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주의 북쪽에는 양근과 지평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이야 양근과 지평이 하나로
통합되어 양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양평이라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아예 없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양근과 지평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이면서 양평이 된 지는 1930년대의 일이다. 각설하고, 이 양근의
갈산 기슭에는 양근나루라는 나루가 있어, 남한강을 건너는 행인이나 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물류가 오고가기도 하는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데, 양근 사람들은 이 나루를 양근나루라는 이름보다는 칡미포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양근나루는 강원도 일대의 주산물인 옥수수, 메밀, 감자, 수수, 콩 등의
곡식들과 역시 강원도 특산인 나무그릇, 꿀 등이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수량도 적어졌고, 유속의 흐름도 느려졌으며,
각종 댐 공사로 인해 한강의 수로가 대부분 막힌 지경이었지만, 이때만 해도
조선에서 유통되는 물류의 대부분은 수로를 이용하고 있었고, 그것은 천군이
등장하여 전국에 신작로라는 이름의 도로망이 구성되어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쌈 200가마를 실은 세곡선이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가더라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의 시간이 걸리는 것에 불과할 만큼 양근나루에서
마포나루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했을
때의 경우였고, 하류의 마포나루에서 상류의 양근나루까지 물자를 실어 날랐을
경우에는 그 배에 이르는 사흘의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는
데 그 만큼의 시간이 더 소요된 것이다. 그 양근나루에서 출발한 임금 전용 증기
유람선은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420주기에 맞춰 왕실에 납품된 임금 전용 증기 유람선의 선실에는 임금과
장현덕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만약 이 증기 유람선이 없었다면 임금이 이렇게
수월하게 영릉에 참배하고 당일 서울로 돌아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을 일이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시원한 강바람이 들어오면서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전하."
"......"
장현덕은 임금이 선실 밖을 바라보며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약간 목소리를 크게 하여
불렀다.
"전하!"
"음... 예... 대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옵니까?"
장현덕은 심히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임금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무슨 고민을 하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기에 이렇게 돌려서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현덕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임금이 아니었다.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장현덕에게 훈육을 받고, 장현덕의
시중과 보호를 받으며 살았는데, 장현덕이 무슨 의도로 물었는지 모르겠는가. 그러나
임금은 장현덕에게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나 자신의 이러한 고민을 얘기할 수 없었다.
살을 맞대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중전 김씨를 비롯해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그만의 고민이었다.
"골똘히 하기는요. 그저 저 앞에 있는 산이 무슨 산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지금 전하께서 보시는 저 산은 일장산(日長山)이라고 하옵고, 남한산성
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옵니다."
"남한산성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임금은 장현덕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물었던 산이 남한산성의 일장산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가 동했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해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언제까지 근심 어린 낯빛으로 주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는 없었기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속담처럼 남한산성의 얘기가 나온 김에 장현덕에게서 남한산성에
대한 얘기나 듣기로 생각을 고쳐 먹은 것이다.
"남한산성이라 하면, 지금은 친위천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원래는 수어청의 병영이
있던 곳이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또한 인조대왕께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하기 전까지 항전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 아니오."
"맞사옵니다. 전하."
"남한산성... 남한산성이라..."
임금은 새삼 삼전도의 치욕이 떠오르자 울분이 일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남한산성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장현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에 대한 훈육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임금이 인조ㆍ효종ㆍ헌종ㆍ숙종ㆍ영조로 이어지는 조선 왕조의 계보에 있어서,
영조의 아들이자 비운의 왕세자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은신군은 임금에게
증조부가 된다-의 직계라는 점에서, 항상 그에 대한 언급과 평가에 있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어차피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장현덕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전하."
"말씀하세요."
"전하께옵서는 병자호란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옵니까?"
"병자호란의 원인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평소 전하께서 흉중(胸中)에 품고 계셨던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옵소서."
"흉중에 품고 있었던 병자호란에 대한 생각이라..."
"그러하옵니다. 전하."
임금은 장현덕의 거듭된 물음에 생각에 잠겼다. 장현덕이 무슨 연유로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이왕 내친걸음, 평소 가슴속에 품고 있던
병자호란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청 태종 황태극(皇太極 홍타시)이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정책과 청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응징하기 위하여 조선을 침략한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과인의
생각은 조금 다르오."
"다르다고 하오시면..."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조선의 그러한 정책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은 인조대왕 이전에 보위에 계셨던 광해군, 음.
.. 광해군의 외교정책과 인조대왕의 외교정책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소.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노선을 인조대왕께서 반정에 성공한 연후에 반청
적대노선으로 변경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오. 인조대왕의 그러한 반청 적대노선은 스스로 청의 침략을 불러일으킨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과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 오..."
장현덕은 말문이 막히고 있었다. 자신이 평소에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
인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임금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임금은 광해군을 거론할 때 말문을 더듬는 것이, 후손인 자신이
선조의 오욕에 가득한 군(君)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송구한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광해군이 비록 인조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는 하지만, 광해군은 불행했던
과거사의 한낱 희생양에 불과했습니다. 광해군에게 죄가 있다면 명에 사대하지 않고
청에 굴복하지 않는 노련한 외교정책과 붕당정치의 폐해를 혁파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이오. 무릇 한 나라의 외교라는 것은 주변
사세를 잘 판단하여 나라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무릇 붕당이라는 것은 나라와 백성의 삶을 좀먹는 좀 벌레와도 같은 것일
진데, 그것을 알고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광해군이 어찌 폭군(暴君)이요, 암군(
暗君)이 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과인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서인(
廢庶人)하고 서궁(경운궁)으로 내치는데 앞장섰다는 것도 믿지 않아요. 사실
광해군은 폐서인의 폐 자도 꺼내지 않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라는 상소를 올린 정조와 윤인 등에 대하여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시 우의정 한효순이라는 자가 작성한 서궁폄손절목(西宮貶損節目)이라는 것에
대한 것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 광해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인목대비를 광해군이 폐서인하여 서궁으로 내쳤느냐? 하는
것이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의 결과로 폐위되고 나서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배웠던 우리들로서는 광해군이 마치 크나큰 폭군이요, 암군인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상 광해군은 이경위와 정조, 윤인 등의
인목대비에 대한 폐서인 상소에 대해 당사자들을 벌하였고, 한효순이 작성한
서궁폄손절목에 대해서도 몇몇 조항을 문제삼아 거부했다고 한다. 한효순이 작성한
서궁폄손절목을 보면 대비라는 칭호대신 서궁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대비가 지닌
어보(御寶)를 반환케 하며, 대비에 대한 관원들의 문안, 숙배(肅拜 과거 합격자들이
대비에게 찾아가 인사하는 것) 등을 폐지하고, 대비의 거처에 군사를 보내 지키도록
하자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폐서인 문제는 북방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여진의 누르하치의 준동으로 인하여 자연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니,
정작 폐서인되지도 않은 인목대비를 폐서인했다는 광해군의 죄목은 실은 날조되고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현덕은 임금이 정확히 광해군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왜곡을 집어내자 감격했다.
자신이 직접 훈육한지 7년이나 되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도 광해군에 대한 언급이나 평가에 대해서 저어하고 있었는데, 임금의 입에서
이렇듯 민감한 광해군에 대한 왜곡과 편견을 거침없이 집어내자 장현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안녕이 외교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고려해야할 것이라고 과인은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겠지요. 그 점에
있어서 과인은 항상 숙부를 비롯한 그대들 천군에게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대들이
있기에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고, 우리 조선이 더 이상
외세의 힘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어요."
"전하... 황공하옵니다."
"정말입니다. 과인은 항상 숙부와 그대들 천군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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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입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분량이 조금 적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래도
6권이 시작된 후 각각 30kb, 26kb, 25kb의 분량으로 연재를 했으니 조금 이해해
주십시오. 평균 20kb의 연재분량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오늘 글 쓰느라
무지하게 힘들었습니다. 겨우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을 쓰기 위해 무려 다섯
시간을 투자했답니다. 자료 찾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진이 다 빠졌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대한제국기 광고 많이 해주세요.^0^ 그럼, 이만...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100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