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20화 (220/318)

9.

"그러니까 전차가 처음 서울에 등장했던 때가 지난해 1월 1일, 조선의

신년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노선이 많이 늘어나 검 선생의 부대가 있는 청파나루까지

전차가 다니고 있지만, 당시에는 하나의 노선밖에 없던 단선궤도였습니다. 그때 처음

등장한 전차는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밖의 청량리라는 곳에서 흥인지문을 거쳐

종로,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마포나루까지의 총 연장 15Km의 구간을 운행했지요.

저도 조정의 초청을 받아 전차 개통식에 참석을 했었는데, 정말이지 그렇게 많은

인파가 운집한 것을 보기는 내 생전에 처음이었답니다."

"그래요?"

"네. 정말 어마어마한 인파였습니다. 그때 내 안사람이랑 둘이서 참석했었는데 나나

안사람이나 구경꾼들 틈에서 길을 잃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운집한 사람들이

전차를 구경하러 온 것인지 나를 구경하러 온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나를 둘러보고

쳐다보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답니다."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오늘도 제가 전차를 타고 오는데도 전차 안의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쳐다보던지 민망해서 혼났습니다."

"하하하... 아무래도 저들과 다르게 생겼고, 아직까지 서양인을 볼 수 있는 곳이

제물포를 제외하면 쉽지 않으니까 그럴 겁니다. 아무튼 전차가 개통되던 날은

그야말로 대단한 축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흥인지문에서 돈의문을 거쳐

마포까지 이어지는 전선로(全線路)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국왕(國王)께서

승차하신 전차가 몇 번이나 멈춰야 했을 정도였답니다."

"네... 정말 장관이었겠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지요."

물어보는 검재선이나 그 물음에 답하는 노제로의 얼굴에는 아련히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재선은 당시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광경이 쉽게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개통식에 참석하고, 직접 전차에 승차하기까지 한

노제로의 얼굴에는 그때의 광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세계최초의 상용화된 전차가 등장한 것은 기사년(己巳年 1869년) 1월이었다. 무진년(

戊辰年 1868년) 8월에 전차의 도입에 대한 계획이 입안되고 바로 실측에 들어간

건교부와 신기도감 기기창에서는 흥인지문 밖에 발전소 부지를 선정하고 750kw 직류

600V 10대, 10000마력(馬力)의 증기발전시설의 건설을 병행하였으며 차량의 조립과

단선궤도 및 가선공사를 마쳐 기사년(1871년) 음력 1월 1일을 기해 성대한 전차

개통식을 가졌다. 40인승 전향식(轉向式) 개방차(開放車) 8대와 소년왕과 섭정공

김영훈 전용의 어용(御用) 귀빈차(貴賓車) 1대로서 개통식을 거행하던 날, 소년왕과

섭정공 김영훈을 비롯한 조정의 대소신료들과 독일의 사신 및 관원, 기타 민간유력자

다수를 초대하여 화려하게 장식된 8대의 전차에 분승시켜 동서를 흐르듯이 달리게

하자 마침 축제일이라서 설을 맞아 세배를 하러 나왔던 많은 백성들이 그 괴이함에

놀라고 미칠 듯이 즐겼으며 전선로가 사람들로 메워져 그 때문에 전차가 여러 번

멈춰야 했다. 그리고 전차의 선로가 서울 장안의 사대문 중 두 곳을 관통하는 바람에

이 전차의 개통과 동시에 조선왕조 국초(國初)이래로 종로의 종소리에 맞추어

성문들을 개폐하는 등의 제도가 자연히 폐지되어 버리게 되었다. 전차의 요금은

상ㆍ하등으로 나눠, 예컨대 종로∼흥인지문간은 상등이 3원 50전, 하등이 1원

5전이었다 상등칸이 3원 50전이라면 한 끼 밥값과도 맞먹는 금액이었지만 서울

장안의 백성들은 그런 거액의 요금을 아까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차는 특별히

정차장이라는 것은 없었으니,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승객이 요구하면 정거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차가 개통될 당시에는 난생 처음 보는 기물(奇物)인 전차를 한 번

타려는 승객들이 줄을 이어 한 번 얻어 타기가 매우 힘들었으며, 요행히 승차가 된

자는 요금이 아까워서인지, 아니면 전차라는 기물이 신기해서인지, 종일토록 하차를

하지 않고 타고 다닌 때문에 만원(滿員)이 계속되어 승차를 단념해야할 사람의 수가

많았다.

이렇게 최초로 등장한 전차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전차가 처음 등장했던 무진년(

1868년)에는 봄 가뭄이 극심했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청천(晴天)이 몇 날

며칠을 계속되자 어디서 누가 발설한 말인지는 모르나, 이렇게 날씨가 가문 것은

전차가 공중의 수기(水氣)를 모두 흡수해 버리는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일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아직 교통훈련이 전혀 되지 않았던 때라 회사측이 사고의 발생을

우려하고 있던 참에 개통 후 넉 달째 되는 4월에 마침내 일대 불상사가 일어났다.

흥인지문에서 돈의문 방면으로 달려가던 전차가 종로 포전병문(布廛屛門) 앞(현

종로2가)에 다다랐을 때 마침 궤도를 건너던 다섯 살 짜리 어린이를 역살(轢殺)한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광란을 일으킨 어린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는데 전차가 이를 피해서 질주를 계속하려고 한 때문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이 격노하여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하였다. 차장과 운전수는 재빨리

도주했으나 군중들은 정지된 전차에 큰 돌을 던지고 이를 파괴하고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또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한대도 전복시켜 불질러 놓고는 달아나

버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급히 경무청에서는 무장한 경무관을 파견하여

어린아이를 역살한 전차 운전수를 체포하여 민심을 달래는 한편, 전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른 주동자를 색출하여 엄벌에 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신문물 도입 후

최초인 동시에 최대의 불상사였기 때문에 조야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내무부에서는 그 날짜로 "전차 왕래 때문에 사람이 죽고 그 때문에 인민이 전차를

불태워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평상시에 경무관들이 단속치 못한 때문이라"고

하여 종로 경무서장을 경질 문책하였으며, 다음날 섭정공 김영훈도 명를 내려

내무부로 하여금 전일 전차 운행시에 발생한 사상자를 샅샅이 찾아 휼금(恤金)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였고, 상공부와 건교부에 명을 내려 전차 운전수와 승무원에

대한 안전교육을 철저히 시켜 다시는 이와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아울러 경무청에서는 전차의 궤도 주변의 교통상황을 점검하고 통제할

경무관을 교육ㆍ배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조선 최초의 교통 경무관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통 경찰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차가 이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선 사람의 일상에 파고들었던 것과는 달리

철도의 도입은 한결 수월한 편이었다. 이미 전차의 상용화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던

조정에서는 철도의 도입과 운용에 대한 보다 철저한 대책을 수립할 수 있었고,

전차가 개통되고 난 6개월 후에 도입된 철도는 비교적 순탄하게 조선 사람의 일상에

파고들 수 있었다.

노제로의 말을 다 들은 검재선은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선량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조선 사람들이 그런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문명의 이기라고 생각되던 전차로 인해 그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노제로도 검재선의 그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여하튼 조선이라는 나라는 정말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어떻게 전차와 같은 것을 만들어낼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 혹시 독일의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독일의 지원요?"

"그렇습니다. 저는 조선에 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조선과 독일과의 사이가 상당히

돈독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에서 다른 유럽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서 유독 독일에게만은 문호를 개방한 것이지요. 그리고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독일은 유럽에서도 선진 공업국에 속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전차도

철도도 독일의 지원이 있었기에 만들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독일이야 영국보다는 못하지만 프랑스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강국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군요. 아니 그럴 겁니다. 제가 이 나라에

왔을 때 만해도 유럽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 다음해부터 독일이 제물포에

공사관을 설립하였으니 조선과 독일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대단한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노제로가 조선에 살기 시작한2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사정이나 조선과 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들리는

풍문으로 조선과 독일이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정도였으니,

노제로와 검재선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크게 무리한 생각은 아니었다. 검재선은

노제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했다.

"그런데, 박사님은 조선에 사시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왜요? 제가 불편해 보입니까?"

"아니... 그것은 아니지만..."

검재선은 노제로의 되물음에 당황했다. 자신이야 앵글로 섹슨족이라면 이가 갈리는

형편이었으니, 앵글로 섹슨족이 판을 치는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고, 강제로 플라잉 클라우드호에서 선원생활을 시작했으니 전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제로는

달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노제로는 프랑스에서도 상당한 부유층 집안 출신이었고,

청국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전속 의사였을 정도로 사회적인 명성을 쌓아온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귀화하여 살게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노제로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조선에 건너오기 전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남자의 로망을 즐기던

인물이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조선군의 포로가 된 후에 조선의 뛰어난 의학에

매료되었고, 그때 만난 지금의 부인과 사랑에 빠져서 여기까지 온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노제로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이런 궁금증이 일어난 것이다.

"하하하... 사실 저는 검 선생이 알고 있는 것만큼 프랑스에 많은 재산을 축적해

놓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유한 집안 출신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과정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구요. 그러나 나의 가슴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

검재선은 노제로가 드디어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듯 하자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석 달이 넘게 노제로와 교류를 해왔고,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서양 출신 귀화인이다 보니 서로간의 동질감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막상 속 깊은 얘기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노제로가 자신의 얘기를 하니 어찌 속이 타지 않겠는가. 검재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노제로는 빙그레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지요. 다행히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산이 상당히 되었기에 별로 부족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노제로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상당하였기에 남부럽지 않게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노제로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어머니는 항상 부나방처럼 많은 남자의 품을 전전했었고, 그러다 보니 어린

노제로의 마음에 그것이 항상 한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을

하지도 못하고, 한 곳에 정착을 하지도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자신도 결혼을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그런 인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여 노제로 자신도 포기하고 남자의 로망을 쫓는 일에 몰두하였으나,

조선과의 전쟁에서 종군을 함으로써 그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때 만난

지금의 부인은 그에게 읽어버렸던 어머니의 정을 느끼게 해준 여자였다. 자신이

꿈에서도 그리던 정숙하고, 자상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조선의 이름 모를 간호사에게 천 눈에 반한 노제로는 결국 그 간호사와의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고, 이렇게 조선 사람으로 살면서 새로운 인생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감동적이네요... 정말 대단한 사랑을 하고 계시네요."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사실 이런 얘기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했었는데, 검

선생에게 하다니..."

노제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제는 의지할 곳 없는

사고무친의 조선 땅에서 이렇게 흉금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이

너무나도 좋은 노제로였다. 그런 노제로에게 검재선의 말이 다시 들렸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박사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답니다.

그리고 박사님과 이렇게 같은 땅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의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구요."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제 아내와 혼인한 것이 저의 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지금의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구요... 그리고 우리

검 선생께서도 어서 좋은 조선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헤헤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이 글의 저작권은 작가 yskevin에게 있으며, 아울러 글에서 오탈자 및 오류, 또는

의견, 건의를 보내실 분들은 리플이나 감상, 비평란 또는 작가의 개인 전자우편

[email protected]이나 [email protected]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택되신 의견이나 건의는 작가가 판단하여 글의 진행에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케빈입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챕터를 마무리했습니다.

참고로, 플라잉 클라우드호가 쥬신호를 해적질 할 때의 설정이 약간 변경되었습니다.

쥬신호는 나가사키로 귀환하다가 플라잉 클라우드호를 만난 것이 아니라 제물포로

돌아오다가 만났다고 설정을 변경했습니다. 그래서 검재선이 제물포로 후송될 수

있었죠, 착오없으시기 바라고요. 그리고 6권 출판본에는 플라잉 클라우드호와

쥬신호의 싸움이 맨 먼저 등장할지도 모릅니다. 그 장면을 이번 챕터에 포함시키게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알겠지요...

오늘 오전에 3권 증정 이벤트에 선정되신 분들께 3권을 보내드렸습니다. 아울러 모든

분들께 전화를 드렸는데, 몇몇 분은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3권 이벤트에 선정되신

분들의 명단입니다. 참고하십시오.^^ 윤관우님, 강동규님, 이종헌님, 정운두님,

정장훈님, 조영국님, 김민수님, 노태운님, 정학재님, 윤성조님, 정현섭님, 이주용님,

계연우님, 조규석님, 장판승님, 김태완님, 황진원님, 설진환님, 홍현태님, 윤정우님,

그리고 이번에 응모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__) 너무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하셔서 일일이 답 메일을 보내지 못하는 점 이해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P.S : 3권은 지난주 목요일부터 시중에 풀렸습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와 같은

일반 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 계신 분들은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그리고 예스24에는 아직 3권이 들어오지 않았구요.

알라딘에는 들어왔다고 합니다. 참고로 알라딘은 우송료가 무료라는...ㅋㅋㅋ

마지막으로 광고 좀 하겠습니다. 대한제국기를 읽는 모든 독자들께서는 주변

대여점에 대한제국기 들여놓으라는 압력을 팍팍 좀 넣어주십시오. 어차피 소장해서

보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여해서 보시는 분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래야

저도 먹고살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99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1

동쪽은 강원도 원주와 충청도 충주, 남서쪽은 이천, 서쪽은 광주, 북쪽은 양평과

접하는 경기도 여주는 조선 반도의 거의 정 중앙에 위치한 곳이다. 한강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한남정맥(漢南正脈)으로 이름지어진 산줄기의 한 자락을 부여잡은

여주는 한강 상류인 여강이 흐르고 있는 수려한 풍광과 산수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은 조선 최초의 본격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의 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서거정은 여주 인근 지역을

답사하면서 그 소회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강의 좌우로 넓게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여러 백 리 에 가득하니,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며, 나무하고 풀 베는 데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데 적당하면,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

이처럼 얕은 산과 드넓은 강, 시원한 강을 품에 안은 여주는 역대 조선의 여러

임금들의 능묘(陵墓)와 정침(正寢)이 자리를 잡은 좋은 지세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여주에 모셔진 여러 임금의 능묘 중에서도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현왕후

심씨의 능묘인 영릉(英陵)은 가히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부를 만 했다. 능묘를

개토할 때 표석이 출토되었는데, 그 표석에는 "마땅히 동방의 위대한 성인을 장사할

곳이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표석을 발견한 당시의 지관은 "

돌아오는 용(龍 산맥)이 자좌(子坐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 자방(子方)을 등진 좌향,

또는 그런 자리)이고, 서북방의 물이 정동방으로 흘러 들어오므로 여러 능묘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하였다던가. 아무튼 여주의 영릉은 이처럼 천하에 다시없을

명당으로 손색이 없었는데, 그 영릉에 일단의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일행은

삼십여명 정도로 단출하지 않으면서도, 질서가 정연하고, 질서가 정연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은 것이 예사로운 행차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전하. 이제 환궁하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알겠소. 내 조금만 더 있다 가리다."

"예. 전하."

이제는 장성하여 더 이상 소년왕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임금이, 추밀원장이자 자신의

신학문 스승이기도 한 장현덕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고 다시 시선을 영릉으로 향했다.

주변의 여러 채 건물들을 합친 능역이 무려 607,582평이나 되는 영릉은 조선왕조

최고 임금의 영해를 모신 곳답게 아담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임금은

자신의 조상이자, 선배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의 능묘를 바라보면서 남모른

한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할아버님. 소손(小孫)이옵니다. 소손 명복이가 왔사옵니다.'

올해 나이 스물의 장성한 임금은 주위의 수행원들이 알아차릴까 저어하는 마음에서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한 번도 본적 없는 조상에게

속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할아버님. 소손의 나이 올해로 스물이옵니다. 소손이 보위에 오른 지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안동 김씨 일파의 60년에 걸친 국정 농단으로 인한

폐해가 이제야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사옵니다. 모두가 할아버님을 비롯한 열성조의

보살핌 덕분이옵니다. 그러나 할아버님. 소손은 어찌하여야 좋겠습니까? 소손은

할아버님처럼 뛰어난 현군(賢君)도, 태종대왕 할아버님처럼 위대한 명군(名君)도

아니옵니다. 지금과 같은 치세가 가능했던 것은 소손의 의숙(義淑)과 의숙이 이끄는

천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옵니다. 할아버님. 지금 종친부 일각에서는 소손이

직접 친정을 해야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소손은 직접 친정하여

이 나라 조선을 이끌 자신도, 생각도 없사옵니다. 할아버님. 이 나라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끌고 나아갈 자신이 없사옵니다. 할아버님. 그리고 소손은 임금

노릇하기가 싫사옵니다. 할아버님. 어찌하여야 좋겠사옵니까? 할아버님.'

이렇게 임금은 속으로 이러한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임금의 말소리에

돌아오는 답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죽어서 땅에 묻힌 지 420년이 지난 지금

세종대왕의 대답을 듣고자 속으로 이런 말을 되뇐 임금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었기에, 여주 땅 영릉까지 와서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계해년(癸亥年 1863년) 섣달에 보위에 오르고 나서 바로 생부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것을 목도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연루된 인사들만 수 십 명이

아까운 생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은 하등 아쉬울 것이

없는 임금이었다. 자신의 생부를 죽인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낄 만큼 임금의

마음이 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었던가. 지난 을축년(乙丑年 1865년)

에는 백부인 흥인군 이최응과 외숙인 민승호 일당이 주도하여, 의숙인 김영훈과 그가

이끄는 천군을 몰아내려는 역모를 획책하다 역시 참살당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임금이다. 임금이 되기 전에는 비록

가난했지만 나름대로 단란하고 행복한 유년을 영위했던 임금이었다. 아버지 흥선은

궁도령이요, 팔난봉으로 불리었지만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버팀목이요,

기둥이었다. 그런 흥선이 죽었을 때부터 임금이라는 자리와 권력이라는 것에 커다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던 백부와 외숙이

또 다시 죽고 말았다. 비록 사사로운 정이 없는 일가였지만, 일가의 죽음은 임금의

마음을 다시 아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일은 임금이라는 자리와 권력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임금에게 더욱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다를 종친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임금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장성했다고 친정을 하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니, 어찌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태 임금자리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모든 정사를 김영훈이 돌보고

있었으니, 임금 노릇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비록

일부 종친의 의견이었지만, 그런 자리에 자신을 내던지도록 강요당하고 있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고민하지 않을 것인가. 정말이지 생부인 흥선이

요즘처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니, 대왕대비 조씨가 원망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임금에 앉혔으면, 생부와 형들이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백부와 외숙이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임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현덕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전하. 이제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알겠소. 그만 갑시다."

이미 장성하여 아들까지 두고 있는 임금은 장현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2월 17일

세종대왕의 420주기를 맞아 처음으로 영릉에 발걸음을 하였던 임금은 이따금씩

수행원 몇몇만 이끌고 영릉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도 바로 그러한

행차였다. 벌써 세 번이나 영릉을 방문하였으니,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의 행차라고 할 수 있었지만, 장현덕은 임금의 속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구중궁궐에서만 갇혀 지내다 보니 답답해서 그러는 것이려니 하고

있었다. 임금은 장현덕의 안내를 받으며 영릉 밖의 보련(寶輦)으로 걸음을 옮기다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오늘은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따라오지 않았소?"

"왜 아니 따라왔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창덕궁을 나서는 순간부터 따라왔사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영릉에 참배하는 모습을 사진기로 찍은 줄로 아옵니다."

"그래요...? 아무튼 부지런한 사람들이에요... 허허허..."

"그렇사옵니다. 전하."

한성순보는 후일의 제국신문의 전신으로 지난해 봄에 창간된 조선 최초의 신문이다.

문교부 산하의 박문국에서 발행하고 있는 한성순보는 열흘마다 한 번씩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는 순간(旬刊)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한성순보는 국한문혼용체로

발행되는 한성순보는 매호 24면의 분량으로 발행되고 있으며, 임금의 동정과 조정의

정책에 대한 것이 주요 기사거리였다. 일단 문교부 산하 박문국에서 발행되다보니

일종의 관보 형식을 피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신문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조선 사람들에게, 비록 관보이고 열흘에 한 번 발행되는 순보였지만 한성순보의

인기는 사뭇 대단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임금과 조정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는

전통이 전무하다시피 한 조선에서의 신문의 발행은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여러 가지 생활과 농사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 지식, 그리고

초보적이지만 광고까지 곁들여져 있었으니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서 가십시다. 이러다 밤에 항해를 해야할 것 같소."

"예. 전하."

"내가 괜히 늑장을 부린 것 같아 대감의 얼굴을 보기가 참으로 민망하구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영릉 밖으로 나온 임금과 장현덕을 비롯한 수행원들이 각각 보련과 말에 올라타자

이내 행차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임금을 태운 보련은 임금의 전용 유람선이 기다리고

있는 선착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비록 단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행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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