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임금이 장현덕과 함께 영릉을 참배하고 있을 때 운현궁의 김영훈은 한상덕
대정원장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도 어느덧 나이를 먹었음인지, 혈기방장한 청년
시절의 모습 대신에 장년의 중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보기에도 시원한 모시적삼을
입은 김영훈과 한상덕은 얼음을 동동 띄운 시원한 수박 화채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덥고 습한 조선의 여름 날씨에 이런 낙이라도 없으면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운현궁에는 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에어콘이나 선풍기를 만들어서 들여놓아도 될
일이었지만, 임금이 계신 대궐에도 설치하지 않은 에어콘이나 선풍기를 운현궁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김영훈이 가지고 있는 기본 생각이었다. 시원한 화채를
꿀꺽꿀꺽 들이킨 김영훈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한상덕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전하께서 영릉에 납시었다고요?"
"그렇습니다. 합하. 장현덕 추밀원장과 몇몇 수행원들만 이끌고 영릉에 납시었다고
합니다."
"음... 장 원장에게서 무슨 보고 들어온 것은 없습니까?"
"무슨 보고 말입니까?"
"전하께서 영릉에 자주 납시는 이유에 대한 것 말입니다."
"별다른 보고는 없었습니다. 합하."
"... 음..."
한상덕에게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김영훈은 요즘 임금의 고민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한상덕은 김영훈의 표정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다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합하. 법무대신 이세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경평군(慶平君)요? 경평군이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합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법무대신 이세보가 전하의 친정을
거론하고 다닌다는 것을요."
경평군 이세보는 섭정공 김영훈이 이끄는 제 2기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임명된
종친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 하에서는 안동 김씨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 절해고도에
유배되기까지 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명망있고, 학식있는 목민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종친이자 선비이다. 또한 이세보는 조선조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시조작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조정에 출사하지 않다가, 김영훈의 간곡한 청으로
지난해 출범한 2기 내각에 합류하여 법무대신의 중책을 맡아보고 있는 인물이었다.
김영훈은 한상덕이 이세보의 얘기를 꺼내자 난감한 표정이었다.
"경평군의 말이 맞습니다. 맞아요. 이제 전하께서 장성하셨으니 의당 친정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지요."
"하오나, 합하. 만약 이세보의 주장대로 전하께서 친정을 하신다면 합하께서 2선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합하께서 물러나신 다면 자칫하면 우리 천군까지
2선으로 물러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우리 조선이 웅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는데 그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합하."
한상덕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무슨 큰 일이라도 난 양 입에 거품을 물면서
말했다. 한상덕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김영훈도 못내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제 전하께서 장성하신 마당에 내가 계속해서 섭정을 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나는 전하께서 친정하신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돌려주는 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합하!"
"깜짝이야. 나 귀 안 먹었어요. 흥분하지 마시고 조용조용 말씀하세요."
"제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합하의 2선 후퇴는 우리 천군은 물론이고,
우리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겨우 우리 조선과 우리 민족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물러나신다뇨. 절대 물러나시면 안됩니다. 합하."
"... 음..."
한상덕의 말이 맞았다. 이제야 조선을 위해, 조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물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한상덕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천오백 천군의 공통된 생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생각이 개인의
영달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 또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김영훈이었다. 그것은 김영훈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섭정공이라는
자리와 그 자리에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여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이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조선으로 온 것이고, 여태까지의 일들도 그런 맥락에서 추진하고 시행하였던 것이다.
"한 원장."
"예. 합하. 말씀하십시오."
"나라고 물러나고 싶겠습니까? 나라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자칫하면
먹구름이 드리울 수 있는 일임을 왜 모르겠습니까? 한 원장은 전하께서 왜 그리
영릉에 자주 가시는지 짚이는 게 없습니까?"
"......?"
"잘 생각해보세요. 여태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던 영릉에 왜 이리 자주 가시는지..."
"... 혹시...?"
한상덕은 김영훈이 운을 떼자 그때서야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상덕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그 문제로 고민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마도 그럴 겝니다. 이미 전하의 보령(寶齡)이 스물이 넘었고, 올해는 비록 후궁
소생이지만 원자 아기씨까지 보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우리가 처음 보았던 어린
명복이가 더 이상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이지만 전하께서도 경평군의 주장에
상당한 고민을 하고 계실 겝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참배라는 것을 핑계로 대고 밖으로 도시는 게지요."
"... 음... 그렇군요... 어쩐지..."
사실 김영훈도 임금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김영훈 자신도 법무대신 이세보의
주장에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세면서 고민했는지 모른다. 이미 장성하여 자식까지
두고 있는 임금을 대리하여 섭정한다는 것은, 굳이 이세보의 주장이 아니라도 명분이
약했다. 임금의 나이가 어리고 정치에 대해서, 국정의 운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처음
김영훈이 안동 김씨 일파의 불궤를 적발하고 처단하여, 섭정공의 자리에 올랐을 때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김영훈이 내린 결론은, 물러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물러나면 조선의 앞날이나,
그동안 자신과 천군이 추진해왔던 여러 가지 일들이 심각한 장애에 부딪칠 수도
있지만, 김영훈은 임금을 믿었다. 아니 우리 민족의 저력과 백성들의 힘을 믿었다.
결코 자신 한 사람이 물러난다고 해서, 힘차게 구르기 시작한 개혁의 수레바퀴가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과감하게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조선의 정치 형태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바뀌는
것이지만, 왕권 중심의 전제주의 방식의 정치 형태를 고수해오던 현실에서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나중에야 모르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지요."
"... 입헌군주제요?"
"그렇지요. 영국이나 다른 서양의 경우에서처럼 왕실이 존재하면서도,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입헌군주제가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바꾸어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조선의
현실을 놓고 봤을 때 입헌군주제외의 다른 대안은 없는데..."
"... 예..."
"그러나, 이 문제를 우리가 먼저 꺼내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자칫하면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회한 술수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아요..."
"예..."
김영훈의 말이 떨어지자 한상덕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언뜻 웃음이 걸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한상덕도 조선의 정치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했기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