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새로운 날이 밝았다. 다행히 웨이드 경의 우려와는 달리 조선 해군 함대에서는
야간을 이용한 어떠한 적대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합함대의 의용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무슨 또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지는 몰라도 연합함대의 진로를
방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연합함대는 공해상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원래의 예정대로 강화도를 향해 순조로우면서도 조심스런 항해를 하고 있었다.
연합함대의 수많은 전투함과 수송선단이 막 조선인들이 덕적군도(德積群島)라고
부르는 일단의 섬 무리에 접어들려는 순간, 전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연합함대의 기함인 아가멤논의 1번 마스트 견시수의 눈에 포착되었다.
"전방의 섬 그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견시수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함 전체로 퍼져나갔다. 선실에서 참모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켈렛 제독은 갑판으로 뛰어 나왔다. 멀리 전방 약 4500야드
부근에서 몇 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조선 해군 제 2 왕립 근위함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총 8척의 조선 해군 제 2 왕립 근위함대는 막강한
연합함대의 위용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음인지 천천히 그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함장! 수송선단과 호위선단을 뒤로 돌리고 함대는 신속히 진형을 개편한다!
단종진으로! 서둘러!"
"알겠습니다. 제독님."
켈렛 제독의 명령을 받은 아가멤논의 함장 에드윈 프랫(Edwin Pratt) 대령은 즉시
통신사관에게 깃발 신호를 보낼 것을 지시하고 쌍안경을 들어 켈렛 제독에게
건네줬다. 켈렛 제독이 막 프랫 대령이 건네준 쌍안경을 들어 눈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1번 마스트에 있는 견시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적 함대 발포!!!"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견시수의 관측은 정확했다. 연합함대의 단종진을 마치
창으로 뚫기라도 하려는 듯 역 V자(字) 모양의 쐐기형 진형을 선택하여 접근하고
있던 조선 해군 함대는 거리가 4000 야드 정도에 이르자 순식간에 주포를 발사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견시수의 보고를 오보라고 생각한 켈렛 제독은 급히 쌍안경을 들어서 조선 해군
함대를 바라보았다. 막 켈렛 제독이 조선 해군 함대를 관측하려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씨우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쿠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줄기가 연거푸 치솟으며 그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켈렛 제독의 귀에 견시수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물줄기가
치솟은 직후였다.
"벨러로폰(Bellerophon) 피격! 벨러로폰 피격!"
"뭐야! 오! 하느님!"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서있는 켈렛 제독에게 프랫 대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제독님! 함대 증속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프랫 대령의 울부짖음을 들은 켈렛 제독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수송선단과 전투함을 포함한 140척의 연합함대를 지휘하는 제독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지금의 켈렛 제독은 이상하리만큼 허둥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켈렛 제독의 실수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누구라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였다. 세상의 어느 함대 사령관이 4000야드도 넘게
떨어져 있는 적 함대가 포격을 해 올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구나 4000야드를
날아온 적의 포탄이 정확히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의 전투함을 두들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워리어급 전함의 2번함인 아가멤논에 7인치 암스트롱
후장포가 탑재되어 있었고, 그 7인치 암스트롱 후장포의 최대 사거리가 4500야드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대 사거리였다. 누구도 7인치 암스트롱
후장포를 쏘아서 4000야드 밖의 적함을 맞출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합함대의 주포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부 모니터함을 제외한
연합함대의 모든 전투함의 주포는 현측에 장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측에 장착되어
있는 주포를 발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거리까지 접근한 후에 함선을 선회하여
현측에 장착된 주포를 쏠 수밖에 없었는데, 아직까지 거리는 3500야드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것도 정면으로 마주한 상태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비록
일부 전투함의 주포가 함수에 장착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함수포를 발사하기에는
거리가 되질 않았다. 이래저래 퍼부어지는 포탄을 몸으로 맞아가면서 접근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때리는 조선 해군의 입장에서 보면 120mm 쌍열주포의
최대사거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때리고 있었지만, 맞는 입장에서 보자면 싸울 준비도
안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맞고 시작한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랫
대령의 말에 정신을 차린 켈렛 제독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켈렛 제독도 역전의
노장답게 기민하게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를 하고 있었다.
"함대! 전속력으로 증속! 기관 출력 최대로!"
"전속력으로 증속! 통신사관! 전 함대에 제독님의 명령을 하달하라!"
켈렛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자 연합함대의 모든 전투함들이 일제히 돛을 펼쳤다.
그리고 기관실의 보일러들도 맹렬히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하늘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가멤논은 최고속도가 14노트에 불과하지만 지금과 같이 순풍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충분한 추진력을 돛에 전달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최고속도는
15노트에서 16노트까지 증가할 것이다. 켈렛 제독의 명령을 통신사관에게 하달한
프랫 대령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켈렛 제독의 다음 명령이 쏜살같이 뒤를 이었다.
"거리 1천 500야드부터 일제사격을 실시한다!"
켈렛 제독의 명령을 내리는 순간에도 조선 해군 함대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연이어서
바람을 가르는 휘파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커다란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견시수의 울부짖는 소리도 덩달아 커져갔다.
"씨우우우우우웅! 쓔웅! 씨웅!"
"쿠아앙! 콰콰쾅!"
"벨러로폰! 또 다시 피격! 벨러로폰 굉침합니다!"
"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장갑함 벨러로폰의 배수량은 6550톤으로
디펜스(Defence)급 전함이나 헥터(Hector)급 전함과 유사했다. 그러나, 전장은 두
전함에 비해서 약 5m 정도 더 길었고, 출력도 2540마력의 기관을 장착하여 11.
6노트의 최고속도 밖에 낼 수 없는 디펜스급 전함에 비해서 6521마력의 기관을
장착하여 14.2노트의 최고속도를 낼 수 있는 전함이 벨러로폰이었다. 6521마력의
기관을 장착한 벨러로폰은 영국 해군이 보유한 가장 빠른 전함 중 하나였고, 그렇기
때문에 연합함대의 선두에서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위리어급이나 디펜스급
전함이 겨우(?) 4.5인치의 장갑을 두른 것에 비해서 벨러로폰은 6인치의 장갑을
덕지덕지 두르고 있는 전함이었다. 그런 벨러로폰이 조선 해군의 주포에 몇 발 피격
당했다고 해서 굉침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켈렛 제독의
눈앞에서 펼쳐지자, 켈렛 제독을 비롯한 모든 연합함대의 장병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씨우우웅! 쓔웅! 쓩쓩! 씨우웅!"
"콰아앙! 콰광! 쾅! 콰콰쿠앙!"
"갤러티어(Galatea) 피격! 갤러티어 피격! 갤러티어 굉침합니다!"
"이런! 제기랄! 기관실! 기관실! 출력을 더 높일 수 없나!"
켈렛 제독은 제독의 신분을 망각하고 기관실로 통하는 전성관을 부여잡고 악을
질러댔다. 어떻게든 사거리까지 접근하여 포탄을 퍼부어 줘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관의 출력을 최대로 하여 서둘러 적 함대에게 접근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관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절망적이었다.
"불가능합니다. 제독님. 지금 기관의 출력이 110%입니다. 이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켈렛 제독이 기관실에서 들려오는 불가능하다는 소리에 주먹을 불끈 쥐며 애를
태우는데 견시수와 함수포대장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적 함대가 선회합니다! 적 함대가 선회합니다!"
"함수포대 발사 준비 끝!"
"적 함대가 도망친다! 모든 함수포는 전방의 적 함대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라!
함수포 발사!"
"아직 사정거리가 안됩니다. 제독님!"
"뭐야! 이럴 수가!"
켈렛 제독은 함수포대장의 대답에 자신이 순간적으로 착각했음을 자각했다. 함수에
장착된 함수포는 8인치 전장포였다. 최대사거리가 4500야드에 이르는 7인치 암스트롱
후장포는 오로지 현측에만 장착되어 있었다. 8인치 전장포로는 아직 적 함대를
타격할 수가 없었다.
"쑤아아앙! 쓔우우웅! 쓩! 쓔웅!"
"쿠콰콰쾅! 쿠아아아! 콰콰쾅!"
"디펜스(Defence) 피격! 헥터(Hector) 피격!"
1번 마스트의 견시수는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벌써부터 목이 쉬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시 디펜스와 헥터가 피격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켈렛 제독의 눈에서
불통이 튀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가멤논의 제일 후미에 위치한 3번 마스트의
견시수가 소리를 질러댔다.
"뉴 아이언사이드가 침몰합니다! 아이오와(Iowa)도 침몰합니다!"
"뭐야!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독님!"
약간 어려 보이는 3번 마스트의 견시수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3번
마스트 견시수의 급작스런 외침에 놀란 켈렛 제독과 참모들이 함미 쪽으로 뛰어와
견시수에게 소리쳐 물었으나, 3번 마스트의 견시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별다른 생각 없이 전방을 주시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는데, 미국 해군 아시아함대의 기함이고, 연합함대 부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탑승하고 있는 뉴 아이언사이드가 갑자기 두 동강이 나버리면서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옆에서 헐떡이며 따라오던 콜로라도급 목조함 아이오와까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견시수의 울먹이는 소리에 짜증이 왈칵
치솟은 켈렛 제독이 고개를 쳐들고 무어라 큰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견시수의
경악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으악! 주노(Juno), 오로라(Aurora), 제이슨(Jason), 애러두저(Arethusa) 침몰합니다!
"
미국 해군의 뉴 아이언사이드와 아이오와는 최고속도가 7노트에서 9노트에 불과했다.
하여, 함대의 전방에 포진하지 못하고 후미에서 따라오던 함이었다. 그런 뉴
아이언사이드와 아이오와가 침몰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중간에서 항주하고 있던
주노와 오로라, 제이슨, 에러두저까지 침몰했다는 견시수의 음성에 켈렛 제독의 몸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전방에서 항주하던 벨러로폰이나 겔런티어는 적 함대의
포격에 피격 당해 굉침했다고 하지만, 뉴 아이언사이드나 아이오와, 주노, 오로라,
제이슨, 애러두저는 침몰할 이유가 없었고, 적 함대의 포탄에 피격 당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켈렛 제독의 몸은 연합함대를 향해 밀려오는 알 수 없는 공포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해군 함대는 켈렛 제독이 이러 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달아나면서도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작가 yskevin에게 있으며, 아울러 글에서 오탈자 및 오류, 또는
의견, 건의를 보내실 분들은 리플이나 감상, 비평란 또는 작가의 개인 전자우편
[email protected]이나 [email protected]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택되신 의견이나 건의는 작가가 판단하여 글의 진행에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107 오직 바다만이 알고 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