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32화 (232/318)

3.

추석(秋夕)도 지나 구구(九九) 중양절(重陽節)이 코앞인 어느 날, 북경의 조선

공사관으로 통하는 골목에는 때아닌 마차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바로 웨이드(

Thomas Francis Wade) 청국주재 영국 공사와 벨로네(Claude Henri Marie Bellonet)

법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Frederick Ferdinand Low) 미국 전권공사 일행이 타고 온

마차들이었다. 유럽식 건축양식의 다른 서양 제국의 공관과는 달리 중국 전통의

사합원(四合院)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조선 공사관은 따로 마차가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여, 마차가 공사관 내부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에

댈 수밖에 없었다. 조선 공사관 주변의 청국 사람들은, 코만 디립다 큰 코쟁이들을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한꺼번에 많은 코쟁이를 본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3국 공사 여러분."

조선 공사관 접견실에서 3국의 공사들을 접견하는 북경주재 조선 공사 오경석의

풍모는 당당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심으로는 이들의 방문 목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찾아온 손님을 소홀히 대접하지 않는 조선 전례의

예법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송구하다는 인사를 먼저 드립니다."

좌중의 인물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영국 공사 웨이드 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국 육군 중위로 아편전쟁에까지 참전했던 웨이드 경은 1845년 홍콩

대심원의 통역관으로 청국에 머무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줄곧 상하이주재 영국

영사관, 또는 공사관에서 일을 해온 경험이 있었기에, 동양의 예법에도 밝았다.

더군다나 지난 1867년에는 서양인을 위한 중국어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어언자이집(

語言自邇集)을 출간할 정도로 동양 사상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동양 문화에 정통한 웨이드 경이었기에 이런 겸양의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며칠 전에 인편으로 오늘의 방문을 예고하였기에, 상대방인

조선 공사 오경석에게 크게 결례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저변에 깔려 있었다.

웨이드 경의 인사를 받은 오경석은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고, 세 사람은 차례로

앉았다. 이어서 차와 간단한 다과가 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차와 다과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험, 험... 그래, 세 분 공사께서 우리 조선 공사관을 방문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색한 침묵을 헛기침으로 날려버린 오경석이 말문을 열었다.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인 된 도리로 먼저 묻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였다.

유창한 오경석의 청국 말에 세 사람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다, 역시 웨이드

경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웨이드 경과 벨로네 공사, 로우 전권공사 사이에는 무슨

묵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우리 세 나라의 공사들이 귀국의 공사관을 방문한 목적은 다름 아닌 선전포고(

宣戰布告)를 하고자 함입니다."

"방금 선전포고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세 나라는 귀국의 서양 열강에 대한 적대적 중립노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강제 개항시킬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본인과 법국의 벨로네 공사,

미국의 로우 전권공사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전권을 3국 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이렇게 귀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바입니다. 공사께서도 아시다시피 귀국은 여러

차례 우리 서양 열강에 대한 적대행위를 해왔습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할 때가

온 것입니다."

담담하게 흐르는 웨이드 경의 말은 실상 엄청난 내용이었다. 영국과 법국, 미국 등

3개국이 연합하여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선전포고였으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말하는 웨이드 경이나 듣는 오경석이나, 그리고 청국 말을

모르는 로우 미국 전권공사에게 통역을 해 주고 있는 법국 공사 벨로네의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오경석의 표정은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경석은 웨이드 경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우리 세 나라의 공사는 청국 총리각국사무아문에 한 통의 조회문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세 나라의 귀국에 대한 선전포고에 있어서, 청국 조정은

어떠한 적대행위나 이적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도 물론, 청국 조정에서 귀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와 같은 조회문을 보냈습니다. 아울러,

귀국의 유일한 서양 수교국인 독일 공사관에도 동일한 내용의 외교 서신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귀국을 도와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3국 연합함대의 명을 내려 며칠 내로 귀국을 치러 출병할 것을 지시한

상태입니다."

"... 음... 말씀 다 하셨습니까?"

"예. 말씀하시지요."

오경석은 잠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단정한 은발을 기름을 바른 듯 부드럽게 넘긴

웨이드 경의 얼굴을 훑어보았고, 오만한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벨로네 법국

공사에게도 눈길을 한 번 주었다. 마지막으로 처음 보는 프레드릭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로우 미국 전권공사도 한번 쳐다보았다. 모두들 '이래도 네가 까불테냐' 하는

무언의 눈길을 오경석에게 보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세 사람을 훑어

본 오경석은 다시 시선을 웨이드 경에게로 돌렸다.

"웨이드 경께서는 청국을 비롯한 동양에 오래 재직하셨다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청국 말과 문화에 아주 해박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겠지요?"

"험... 나름대로 해박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만...?"

"그럼,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아시겠지요?"

"무슨 말 말입니까?"

"혹, 웨이드 경께서는 맹룡과강(猛龍過江)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계십니까?"

"맹룡과강요?"

"그렇습니다. 맹룡과강."

맹룡과강이라 함은 '사나운 용이 강을 건넌다'. 또는, '사나운 용만이 강을 건널 수

있다' 라는 뜻이다. 동양에서 공직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웨이드 경이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웨이드 경은 자신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림을 느꼈다.

설마 자신들을 치러 가는 3국 연합군을 맹룡에 비유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조선이 맹룡이 될 수 있음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오경석은 그런

웨이드 경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 조선은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방을 먼저 침공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을 침공한 이민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몰아내고야 말았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대 제국(帝國)을 건설했던 몽골의 경우를 봐도 우리 조선 사람들의

강인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던 몽골은 우리나라를

무너뜨리려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30년에 걸친 위대한 항쟁으로 끝내 복속시키지

못하고 강화만 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돌린 오경석의 말이 다시 이어진 건 웨이드 경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라였다.

"귀 3국에서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조선의 서양 제국(諸國)

에 대한 적대적 중립노선. 아니면 귀국의 해적상선을 침몰시킨 것에 대한 응징.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우리 조선이 언제 귀 3국에게 적대적 행위를 했다는 말입니까!

항상 도발은 귀 3국이 먼저 했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사교로 규정했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밀입국한 것도 귀 법국이며, 있지도 않은 천지교 탄압을 빌미로 우리

조선을 침공한 것도 귀 법국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권국가의 법률을 무시하고 내강

항해를 강행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도 귀 미국의 해적 상선이었습니다. 또

플라잉 클라우드호는 어떻습니까? 아국 상선의 재화를 노리고 해적질을 하기 위해

접근하다 침몰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살아남은 플라잉 클라우드호 항해사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까! 귀 3국에서는

도발하는 상대에게 호의로 대합니까? 귀 3국의 도덕과 법률이라는 것이 거기에

기초한 것입니까! 그런데 적대적 중립노선이라니요! 우리 조선이 서양 제국에

악감정을 품고있다면 어째서 독일과는 수교를 했겠습니까? 우리 조선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상대에게는 항상 대화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상대에게는 그에 따른 응징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우리 조선의

외교노선에 대해서 귀 3국에게 무어라 간섭할 권한이 있습니까? 우리 조선이

상국으로 받들고 있는 청국에서 조차 우리 조선의 외교노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는데, 귀 3국이 항차 무엇이건데, 남의 나라 외교노선이 어쩌구저쩌구 하며 나서는

겝니까! 그리고, 해적 상선 제너럴 셔먼호와 플라잉 클라우드호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귀 영국과 미국 정부도 잘못을 인정한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선전포고를 해요! 도대체 귀 3국에 도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적절한 사과나 보상도 없이 무조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귀

3국이 과연 문명국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후회할 겝니다. 귀 3국은 우리 조선을

침공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할 겝니다. 왜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못하는 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겝니다."

영국 공사 웨이드 경이나, 로우 미국 전권공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쓴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오경석의 말이 한치의 그른 점이 없었기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간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조선 공사 오경석의 이러한 반응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런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보일 줄은 상상하지 못하였기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조선 공사관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서 세 공사가 몸소

행차한 것인데, 조선 공사 오경석이라는 자의 자신감은 정말 터무니없을 정도로

굉장했다. 이렇게 되자 선전포고를 한답시고 조선 공사관을 방문하여, 그동안 훼손된

자존심을 세워보려는 세 공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선을 침공하여 무참하게 패한 전력이 있는 법국 공사

벨로네만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벨로네는 얼굴이 벌게져서 큰 소리를 쳤다.

어지간하면 자신도 참으려고 했으나, 오경석이 법국의 조선 침공과 완패를

들먹거리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듣기 싫소! 수 천년 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한 나라가 어디 한 둘인 줄 아시오? 그 따위 자존심일랑

개에게나 줘버리시오!"

벨로네는 오경석에게 악감정이 많았다. 지난 1866년 조선과의 전쟁의 결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었고, 그 전쟁 배상금과 포로 송환 문제로 오경석을 수 차례

만나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굴욕감과 모멸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때의 악감정이 지금까지 남아 이 자리에서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조선 공사관까지 와서 선전포고를 한다는 발상은 벨로네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처음부터 조선과 조선 공사 오경석에게 악감정이 있던 벨로네는

요식 행위에 불과한 선전포고라는 것을 통해 거만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

공사 오경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경석의 조목조목 사리에

맞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처음의 취지와는 너무도 다르게 얘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여, 벨로네는 자신이 외교관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이렇게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동원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번 조선 침공에서 프랑스가 담당하는 역할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영국과 미국이 각각 전투함을 20척에서 30척까지 투입하고,

보병을 7,8개 연대씩 투입한 것에 비하면, 프랑스가 이번 조선 원정에 투입한 무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와해되다시피 한 코친차이나(Cochin China) 함대의

잔여 함선 3척과 코친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1개 연대 규모의 지상군이 참전 병력의

전부였다. 지난 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여파로 원정군을 파견할 여력이 되지

않았지만, 미개한 조선에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이번 기회에 만회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무리하게 원정에 동참한 것이다.

"벨로네 공사! 일국의 고위직 외교관이라는 자의 입에서 그렇게도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이 희박한 말이 튀어나올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귀하와 같은 인물이

어떻게 공사라는 직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귀하와 같은 인물을

동양의 제일 강국인 청국 주재 공사로 임명한 귀국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

바입니다. 영국과 미국의 꼬랑지를 붙들고 겨우 겨우 참전하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조선 공사 오경석은 이미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동원한 함선의 수가 총 몇 척인지, 지상군 병력은 어느 정도이고, 보유 화력은 어느

정도인지,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법국에서 이번 원정에 투입한

함선과 병력의 규모까지 알고 있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오경석에게는 벨로네의

말이 허풍처럼 들리고 있었다. 실질적인 주력은 영국과 미국이 다 차지하고 있는데, '

기껏 곁다리로 참전하는 주제에 무엇이나 되는 양 나서는 네 놈이 정말 가소롭구나'

하는 말이었다. 벨로네는 오경석을 쏘아보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가슴속을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주체할 수 없는 살의(殺意)

가 치솟고 있었다. 막 벨로네의 분노한 일갈이 터져 나오려는 찰라, 오경석의 싸늘한

말이 다시 들렸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귀 3국의 우리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는 스스로 재앙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임을 명심하시고,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못한다' 는 말. 그 말만은 잊지

마십시오. 나중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럼,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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