런..."

공친왕은 너무도 엄청난 소식에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겨우 300여 명이 죽거나

상한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친왕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가경 년간에 벌어진 백련교도의 난 십년의

세월 동안 청조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강희, 옹정, 건륭으로

이어지는 삼대 130여 년의 치세를 가경제가 일거에 물거품으로 만든 계기가 바로

백련교도의 난이었다. 10년에 걸친 백련교도의 난으로 국가 재정은 피폐일로로

치달았으며, 전국에서 연거푸 일어난 한족의 반란으로 나라의 기틀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원인이 된 것을 공친왕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도 공교롭다. 조선이 동북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정에서 저들을

정벌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는 이때에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혹, 아조를 무너트리려는 외부의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겨우 팔기 기인 무뢰배와의 충돌이 이렇게까지 크게 비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외부 세력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문제를 크게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불연 듯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따지면 이러한 문제는 이미

청조가 건국할 때부터 내재되어 있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었다. 겨우 10만의 무장

병력을 가지고 있던 만주족이 1억이 넘는 한족을 힘으로 억누르고 세운 왕조가

지금의 청조다. 그리고 지난 아편전쟁(阿片戰爭) 기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얼마든지 있었다.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절강성(浙江省) 진강현(鎭江縣)에 주둔하고

있던 팔기주방 성수위(城守尉)가 일부 한인들이 적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수천의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격분한 한인들이 만주 팔기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때의 사건이나 지금의 사건은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사건인지도 몰랐다. 만주족과 한족간의 뿌리깊은

민족적 배타성이 두 사건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지도 몰랐다. 공친왕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호북성의 총독과 포정사는 무엇을

했으며, 부하들을 잘못 지휘한 팔기주방 장군 상정이란 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강릉현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부 세력의

개입과는 전혀 무관한 사건이었다. 물론, 공친왕이나 청조의 관리들이 모르게 조선의

대정원에서 암암리에 모종의 공작을 하고는 있었지만, 강릉현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은 순전히 우발적인 조그만 사건이 커진 것에 불과 했다. 정작 공친왕을

놀래키는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공친왕이 강릉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다급한 외침이 밖에서 들려왔다.

"전하! 급한 장계이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 yskevin에게 있으며, 이 글은 오로지 유조아의 소설란과

다음카페(데프콘 포레버러브, 1904대한민국, 흉겔의 소설나라)에서만 연재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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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북성 형주부 강릉현에서 일어난 한인 백성들과 만주 기인간의 충돌, 만주

기인의 한인 관리들에 대한 폭행은 1899 1월 20일 실제 발생한 사건이다. 이것을

본문에 등장시킨 것은 전적으로 소설 상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독자들께서는

착오 없기를 바란다. 위의 글은 한양대 임계순 교수의 "청말(淸末) 만한관계(

滿漢關係)에 대(對)한 고찰(考察)-1899년 형주주방 만주 팔기병이 한인 관료들을

구타한 사건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임계순 교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__)

그리고, 한인과 만주 팔기병과의 충돌, 한인 관리들의 구타 사건은 실제로는 폭동의

수준으로 크게 번지지 않은 사건이다. 이것을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폭동

수준으로 번진 것으로 변경했다. 또한 위 사건에 등장하는 모든 만주인, 한인은

1899년 당시 실존 인물임을 밝힌다.

케빈입니다.(__)

오랜만에 뵙습니다. ^^ 오랜만에 올린 글은 재밋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청국의 정세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글의 분량이 조금, 아주

조금 많습니다. 그리고 잠시 잡다한 신변잡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설정 변경에 대한 안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연재하였던 "달은 천 개의

강에 비치고" 챕터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오직 바다만이 알고 있다" 챕터의

에필로그 정도로 삽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연재하는 분량이 "달은 천

개의 강에 비치고" 챕터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5권이 드디어 나옵니다. 모종의 일로 출판이 늦어졌던 5권이 드디어 이번 주

토요일에 나온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신 독자들께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__) 아울러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5권 출판 이벤트는 음... 원래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하는 게 좋겠지요.^^;; 5권 출판 이벤트는 지금까지

大韓帝國記를 보신 독자들 중에서 1권부터 4권까지 출판된 책을 소장하고 계신

분이나, 앞으로 大韓帝國記를 소장할 계획이 있는 분들은 제게 메일로 주소와 성함,

전화번호와 우편번호를 보내주십시오. 물론, 이미 이벤트 증정본을 받으신 분은

제외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선착순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大韓帝國記를

소장하거나 소장할 계획인데 한 권이라도 작가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증정본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메일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다음 일요일(5월

9일)까지 메일을 받겠습니다. 그럼, 제가 도착한 메일을 제비뽑기를 하여 10분의

독자를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도 보지 않기에 공정성을 가지고 뭐라 하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를 믿으신다면 결과에 따라주십시오. 그럼, 메일

기다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올렸던 "작가의 넋두리"를 보고 많은 독자들이 메일을 보내시거나

리플을 남기셨습니다. 무려 560개가 넘는 리플이 올라왔고(네 군데 합쳐서), 50통이

넘는 메일이 답지하였으니,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지요. 리플 달아주신 모든

분들과 메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__)

사실 지난번 제 넋두리를 토로한 글을 보시고 보내주신 리플이나 메일을 보면 제를

격려해주는 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행동에 따끔한 충고의 말씀을 주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사실 저의 행동을 나무라는 독자의 글을 보면 참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 분들의 그런 글들은 모두 저 때문에 비롯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분들께 그런 실망감을 안겨드렸으니 당연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넋두리라고 쓴 글에서 잘못된 부분도 보입니다.

도깹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어도 그런 식의 대응을 해서는

안되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에 대한 제 행동이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저의 그런 글과 행동으로 기분이

나빴을 밝달실록의 독자들과 大韓帝國記의 독자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어찌됐든 저의 경솔한 행동으로 기분이 나빴다면 모든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그럼,

제가 왜 도깹이라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느냐? 밑에 그 사람이 大韓帝國記에 올린

리플의 일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도깹이라는 사람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미사일 안 만들죠? 단종 때도 만든 것인데...

그런데... 케빈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셨더군요. 우리나라에 케씨도 있던가??? ㅋㅋㅋ

흠.... 케빈님은 케씨였던가...

전투기를 만들어야죠. 천군의 기술이면 쌍엽기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은밀히

제트엔진 전투기도 만드는 겁니다.

컴퓨터 왜 안만드나요??? 비행기는요? 핵기술자를 보냈으면 핵융합도 가능할텐데...

흠... 어서 우주전함 거북선을 만들어 우주로 진출을... 하는 것은 무리겠죠???

이젠 비행기 만들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비행기는 안 만들죠? 가능할 것 같은데... 세계 최초의 비행기 만들다...

밝달실록에도 나오는... 그리고 미사일도 없고...]

저도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쓰기 전에 읽는 취미부터 가진

사람의 하나이지요. 그리고 가끔씩 글 쓰시는 작가를 위해 리플도 남기고 했답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른 작가의 글에 리플을 함부로 남기지

않았답니다. 왜냐? 글을 쓰는 사람이 다른 작가의 글을 함부로 평가하고, 다른

작가의 글에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하면서 나대는 꼴은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나름의 생각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작가의 글에

함부로 무어라 나서는 일은 가급적 삼가는 편이었습니다. 그것이 서로간에 지켜야할

선이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도깹이라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거의 매회 얼토당토

않은 리플을 남깁니다. 한 두 번이라면 참고 넘어가지요. 그런데 이런 리플이 몇

십번이나 되는 지 모릅니다. 정말 짜증나더군요. 그래서 한 마디 한 것입니다.

저의 넋두리를 보고 [리얼이 좋아]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장문의 댓글을

남겼습니다. 참고로 저는 560개가 넘는 모든 리플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남긴 리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더군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리플을

남겼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글쎄요 작품에 비해서 자의식 과잉이라는 지적은 여기 글쓰신분도 아셔야할것

같습니다. 현실성 흥미도 스토리전개 사실적은 묘사 인물의 애증과 표현이 적당한가?

딱 5가지만 분류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글의 수준입니다. 문제는 유조아의 평균

수준이 초딩수준으로 작가나 독자나 대부분이 라이트유저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이

글이 두더러 보이지 노무 잘써서 두드러진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설명하신대로 외국서 13년 물먹으셨고 인도의 좋은 대학을 나오셨으며 학술히의

통역을 할만큼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신분의 수준은 이정도 글수준 이면 적당한가

한번 자문해 보싶시오. 저의 지식수준은 여기 글쓴분보다 미천하지만 큰단점

두세가지는 지적해줄수는 있습니다. 먼저 대인관계 /등장인물들의 히노애락이라던지

100인 100색 이라고 할만큼 다양한 개성이 발출되면서 현실과 유사한 이야기가

풀어지고 있는지 한번 검토해보세요 군대식으로 상명하복 마음에 안드면 구테타식의

단순한 패턴이 반복은 여기 조아라 초딩들도 쓰는 스토리입니다. 또한가지

지적하고싶은 것은 현실성입니다. 이소설에서 조선땅 도착해서 1년반동안 신군이

한일을 한번 열거한번 해보셔요 개밸독재 박정희가 20년 해도 못할일을 1년 반만에

묯배를 해버리군요. 더욱더 이상한것은 식물에 대해서 입니다. 도대체 총30만톤이

얼마나 많길래 그속에서나오는 자원이 그리도 많은지요? 공작설비 발전설비 군대

피복 그리고 종자 등 발뒤쿰치로 밟아 우겨넣어도 들어갈거같지가 않습니 식물같은

경우는 종자의 부피나 무게만해도 장난이 아닙니다 기본 라이프 타임을 6개월로만

잡아줘도 1년 반이면 8배 게다가 백성이 혜택을 누릴것으로 계산하면 4배정도지요

겨울이란것을 계산에 넣으면 현실성이 결여 1 그리고 아무리 왕권을 장악하고

신군이라는 네임벨류 가 있다지만 가치관의 혼란을 너무 약하게 잡으시군요 외국을

여행 오래하셨으니 서로다른 가치관의 공유는 얼마나 힘든것인지를 아실것으로

압니다. 물론 소설은 가상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글도 나쁜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글쓴분 글을 읽어보면 글 자체로 논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경 지식수준 학벌

그리고 외국 경험 나이로 밀어부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법입니다. 글쓴후에다는 잡담만 일류라면 그저 잘난척하기위한 글만 되겠지요

수준낮은 뉨아 최고예엽 하는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마시고 글로 대답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생각해보셔요 30년전 신문뒤지고 탈곡하는 장면 쓰기위해 농사짓는 노인

찾아가는거 설명하는것보다 그장면을 더 잘쓰면 되는겁니다. 30년전 자료 안뒤지고

노인에게 자문을 안구했던 사람이 쓰더라도 더 좋게 글을 쓰면 그사람이

더잘쓴것입니다.]

위의 글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남겼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이나 제대로 읽고 이런 글을 남겼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상명하복에 쿠테타의 반복인지? 박정희 개발독재도 못한 일을 단 1년 반만에 몇

배로 뻥튀기 시켜서 이루었다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30만톤에 달하는 수송선이 얼마나 큰지 감이나 잡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우 18000톤 정도에 불과한 그레이트 이스턴호가 4500명의 중무장

병력을 수송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도 이런 소리를 하는 이 사람의 수준은 어떤

것인지 의구심이 들더군요. 그리고, 大韓帝國記는 특정 주인공이 없는 소설입니다.

주로 나오는 인물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조선의 2천만 백성이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2천만에 달하는 조선

백성의 희노애락을 모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大韓帝國記가

특정 주연과 조연을 내세운 글인지를 말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글을

올리지 못하는데 참으로 안타깝군요, 더구나 작가의 지식수준이나 배경, 학벌과

경험으로 무엇을 밀어부쳤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제발 이런

사람이 더 이상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를 욕하거나 실망하신 독자들의 리플도 많았습니다. 기분은

별로 좋지 않지만 그런 것들은 충분히 감당하고 감수합니다. 왜? 제가 의도했든

의도했지 않았든 간에 제 넋두리를 보고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가 저의

책임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고 감수합니다. 그런데, 얼토당토않은

글은 도저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솔직히 저는 건방집니다. 그리고, 아직 덜 여물어서 그런지 고개로 졸라 뻣뻣합니다.

그러나, 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랍니다.

지난회 올라온 수많은 리플 중에서 제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옛말에 벼는 읽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초심으로 돌아가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SoLo님의 리플인데, 솔직히 저는 아직 덜 여물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지 못합니다.

다만, 뒷 문장인 초심으로 돌아가시길... 하는 문장에서는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SoLo님 말씀대로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정말이지 하나 하나의 리플이 모두 소중했고,

모든 독자들께 감사하는 마음뿐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글이 인정을 좀 받는다고

해서, 글의 인기가 좀 있다고 해서 교만해지고 건방져진 것도 사실입니다.(사실 원래

건방지지만...-_-;;) 이제라도 처음 大韓帝國記를 쓸 때의 겸손했던 마음가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악의적인 리플이나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리플에는 지금처럼 단호히 대처할 생각입니다.-_-;;

두서 없는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__)

P.S : 오늘부터 연재는 원래대로 월요일과 목요일에 올립니다. 그럼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5권 연재 분량의 삭제는 지금 하겠습니다. 사전에 예고도 없이 삭제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연재한 지 한 달 이상 되었기에 보실 분들은 다

보신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연재 후에 일주일 지나면 바로 그

분량은 삭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6권 분량의 삭제는 다음주 목요일에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111 달은 천(千) 개의 강에 비치고...2

버그 자수입니다. 당시 청국의 공친왕은 총리각국사무아문을 관장했고, 군기대신을

겸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료를 아무리 둬져도 당시 군기대신이 누군지 나오지

않는데 백과사전에 보면 공친왕이 군기대신을 역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군기대신을 공친왕이 겸임했다고 설정을 변경합니다. 따라서 군기대신의 보고를

받았다는 전 회의 내용은 "군기처의 군기장경에게서 보고를 받았다"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청국에서는 왕에게 "전하"라는 경칭보다는 "왕야"라는 경칭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따라서 전 회의 공친왕에게 "전하"라는 경칭을 붙인 내용은 모두

"왕야"라는 경칭을 사용했다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지적 해주신

장보고잠수함님께 감사 드립니다.(__)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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