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키쿠가와초(菊川町)에 본진을 세운 죠슈군에서는 지금 한창 작전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죠슈군도 멍청이는 아니었는지 조선군의 군세가 작기는 하지만 상당히
정예한 군사들로 이루어졌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고,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시모노세키 탈환 작전에 대한 세부적인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죠슈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군감(軍監) 야마가타(山形恭介) 교스케를 비롯한 다카스기 신사쿠(
高杉普作), 후쿠다 교헤이, 미요시 군다로, 도키야마 나오도, 야마다 호스케, 등 군
수뇌부와 중신들이 모두 자리를 하고 있었고, 소장파 장수들 중에서 이토 쓘스케와
이노우에 몬다의 얼굴도 보였다.
"익일(翌日) 여명을 기해 우리 군은 조선군에게 빼앗긴 시모노세키를 되찾는다."
군감 야마가다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좌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총대장을 맡았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환생한 듯
위엄이 넘치고 있었다. 이미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세워진 듯 야마가다의 말은
도도하게 이어졌다.
"교헤이!"
"예, 군감."
"그대는 선봉이 되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군의 방어를 깨트린다!"
"알겠습니다. 군감."
"군다로!"
"예, 군감."
"그대는 중군이 되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교헤이의 뒤를 따라 조선군을 깨트리고
시모노세키까지 진격한다. 나는 주장(主將)으로서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그대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예, 군감."
"나오도!"
"예, 군감."
"그대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전부강 계곡으로 향해라 그리고, 산을 넘어
시모노세키로 들이쳐라."
"예, 군감."
"그리고 다카스기 군(君)."
"예, 군감."
"그대의 기병대(奇兵隊)가 가장 어려운 지역을 담당해 줘야하겠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기병대는 우리 군의 기병대(騎兵隊)와 힘을 합쳐 코야가와강을 따라
오주키초(小月町)까지 진격하여 조선군과 막부 해군을 교란시켜줘야겠다."
"알겠습니다. 군감."
다카스기는 야마가다의 명령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더 이상의 삶에 미련도
없었다. 죽기 전에 죠슈번의 옛 영광을 다시금 되찾고 존왕양이의 기치가 사라지지
않도록 한줌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지금 다카스기는
결핵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고, 결핵이 깊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하여,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장렬하고, 통쾌하게 싸우고 싶었다. 그런 기회를
자신에게 준 야마가다가 오히려 고마운 다카스기였다. 사실 타카스기와 그가 이끄는
기병대가 맡은 지역이 가장 위험했다. 코야가와강을 따라 내려가면 오주키초가
나오고 오주키초는 바다에 면한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막부 해군의 함선이
초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했기에 다카스기로서는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카스기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죠슈번의 향사(鄕士) 요시다 쇼잉(吉田松陰)
의 제자로 죽은 가쓰라 고고로와 함께 요시다 쇼잉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젊은
지사이다. 죠슈번의 하급무사 출신인 다카스기는 요시다 쇼잉의 가르침을 받아
존왕양이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양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해외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1862년 청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당시 열강의 침입에 신음하던
청국의 상황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그 이듬해인 1863년에는 죠슈번으로 귀환하여
문벌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군제를 생각하여 도입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다카스기의 기병대(奇兵隊)였다. 다카스기의 기병대는 하층민과 농민 출신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쟁의 중추는 무사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왜국의 분위기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던 신선한 발상이었다. 다카스기의 기병대는 이번 전쟁 기간
내내 막부군을 괴롭히는 신출귀몰한 행동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카스기의 기병대는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하층민과 농민들로 구성되어있었고,
다카스기는 그런 하층민들과 농민들의 비애와 포한(抱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줄 알았고, 그들의 힘을 결집하여 표출시킬 줄 알았다.
"오늘밤은 모든 군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고, 밥을 배불리 먹여
내일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군감."
"알겠습니다. 군감."
죠슈군이 세운 작전은 사실 간단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이고 있었다. 키쿠가와초에서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길은 세 군데가 있다. 첫
번째 길은 교헤이와 군다로, 그리고 야마가다의 주력이 진격로로 삼은 구야강(久野江)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구야강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은 좁은
협곡이었지만 주변의 산들이 낮지 않았다. 그리고 시모노세키 북쪽 외곽으로 바로
통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아마도 조선군도 죠슈군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그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죠슈군에서는 그런 조선군의 방어선 쯤은
간단하게 무너뜨릴 자신이 있었다. 비록 전장식 대포지만 50문 가까운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조선군의 방어선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취합한 조선군의 정보를 보면, 조선군은 화기가 강력할지 몰랐지만 무엇보다 병력이
적었다. 1만 명이 채 안 되는 적은 병력으로 죠슈군을 막을 수는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키쿠가와 초에서 시모노세키로 이르는 길이 한 군데가 아닌
세 군데인 이상 병력의 집중운용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분산운용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야강 상류에 방어선을 세운다손 치더라도 그 숫자는 기껏
2천에서 3천 정도의 병력으로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에 비해
자신들의 주력은 4만이 넘는 대군을 구야강 진격로로 몰아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구야강의 조선군 방어선을 깨트리고 나면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구야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야트막한 산들이 올망졸망 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100m
정도에 불과한 높이였기에 그 산들을 뚫고 시모노세키 북쪽 외곽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시모노세키 인근의 산들이 일반적으로 울창한 삼림을
자랑하는 것에 비해, 구야강 상류의 산들은 나무는 별로 없고 완만한 구릉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말 그대로 목초지와 다를 바 없는 곳이었기에, 조선군의
방어선만 깨트릴 수 있다면 시모노세키를 탈환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오도가 이끄는 5천의 별동대(別動隊)는 전부강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산을 넘어 시모노세키로 그대로 들이칠 생각이었다. 전부강이 발원하는 산들을 넘을
수 있다면 바로 시모노세키였다. 그러나 그곳은 대군을 몰아넣어 진격하기에는
주변의 산들이 제법 험준했고, 높았다. 보통 500m가 넘는 산들이 전부강 계곡을
감싸고 있었고, 시모노세키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형이
험준할뿐더러 삼림이 울창하고 큰 길이 없었다. 기껏 짐승들이나 사냥꾼들 아니면,
약초꾼들이나 다녔음직한 소로가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천연의 방벽과도 같은
산들이었다. 그래서 나오도가 이끄는 5천의 별동대가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구야강
계곡으로 진격하는 죠슈군이 주공(主攻)이라면 전부강 계곡으로 진격하는 별동대는
조공(助攻)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카스기의 기병대(奇兵隊)와 새롭게 다카스기가 지휘하게 될 1천의
기병대(騎兵隊)는 일종의 희생양이었다. 다카스기의 군사들은 키쿠가와초에서
코야가와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즈키초가 나온다. 바다에 면한 오즈키초를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시모노세키까지 닿을 수 있었다. 허나, 다카스기의
진격로는 막부 해군의 직접 포격을 받을 수 있는 크나큰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다카스기를 비롯한 죠슈군 수뇌부에서 원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조선군과 막부
해군의 주의를 분산시켜 막부 해군이 시모노세키로 진격하는 죠슈군에게 포격하지
못하도록 몸으로 때우는 임무가 다카스기의 기병대(奇兵隊)와 기병대(騎兵隊)가 할
일이었다. 어이없을 정도의 기상천외한 용병(用兵) 아니, 기병(奇兵)이었으나 그
일이 성공할 경우 막부 해군의 시모노세키에 진격하는 죠슈군 주력에 대한 직접
포격은 상당히 감소할 것으로 죠슈군 수뇌부는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