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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미년(辛未年) 가을, 조선을 침공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3국
연합함대의 피해는 엄청났다. 총 64척의 전투함이 모조리 격침 당했으며, 80여 척에
이르는 수송선단은 조선 해군에게 나포되었다. 64척의 전투함에 타고 있던 2만 명이
넘는 승무원 중에서 살아남은 수는 약 3천여 명으로 전체 승무원의 1할이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조선 해군이 연합함대의 수송선단과 조선 해군의 자체
수송선들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구조작업을 펼쳤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모조리 수중 고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더불어 수송선단에 탑승하고 있던
10개 연대 병력과 지원 병력을 포함한 총 2만여 명의 전투병력도 고스란히 조선
해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조선 해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10여 분에 이르는 해전
동안, 단 한 발의 포탄도 맞지 않은 조선 해군의 피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일부 함선의 주포 장전수 중에서 무거운 포탄을 운반하다 발등을 찧은 병사들이
일부 있었을 뿐 피해라고도 할 수 없는 규모였다.
3국 연합함대의 참패 소식은 포로가 된 웨이드 청국주재 영국 공사와 로우 미국
전권공사의 보고서를 통해 곧바로 청국에 있는 각국 공관에 알려졌으며, 소식을 접한
각국 공관에서는 가용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본국에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전신망이 완성되기 전이었기에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 교전 당사국에게 이 소식이 전달된 때는 연합함대의 패전이 있고 나서
3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조선 침공을 주도했던 각국의 행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으며, 영국의 타임즈(The Times)와 미국의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그리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 bats)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유수한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특집 기사를
작성하여 3국 연합함대의 충격적인 패배를 다루었고, 이번 조선 침공을 주도한 각국
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자극적인 논조를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한 번 응징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다녔다. 그것은 비단 신문을 비롯한
언론 매체뿐만이 아니었다. 선전 선동을 통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부
정치가들도 그러한 분위기에 동조하여 여론을 호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과 분위기는 독일의 유력 일간지인 라이프치거 차이퉁(Leipziger Zeitung)을
비롯한 몇 몇 독일 신문에 의해 꺾이고 만다. 라이프치거 차이퉁은 조선에 귀화한
로제르 르메르(Roger Lemerre 검재선) 박사의 기고를 받아 그의 대한 기사를
특집으로 7회에 걸쳐서 보도하였는데, 사전에 조선 조정의 부탁과 검열을 받은
르메르 박사는 라이프치거 차이퉁에 보낸 기고를 통해 1866년 있었던 프랑스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불편 부당함과 이번의 3국 연합함대의 조선 침공의 원인과 패전, 3국
정부 관계자들의 도덕불감증과 안하무인의 작태에 대한 통렬한 공박을 함으로써 각국
정부 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을 뿐더러 각국의 확전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라이프치거 차이퉁의 기사를 받은 영국의 타임즈와 미국의 뉴욕
타임즈의 기사가 영국과 미국의 일반 시민들에게 르메르 박사의 기고를 보임으로써
각국의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국가와 정치가들이 행한 비윤리적, 반도덕적 작태에
대한 맹렬한 성토로 이어졌고, 조선에 대한 응징 분위기는 유야무야(有耶無耶)
흐트러지고 말았다. 3국 정부 관계자들은 조선 침공에 대한 잘못을 국민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동안 확전 여론을 선동하던 언론들은 시류에 영합하여
이제는 조선 침공에 깊숙이 관계한 정부의 관료들과 의회의 의원들에 대한 성토를
하기 시작하면서 여론을 또 다시 선동하였다. 이전의 선동이 조선에 대한 응징을
선동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선동은 조선 침공의 전말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그에
관계된 모든 인사들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와 책임자 처벌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대통령이 의회에 나가 이번
조선 침공에 대한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고, 영국에서는 조선 침공을 주도한 노동당
정권이 무너지고 보수당 정권이 집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미 양국이 이렇게
시끄러운 몇 달을 보내는 동안 프랑스는 영미 양국에 비해 조용하게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올해 5월에 독일(프러시아)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 극도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져 있었던 터라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길 원치 않았고, 그런
분위기는 일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침공의 당사국이자 패전국인 영국과 미국, 프랑스가 패전의 회오리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승전국인 조선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먼저,
나포한 연합함대 소송선단의 배 한 척을 이용하여 청국 예부와 북경주재 조선
공사관에 승전 사실을 알린 것을 필두로 영국과 미국, 프랑스에 대한 전쟁 보상금과
포로송환, 그리고 정식 수교에 대한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고위급 외교관을 이번 조선 침공에 파견하지 않았기에 일단 열외로 해 놓고,
북경주재 공사인 웨이드 경을 파견한 영국과 로우 전권공사를 파견한 미국이 협상의
주된 대상이었다. 처음부터 3국 연합함대의 조선 침공 움직임을 알고 있던 조선
조정에서는 섭정공 김영훈의 명으로 이번 기회를 통해 국제 사회에 조선을 알리고
국제법 시대에 조선이 편입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하여, 섭정공
김영훈으로부터 조약 체결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외무대신 박규수는 영국의 웨이드
경과 미국의 로우 전권공사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적 접촉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북경주재 공사 웨이드 경이나 미국의 전권공사 로우는 이미 자국 정부로부터
조선의 강제 개항과 조약 체결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던 터라 회담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회담 초기에 영국의 웨이드 경이 청국을 배제한 조선 단독의
수교회담이 가능하겠냐는 의의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막강한 3국 연합함대를 격파한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조선이 여타
동양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던 웨이드 경과 로우 전권공사는
최대한 평등한 수교 조건을 조선에 제의함으로써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국 지난 1865년에 조선과 독일이 체결한 조덕수호통상조약(朝德修好通商條約)과
같은 평등한 관계의 수교조약의 체결이 조선과 영국, 조선과 미국 사이에 합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호조약 체결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장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포로송환과 전쟁 배상금에 대한 3국의 입장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원래,
나포한 수송선단의 모든 함선은 조선 해군이 전부 몰수하였으며, 수송선단에 타고
있던 지상군 병력에 대한 무장해제를 실시하고 포로들을 임시로 강화도에 수용하여,
그 감시를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사단 예하의 제 1친위 해병여단이 맡고
있었다. 그것은 고위급 외교관이 동승하지 않은 프랑스의 2개 연대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웨이드 경과 미국의 로우 전권공사는 조신이 비록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군의 인도적인 포로에 대한 처우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인도적 측면에서의 우선 포로송환을 주장하였으나,
조선의 외무대신 박규수는 전쟁 배상금 문제가 마무리되기 전에 포로송환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국 회담은 겉돌기 시작했다. 웨이드 경이나 로우 전권공사는
자국에 패전 소식이 알려지면 추가로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응징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은근히 내비치면서 조선의 양보를 기대하였지만 그럼 꼼수에 속을 박규수가
아니었다. 어차피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할 능력이아 의욕이 영미 양국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박규수는 추호도 양보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포로들의 몸값과 전쟁
배상금으로 과도한 금액을 청구하지 않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었고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측은 조선이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수교회담과
포로송환에 대한 협정은 결국 해를 넘겨 1872년 임신년(壬申年) 초에 체결되기에
이르렀는데, 영국과 미국 정부에서 조선 침공에 대한 여론의 비판과 죽어간 연합함대
승무원들의 유족들과 포로가 된 장병들의 가족들이 연일 총리관저와 백악관, 그리고
의회 앞에서 시위를 한 결과 조선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3국 연합함대의 조선 침공 기도를 사전에 적발하여 덕적군도 해상에서 그들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무찔렀다는 소식은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실리며 조선 팔도
방방곡곡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好事家)들은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면서 연합함대를 무찌른 자랑스런
조선 해군 제 1왕립 근위함대의 활약을 선전하기 시작했고, 2천만 조선 백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랑스런 승전을 소리 높여 칭송하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이번
해전을 승리로 이끈 김종완 해군사령관 이하 모든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라는
상소가 전국에서 답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해군 관계자들에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해군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아니 조선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섭정공 김영훈 이하 모든 천군의 공을 소리 높여 칭송하는
목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기에 이르렀다. 섭정공 김영훈은 이번 덕적군도
대첩(大捷)-조선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을 기화로 조선과 서양 제국(諸國)과의 정식
수교의 길이 열리길 기대하고 있었고, 결국 영국하고 미국과 완전한 평등 수교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상당한 전쟁 배상금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의 변화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섭정공 김영훈은 지난 여름부터 대정원이
주축이 되어 실시하던 조정 중신들과 종친부 인사들을 상대로 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대한 공작을 좀 더 진행시켜 대다수 조정 중신들과 명망 있는 종친부
인사들의 중지를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임신년(1872년) 신년하례식에서 임금이
직접 그와 같은 사실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물론, 아직까지 근대적 개념의
입헌군주제라기에는 무언가 미흡하지만, 일단 지금과 같이 섭정공 김영훈이 임금을
대신하여 계속 정사를 돌본다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임금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나 외교적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역할이
분담되었다. 임금과 섭정공 김영훈 사이의 역할 분담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일부
천군은 새로운 주장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일부 2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는 임신년을 기점으로 칭제(稱帝)하고 건원(建元)하여 제국(帝國)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청국을 제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자라고 자존
자대하기에는 조선의 힘이 미흡한 감이 없잖아 있었고, 일부 썩어빠진 사대부들이
아직까지 사대(事大)니 소중화(小中華)니 하는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당장 칭제 건원하여 제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섭정공 김영훈은 조선이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조선의 힘을
길러야 했고, 그렇게 축적된 힘으로 제국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함으로써, 진정으로 천년 세월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국 각지에서 이민족인 만주족의 청조에 반하는 민중 봉기와
반란이 끊이지 않는 지금의 청국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아시아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무조건 그들을 배척하거나 동등한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래서 청국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공작을
대정원에서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 그 실행 시기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섭정공 김영훈은 당장 제국을 선포하고 칭제 건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명백한 우리 땅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사단급의 부대를 임신년 새해가 밝자마자 간도로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할 것을 명했다. 사실, 진작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했어야 했을 땅이었지만 청국에
사대하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청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한 이상, 그리고, 청국을 분열시키는 공작을 추진하기로 한 이상, 더
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간도의 관리 또한 청국을
분열시키는 공작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1872년 초에 조선과 영국,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米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자 정작 당황한 것은 프랑스와
청국이었다.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꼴 보기 싫은 북경주재 조선 공사
오경석에게 굽실대며 전쟁 배상금과 포로송환 문제를 가지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던
차에 영국과 미국이 조선과 정식 수교를 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조선 침공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프랑스였고, 그랬기에 고위급 외교관을 파견하여 강제
개항을 시도할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던 프랑스였다. 그런데, 막상 영국과
미국이 조선과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등한 수호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한 조선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부랴부랴 본국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고 훈령을 기다렸지만, 아시아와 유럽이 어디 엎어지면 코 닿을 데던가. 결국
벨로네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만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국의 실력자인 공친왕 혁흔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감히 소국인
조선이 3국의 쟁쟁한 연합함대를 물리칠 줄은 상상하지 못하던 공친왕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3국 연합함대의 움직임을 조선에게 통보하지도 않았고, 내심으로는 한 번
크게 당해보아라 하는 심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이 3국 연합함대를 괴멸시켰다는
소식이 들렸고, 급기야는 조선이 단독으로 영국하고 미국과 수교를 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청이 서양 제국(諸國)과 체결한 일방적인
불평등조약이 아닌, 완전한 평등조약이라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임신년이 되자 조선은 그동안 내버려두다시피 했던
동북지방(조선명 간도)에 1개 사단급 부대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를 시도하기에
이르렀으니, 청국 조정이 느낀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친왕은
조선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작태에 충격을 받고 강력하게 응징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그러나, 당장 막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군을 막을 수 있는 군사력이
현재 청국에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난 갑자년(甲子年 1864년)부터
조선으로부터 꾸준히 양식보총(攘式步銃)을 수입하여 그 수가 근 3만 정에
이르렀지만, 3만 정이라고 하여도 모든 군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양도 아니었고,
충분한 실탄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당장 응징하고자 하여도 응징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막강한 법국 군대를 몰살시킨
육군이나, 지난해(1871년) 3국 연합함대를 수장시킨 해군의 능력을 봐서도 조선의
능력이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가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국의 실력자 공친왕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원로대신인 전 직예총독(直隷總督) 증국번(曾國藩)이 병든 몸을 이끌고 공친왕을
예방하였다. 증국번은 공친왕을 예방한 자리에서 간곡한 어조로 몸을 낮추고 힘을
기를 것을 강청(强請)하였다. 증국번의 간곡한 주청을 들은 공친왕은 고민에 빠졌다.
공친왕도 조선의 힘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청국
실력으로는 조선군을 격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만주족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만주지방에 조선군이 진주했다는 사실은 쉽사리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다른 왕공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공친왕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지만 결국 조선을 응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청국 조정에서
동북지방에 진출한 조선군을 격퇴하고 조선을 응징하는 것으로 중론을 모으고 행동에
옮기려는 시점에서, 그들의 발목을 붙드는 또 다른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으나
공친왕을 비롯한 조정의 실권자들이나 대륙에 사는 청국인들 중 누구도 그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폭풍이 대륙을 향해
휘몰아치려고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대륙에
부는 폭풍은 어떻게 몰아칠 것인지...
*이 글의 저작권은 작가 yskevin에게 있으며, 아울러 글에서 오탈자 및 오류, 또는
의견, 건의를 보내실 분들은 리플이나 감상, 비평란 또는 작가의 개인 전자우편
[email protected]이나 [email protected]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택되신 의견이나 건의는 작가가 판단하여 글의 진행에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케빈입니다.(__)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있는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오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라서 그런지 개운한 느낌과 함께 청량감을 주네요. 그런데, 불행히도 제가 글을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죄송하지만, 일신상에 복잡한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글의 진도가 나가질 않았습니다. 송구한 마음으로 여러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합니다. 일신상의 여러 가지 일들이 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글을 쓰기가 쉽지 않네요. 아무래도 이번 주도 오늘 올린 글이 유일한
연재가 될 공산이 큽니다. 죄송합니다.(__)
내일쯤 해서 글을 쓰면서 느낀 소회나 여러 가지 하고픈 말들을 써서 올리겠습니다.
낼 다시 뵐 수 있기를... 그럼, 이만...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110 달은 천(千) 개의 강에 비치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