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24화 (224/318)

5.

임금은 대궐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첫 아들이자, 맏아들이 있는 영보당으로 향했다.

바로 귀인 이씨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중전 김씨가 어릴 적부터 흥선이

정해준 정혼자였다면, 귀인 이씨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최초의 여인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의 아련한 첫사랑이 중전 김씨였다면, 귀인 이씨는 생부와 형들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에 휩싸였을 때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여인이었다. 임금은

중전 김씨도 좋았지만, 귀인 이씨도 좋았다. 딱히 누구를 더 편애한다든지 하는 게

없는 그런 사이가 임금과 중전, 임금과 귀인 이씨와의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전 김씨도 자신을 대신해서 어린 임금을 보듬어 주었던 귀인 이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만하면 나름대로 화목한 왕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세

사람이었다. 마침 영보당에는 귀인 이씨말고도 중전 김씨가 와서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중전 김씨는 귀인 이씨보다도 완화군을 사랑한 나머지 이렇게 종종

영보당으로 걸음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도 그러했다.

"전하, 안색이 좋지 않사옵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중전 김씨는 수심이 가득한 지아비의 얼굴을 보고, 걱정이 된 나머지 이렇게 물었다.

귀인 이씨도 그런 중전의 물음에 동의한다는 듯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임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나저나 우리 완화군(完和君)은 초저녁인데 벌써

잠들었소?"

"네, 아까 이 귀인이 먹인 젖을 먹고 바로 잠이 들었사옵니다."

"고놈 참... 자려거든 애비 얼굴이나 보구 자지 않구..."

임금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요즘처럼 정신적으로 힘든 시절에 올

초에 태어난 완화군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고 있었다. 완화군이라도 보는

낙이 있었기에 견디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쉬워하는 임금을 보면서 중전 김씨가 다시 말했다.

"오늘 이 귀인과 함께 성정각(誠正閣)에 다녀왔사옵니다."

"어머님께요? 잘 하셨어요, 자주 찾아뵙는 게 도리지요."

임금은 단순히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두 며느리와 손자를 보고 싶어서 불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하기야 첫 손주이자 맏손주인 완화군이었으니, 오죽 보고 싶을

것인가. 더군다나 남편을 비명에 잃고 졸지에 생과부가 된 것도 부족한데, 친정의

동생들까지 역모를 주도한 혐의로 도륙이 난 마당이라 혈육이 그리울 만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은, 완화군이 보고싶은 것도 있었지만, 경평군 대감의 말씀 때문에 저희를 찾으신

것이옵니다."

"음..."

임금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규방의 아녀자가 국정에 나서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지만, 지난 을축년(乙丑年 1865년) 친정 동생들이 주도한 역모로 인해 집안이

적몰된 경험까지 있는 어머니가 왜 또 다시 국정에 나서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임금의 우려와 짜증을 뒤로하고 중전 김씨의 말이 다시 들렸다.

"어머님께서는 경평군 대감의 주청에 대한 우려와 전하의 의중을 물으셨사옵니다."

"그래서요? 어머니께서는 무어라 하시던가요?"

"......"

"왜요?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리도 뜸을 들이는 겝니까? 무슨 안 좋은 말씀을

듣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이오?"

"아니옵니다. 전하. 다만..."

"다만...?"

"전하, 신첩(臣妾)이 지금 드리는 말씀을 곡해하지 마시옵소서. 약조해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어-허... 참. 좋아요, 내 약조하리다. 됐소? 자, 이제 말씀 해보세요. 무슨 말인지."

"전하 서양의 강국인 영국과 독일은 지금 우리 조선처럼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것 아니오?"

임금은 중전 김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미 장현덕

추밀원장에게 자신을 비롯하여, 중전 김씨와 귀인 이씨도 같이 신학문과 신문물에

대한 훈육을 받아서 잘 알고 있는 것을 왜 새삼스럽게 거론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영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들고일어나서 왕정을 뒤엎는 명예혁명을

일으켰사옵니다. 그리고, 왕실은 모든 권력을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나게 되지요. 지금도 영국이라는 나라는 왕실은 상징적으로 존재하면서 나라의

얼굴 역할을 하고 실질적인 정치는 의회에서 한다고 들었사옵니다."

"지금 그 말은 우리 조선도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임금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임금의 음성에서 약간의 반색하는

기운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남모르게 해오던 자신만의 고민이, 사실은

자신만의 고민이 아닌, 자신의 어머니와 중전 김씨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고민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대한 반색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리고 사실, 임금

자신도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생각이었고 희망사항이었다. 당장, 내명부(內命婦)의 수장이요, 자신의

지어미인 중전 김씨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 수도 없었고, 종친부 어른들의 의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중전 김씨의 입에서 먼저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생각하자는 말이 나오니 어찌 기뻐하는 기색이 나타나지 않으리요. 그리고, 안동

김씨의 귀하디 귀한 여식으로 자란 중전 김씨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자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기에 임금의 기쁨은 그만큼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이 중전 김씨의 성품을 곡해한 것이다. 중전 김씨는 세도가의 집안에서 자라면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는 했으나, 어린 나이에 그런 세도를 부리던 자신의

숙부와 백부, 종조부 등이 흥선대원군을 시해하는 불궤를 도모하면서 하루아침에

목이 잘리는 참변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자신의 아버지가 이런 집안의 불궤를

천군에 발고한 덕분에 살아남아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지만, 그러한

일대사건은 어린 김씨에게는 크나큰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중전 김씨가

이렇게 입헌군주제를 생각한 이면에는 장현덕의 훈육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현덕은 임금을 비롯한 중전 김씨와 귀인 이씨를 훈육하면서,

의도적으로 동서양의 정치제도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부각시키는 훈육을 실시하였다. 요는, 백성의 의식이 깨어나는 근대사회에서도

왕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영국

왕실의 교훈을 잊지 않아야, 왕정 혹은 왕실이 백성들의 의한 타도의 대상이 되지

않고, 백성들이 자랑스러워 여기고 사랑하는 왕실로서 후대까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전 김씨는 임금의 얼굴에서 반기는 듯한 기색이 엿보이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성정각의 어머님께서는 경평군 대감의 주청으로 조정이 또 한번 시끄러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셨사옵니다."

"그래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머님께서는 지금껏 평안했던 나라안이 이 일로 인하여 또

다시 시끄러워지고, 또 다시 피 바람이 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셨사옵니다.

부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기를 바란다는 말씀이셨사옵니다."

"... 음..."

임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역모를 도모하긴 했지만 자신의 피붙이들이

천군의 손에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한 어머니였다. 그러한 어머니였기에 김영훈이나,

그가 지휘하는 천군에게 말할 수 없는 증오와 복수의 심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평소 임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피를 보지 않고 원만하게 일이

풀리기를 기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 점은 임금이

자신의 어머니를 잘 모르고 있던 것이다. 아니, 여자라는 동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야할까? 사실, 부대부인 민씨는 을축년에 있었던 역모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직접 동생들을 사주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그 역모사건에 알게 모르게 관여가 되었기에 부대부인 민씨의 충격과 공포는

엄청났던 것이다. 자신의 둘째 아들이 임금이 된지 며칠만에 남편을 잃었고, 이제는

친정 집의 동생들까지 모조리 저승길로 가버린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나날이었다.

살아있으되, 사는 것이 아닌 나날이었다. 그때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것이

신앙이었다. 바로 천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심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신앙심의 힘으로 세상에 대한 관조와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냉철한

현실인식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조선의 백성들은 섭정공

김영훈과 천군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상환판단이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왕실에서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 위해서 두 며느리를 불렀던 것이다. 중전 김씨의 설명을

들으며 임금은 새삼스레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정이 샘솟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헌데,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정의 원로 대신들이나 종친부의

어른들이 납득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나라가 망하는 전조라고 입에 거품을 물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걸요. 그리고 당장, 며칠 뒤에 있을 중신회의에 과인이

참석해야하고, 과인이 참석한다면 경평군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그 문제가 나올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숙부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요."

임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중전 김씨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신첩이 생각해 둔 것이 있사옵니다."

"뭡니까? 그게?"

"며칠 뒤에 열리는 중신회의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옵니다."

중전 김씨는 차근차근 임금이 해야할 일과 어떻게 중신회의에서 그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금은 중전 김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끔씩 "옳거니!

그런 수가 있었구려!" 하면서 맞장구를 치면서 흡족한 웃음을 띄우는 것이, 자신이

언제 고민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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