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실 박현명과 같이 보리 베기를 하던 일행은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조선 사람이 아닌
왜인이었다. 박현명의 본 이름은 킨메이(賢明), 성은 없고 이름만 있던 대부분의
왜국 사람 중 하나였다. 박현명은 본디 왜국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으로 왜국의
대표적인 천민인 히닌(非人) 계급의 천민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병인년(丙寅年
1866년) 벌어졌던 막부와 죠슈번과의 전쟁에서 죠슈군으로 종군하였다가, 왜국에
출병한 해병여단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일반 군사들 중 하나였다. 당시
해병여단에 사로잡힌 죠슈군의 1만 5천에 달하는 포로들 대부분이 군사들이
박현명처럼 성이 없고 이름만 있던 히닌 출신이었고, 히닌 출신들 중 상당수가
박현명처럼 조선으로 귀화하여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죠슈번 정벌이 끝나고 5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왜국의 사정은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막부에 의한 죠슈번의 완전 정벌과 소멸은 왜국의 300여 개에 이르는 번국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특히 사쓰마번 같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으며 막부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번국이 받았던 충격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 막부군이 쳐들어오기라도 할 듯이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막부에서는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할 힘이
없었다. 근 1년을 넘게 끈 죠슈번과의 전쟁으로 인해 막부의 재정은 바닥이 난
상태였고, 백성들의 원성도 끊이지 않고 분출하고 있는 상태에서 섣부른 군사행동은
막부 정권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막부가 장악한 죠슈번
지역의 치안도 막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죠슈번 지역은
뿌리깊은 반 막부 정서가 팽배한 지역이었고, 수 백년 동안 그 지역을 다스리던
모리가(毛利家)에 대한 향수는 쉽게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죠슈번
잔당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킬지 몰랐다. 하여, 막부에서는 죠슈번이 사라진 마당에
조선으로 다시 복귀하려는 해병여단의 시모노세키 주둔을 강청(强請)하였고, 결국
1개 연대 병력이 시모노세키에 주둔하여 막부를 후원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렇게 시모노세키에 주둔한 조선군 해병여단 1개 연대는 일단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상당한 죠슈군 군사들에 대한 치료에 전력을 다했다. 아울러 일반
왜인들에게까지 그 치료의 범위를 확대하여 각종 질병에 신음하던 왜인들에게 조선의
선진 의료 혜택을 베풀게 되었고, 포로로 잡힌 왜인들 중 상당수가 막부의 지배를
받는 고향을 등지고 이렇게 조선으로 이민을 오고, 조선으로 귀화하여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처음 막부에서는 포로로 잡힌 죠슈군 군사들의 조선 이민과
귀화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결과로 죽거나 상한
조선군의 숫자가 5백을 헤아리는 시점에서, 조선이 이들에 대한 보상과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포로로 잡힌 죠슈군 군사들에 대한 이민과 귀화, 그리고 조선
송환이라는 문제에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민과 귀화에 대한 새로운
협정을 조선과 체결하여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왜인들의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의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었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선으로 이민을 오고
귀화한 포로들은 모두 5천이 넘었고, 그 가족들까지 합하면 2만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였다. 당시 왜국의 대부분 평민들이나 천민들이 일부 귀족과 무사 계급에 의해
억압받고 핍박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을 비추어보면 새로운 기회의 땅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는 선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기를 끌었고, 너도나도 이민과
귀화의 대열에 합류한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열풍은 지금까지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고, 왜인들의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막부에서 왜인들의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를 딱히 막지 않았던 이유는 대부분의
이민, 귀화 왜인들이 죠슈번 지역과 다른 지역 출신의 천민이었기도 하였지만 왜국의
사정상 그런 소소한 문제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있었던 막부의 2차 죠슈번 정벌은 결국 막부의 승리와
죠슈번의 해체, 그리고 막부 직할령으로의 편입이라는 일대 회오리를 몰고 왔다.
그리고 막부는 여세를 몰아 정국 운용의 주도권을 잡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정묘년(丁卯年 1867년) 벽두부터 왜국 각지에서는 민중봉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막부 정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신슈(信州)의 농민들이 1월에 봉기를
일으켰고, 그 봉기의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2월에는 오사카 와타나베촌(渡邊村)
의 천민들이 들고일어났고, 6월에는 나가사키 행정청의 행정관이 이유 없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가하여 왜인 천주교도 68명을 체포 구금하기에 이르렀다. 나가사키
행정관의 천주교 탄압은 정국을 순식간에 경색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8월이
되자 이번에는 이전의 소규모, 일시적, 한 지역에 국한된 민중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광란(狂亂)의 소용돌이가 왜국 전국을 강타했다. 바로 "에에쟈나이카!(
ええじゃないか!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이었다. 이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이전의 민중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민중의 움직임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라는 말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왜국 민중들은 가히 난동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며 소리소리
질렀고, 부잣집으로 떼지어 들이 닥쳤다. 그러면 부잣집의 주인은 그들의 서슬과
분위기에 눌려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하고 음식과 각종 술을 푸짐하게 차려 그들을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저들이 왜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이렇듯 소란과 행패를 부리는 지도 모르고 주인은 그저 그들의 비유를
맞추며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열병처럼
왜국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어느 누구도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그것들을 따라 외치며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말 그대로 광란의
도가니였고, 치안부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막부의 악명 높은 경찰 조직인 신선조(
新選組)도 그런 움직임에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이러한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근 2년을 열병처럼 왜국을 달구고 나서야
수그러들 수 있었고, 그동안 막부에서는 그 난동의 주모자를 색출하고 뿌리를
뽑으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식을 줄
모르는 불꽃처럼 왜국을 달구더니, 언제 그런 난동이 있었느냐는 듯이 순식간에
종적이 묘연해져 버렸다.
사실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원래의 역사에서 이와쿠라 토모미를
비롯한 토막파(討幕派)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해 벌어진 난동이었다. 왕정복고(
王政復古)를 위한 대정봉환(大政奉還) 정책의 움직임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벌어졌던
난동이 바로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이었으나, 이와쿠라가 천군의
박지현의 손에 의해 암살되고, 역사의 물줄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상태에서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가 없는 난동이었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조선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일어난 난동이었다. 왜국과 막부의
움직임에 견제를 할 목적으로 나가사키의 조선공사관 소속 대정원 요원들의 손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실행되기에 이른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에야!" 난동은
바람처럼 움직이는 대정원 요원들의 주도면밀한 실행으로 왜국의 일반 민중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난동을 부리는 줄도 모른 채 휩쓸렸으며, 그렇게
일어난 난동은 왜국의 정국을 순식간에 마비 상태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일부 죠슈번
출신 농민과 천민들의 조선 이민과 귀화라는 소소한 문제까지 막부에서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방치하는 상태가 돼 버린 것이 죠슈번 지역 출신 농민들과 천민들의
대규모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렇게 귀화한 왜인들은 조선에 도착한 즉시 새로운 성씨와 이름을 부여받았고,
일부는 농촌으로, 일부는 광산으로, 일부는 도로망 건설 사업장으로, 일부는 각종
공장으로 배치되어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으로 유입된
왜인들은 당장 국책사업의 시행과 확장된 영토의 관리에 있어서 커다란 인력난을
겪고 있던 조정의 위정자들에게 한숨 돌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새롭게
조선으로 편입된 영토로 알래스카와 북해도(北海島), 대마도(對馬島)가 있었는데
대마도가 경상도에 편입되어 하나의 군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은 것과는 반대로
알래스카와 북해도는 아직까지 조선 팔도(八道)의 어느 곳에도 편입되지 않은 상태로
일종의 중앙 직할지와 같은 형태로 다스려지고 있었다. 물론 대마도도 경상도에
편입되기는 하였지만 정식 지방관이 다스리는 곳이 아닌 군정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
점에서 다른 두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반적인 조선 팔도의 군과 현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것에 반해 세 군데의 신(新) 영토는 군대가
모든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한 형태의 군정(軍政)이 실시되고 있었다. 세 군데 모두
지정학적 위치가 다른 외국과의 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예전 알래스카라고 불리던 땅은 새롭게 북양도(北洋道)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정식으로 조선의 영토로 선포되었으며, 조정에서는 북양도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개발을 위해서 1개 연대 병력을 상주시키면서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있었고,
매년 소규모의 인원이지만 꾸준히 이주민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북해도(北海島)도
마찬가지였다. 북해도는 원래의 이름인 북해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북양도와
마찬가지로 본토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고, 그래서 효율적인 관리와 개발, 경비를
위해서 역시 1개 연대의 군대가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북양도와
북해도는 앞으로 조선의 영토와 인구가 늘어나면 정식으로 독립된 도(道)의 하나로
선포되어 도백(道伯)이 관장하는 형식의 행정구역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
틀림없었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정식 도로
승격하기 위해서는 북양도와 북해도가 보유한 인구수가 너무 미약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북양도와 북해도는 땅의 넓이만으로 따지자면 조선의 어느 도와 비교할
수 없이 광대하였지만 그 안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백성들의 수는 너무도 미미했다.
북해도가 원주민인 아이누족 10만와 조선에서 이주한 백성들을 포함하여 18만에
이르는 인구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북양도는 원주민인 이누이트족과 여러 인디언
부족들, 거기에 조선에서 유입된 백성들을 포함한다 하여도 겨우 10만이 될까 말까한
상태에서 도로 승격하기에는 아직까지 여러모로 부족한 감이 많았다. 이렇게
조선에서 북양도와 북해도로 유입된 백성들은 순수한 조선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한꺼번에 대규모의 인구가 빠져나가서 그에 따른 인력
수급의 문제라는 부작용이 도출되기에 이르렀고, 그런 부작용을 최소화한 이들이
바로 왜국에서 조선으로 이민 온 귀화 왜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순식간에 메울 수 있었는데, 주로 전국에 산재한 광산과 여러 공장, 그리고
도로망 건설 사업과 농사일에 투입되었다. 광산이나 도로망 건설 사업 같은 것이야
몸으로 때우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었고, 원래부터 왜국의 유명한 곡창지대인
죠슈번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귀화 왜인들에게 농사일을 하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공장에서의 일이 이들에게 상당한 애로로
작용하였지만 그러한 애로는 일반 조선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것이었기에 충분히
감당하고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들의 조선 정착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조선
백성들이 왜놈들, 또는 왜구(倭寇)들로 불리던 왜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과거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기억을 가슴속에 담고 있던 일반
백성들은 대놓고 이들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대대로 조선 사람들의
핏줄에 뿌리깊이 박혀 있던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민족성이 다시 한 번 유감 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사람들의 움직임은 조선 사람들의 핏줄에
뿌리깊이 각인되어 있던 배타적인 민족성이라기 보다는 당시 세계 모든 사회, 집단,
국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방인에 대한 편견의 분출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일이었다. 이민자에 대한 선주민의 뿌리깊은 차별의식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고, 그것은 조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박현명과 같이 일반 조선
사회에 잘 적응하여 동화한 경우는 무척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이민, 귀화 왜인들은 아직도 조선 사회 변두리에서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선주민이 주류(主流)로서
살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이민자나 귀화인이 그들 주류 사회에 파고들어 정착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왜국에서의 짐승 같은 삶보다는
차별 받는 삶이기는 했지만, 나름의 기회와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엿보이는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는 끊이지 않는 실정이었다.
섭정공 김영훈과 조정의 원로 대신들도 이러한 조선 사람들의 특징과 이민자나
귀화인의 어렵고 고단한 삶을 어느 정도는 헤아리고 있었다. 특히 섭정공 김영훈은
현대 한국에서부터 이러한 이방인에 배타적인 한국인의 민족성과 폐단에 커다란
회의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영훈은 조선 사람들의 민족성이 반드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차별의 감정들은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일 뿐 조선 사람의 가슴속에는 따뜻한 인간애(人間愛)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사람들의 차별과 이유 없는 질시와 분노가
장기화될 때에는, 현대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앞으로 조선이 국제 사회에서 웅비할 때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영훈은, 관에서 주도하는 여러 가지
계몽정책을 꾸준히 전개하기에 이르렀고, 일반 백성들에게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세뇌시키는 초 강경책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는 동학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도 한 몫 단단히 작용하였다. 정묘년(1867년)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한
외국인의 조선 귀화에 대한 김영훈과 조정의 입장은 사실 간단했다. 조선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조선 이름을 사용하며, 조선말인 한글을 읽고 쓰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조선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 바로
김영훈의 생각이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몇 가지의 특수한 의무만 수행한다면 대대로
조선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조선 백성들과 같은 대우를 정책적으로 펼칠
생각이었다. 이것은 비단 왜인 출신 이민자나 귀화인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쥬신상사의 토마스 글로버와 같은 서양 출신의 귀화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청국 출신의 이민자와 귀화인에 대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그럼 왜 이렇게 왜인들의 조선으로의 이민과 귀화의 열풍은 조선 사람들의 차별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왜국의 사정이나 왜인들의 나라에 대한 의식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왜국은 정식으로 나라와 정부가 있었고,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였지만, 정작
왜국에 살고 있는 왜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자각의식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위정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고관대작들도 내 나라 내 백성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나
의식이 전혀 없었고, 일반 왜인들의 나라와 정부를 생각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3백여 개 번국으로 갈라져 있는 당시 왜국의 사정상 나라와 정부, 백성이라는
생각보다는 번국과 번국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고, 내 나라, 내
백성이라는 의식 자체는 아예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기에 나라를 버리기도 쉬웠고,
그런 왜인들의 움직임에 특별히 과민하게 반응하여 대응하는 일도 없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왜인들이 자신들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는, 역사적으로도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근대 사회의 성립이 있고 나서의
일이니, 명치유신이 아예 발생하지도 않고 전근대적인 막부의 통치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실정에서는, 그런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