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김영훈 일행은 최규철의 안내를 받으며 남양조선소 내의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식당
안은 수 많은 근로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남양조선소의 식당은 현대 한국의
여느 구내식당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한꺼번에 열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탁자가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한 쪽에는 주방으로 보이는 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길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여러 가지 나무그릇이
놓여져 있는 네모난 양은 쟁반을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들고서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있었다. 아직까지 프레스로 찍어낸 식판의 보급이 안되었는지 식판을 대신해서
양은 쟁반과 나무그릇이 쓰이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면 이채로운 풍경이었다.
"자! 우리도 배식을 받으십시다."
"예. 합하."
김영훈과 한상덕, 김종완, 최규철 등은 현대 한국에서 도래하였기에 일반
근로자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똑같이 밥을 받아먹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 출신의 김병국도 김영훈의 이러한 행동을 익히 보아왔기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배식줄 맨 끝에 자리를 잡았다.
김영훈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자
놀란 사람들은 오히려 근로자들이었다. 곧이어 여기저기에서 근로자들이 허리를
굽히며 "섭정공 합하를 뵈옵니다"를 연발하는데 김영훈은 그런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계속 식사를 할 것을 당부했다. 이런 와중에 어느새 줄은 대폭
줄어들어 김영훈의 차례가 되었다.
배식을 받기 위해 양은 쟁반과 나무그릇을 집어들었는데 빨간 옻칠이 칠해진
나무그릇은 자세히 보니 발우(鉢盂)였다.
"아니! 이것은 발우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합하."
남양조선소 식당에서 사용하는 나무그릇은 사찰에서 스님네들이 사용하는 발우가
틀림없었다. 네 개의 나무그릇이 차곡차곡 포개져 한 벌이 되는 발우는 상당한
기간을 사용했는지 약간씩 칠이 벗겨진 모습이었다.
"이곳 식당에서 발우를 사용하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스테인레스가 아직
계발이 안되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합하. 스테인레스의 경우에는 철과 크롬의 합금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의 개발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원래 이런
대규모의 구내 식당의 경우에는 스테인레스로 제조한 식판을 만들어서 사용해야 편할
일이었으나, 아직까지 이런 곳에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우리 조선의 철 생산량이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하였던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곳까지 그 사용
범위를 넓히기에는 그 효용성에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그래서 처음에는
유기그릇을 사용할 것을 생각했었는데 유기는 합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너무 무겁고
생산 가격도 만만치 않은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원래 스테인레스의 개발은 20세기 초에 이루어진다. 이 스테인레스의 제일 큰 특징은
철에 비해 가볍고 부식에 강하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주방기구는
거의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게 많다. 사실 지금 조선의 기술로 이런 스테인레스의
개발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규모 제철소가 건설되지
않았던 관계로 그 효용성은 인정하지만 개발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뿐이다. 그리고
설사 스테인레스를 개발했다고 이런 구내식당에까지 사용하도록 그렇게 철의 생산이
많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다가 찾아낸 것이 바로 발우였습니다. 발우는 합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절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그릇입니다. 이 발우는 네 개의 크고 작은 그릇을 포개서 한 벌로
사용하는데 그 투박한 모양새에 비해 쓰임새가 아주 유용합니다.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환경 친화적이고, 또한 서로 포갤 수 있기 때문에 보관에도 편리하고, 아주
가볍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저도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김영훈이 비록 무늬만 불교 신자라고 해도 발우의 쓰임새나 장점, 그 기원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작 김영훈이 궁금한 것은 이 발우를 사용하도록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헌데, 이 발우를 사용하도록 건의한 사람은 누굽니까?"
"예... 이 발우를 사용하자고 최초로 건의한 사람은 우리 조선소의 한
근로자였습니다. 일반 선박 건조 공정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입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그래요. 사실은 이 아이디어가 아주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대감께서도
아시겠지만 발우라는 것은 보관도 쉽고 쓰임새도 아주 많지 않습니까? 더구나
딱딱하고 차가운 프레스 식판에 음식을 담는 것보다 훨씬 정감이 있어서 음식 맛이
더 좋을 것 같구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합하. 그리고 이 나무 발우는 이곳 식당뿐만 아니라 대규모로 음식을
다루는 여러 곳에서도 이미 사용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군에서도
이 나무 발우를 사용하고 있구요."
"그렇군요...? 헌데 이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그 근로자가 낼 수 있었습니까? 일반
근로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라도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합하. 우리 남양조선소에서는 우리 조선의 일반 근로자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각 작업장마다 건의함을 설치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근로자들의 건의나 의견을 수렴하고 있지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헌데 우리 근로자들이 거기에 쉽게 적응을 하던가요?"
"웬걸요. 처음에는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별다른 건의도 없고 했는데 건의가
채택되고 포상까지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상신할 정도가 되었답니다."
"그렇군요.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합하."
김영훈은 최규철의 말에 새삼 놀랐다. 김영훈은 일반 조선의 학자나 기술자,
백성들은 천군의 기술이나 과학을 받기만 했지 스스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의견이나
생각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천군의 기술이 워낙 뛰어난 것이 그
원인이겠지만 아직까지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개발이나 발명을 하기에는 조선 사회나
일반 백성들의 삶이 폐쇄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이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원래 조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우수하고 창의적인 머리를 끌어내어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구내식당을 와보고는 그런
생각이 상당히 바뀌게 되었다. 비록 하찮은 그릇을 이용하는 아이디어에 불과했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조선 백성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이끌어낸다면 조선의
미래는 한층 더 밝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다. 자신들이 비록 미래에서
왔지만 미래의 모든 기술이나 지식이 지금 현재에도 월등하고 우수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김영훈이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나 지식들도 얼마든지 훌륭한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새삼 드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천군은 미래 기술의 우수성만 집착한 나머지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현명한 생활습관을 너무도 우습게 보지 않았나 하는 자성의 마음이 들기도
하는 김영훈이었다. 그리고 일반 근로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한
남양조선소의 노력에도 감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생각이었지만 19세기인 지금은 하나의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훈은 나아가서 일반 관청이나 공장, 군 등등 사회 곳곳에 이런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영훈이 잠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런
상념을 깨게 만들었다.
"합하. 어서 배식을 받으시지요. 모두들 기다리고 있답니다."
"예? 아... 예."
오늘 점심은 보리가 드문드문 섞인 밥과 두부국, 김치와 닭고기 탕수육, 그리고
콩나물 무침과 어묵 볶음이었다. 김영훈은 배식을 받은 뒤 다른 일행과 함께 한
탁자로 걸음을 옮겼다. 그 탁자에는 이미 예닐곱 명의 근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계속 식사들 하세요. 이러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불편합니다."
근로자들이 김영훈과 김병국이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하자
김영훈이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일반 근로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이렇게 식당을 찾은 것인데 이렇게 근로자들이 어려워하자 오히려 불편한 것은
김영훈이었다.
자리에 앉은 김영훈과 김병국은 양은 쟁반에 담아온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식당
음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음식은 맛이 좋았다.
"원래 이렇게 음식이 맛있습니까? 아니면 오늘만 특별히 맛이 좋은가요?"
딱히 누구에게 건넨 말이 아닌 아무에게나 대답을 원하는 물음이었다. 같은 탁자에
앉은 근로자들은 섭정공 합하를 비롯한 높은 양반들과 이렇게 한자리에서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지경인데 섭정공 합하께서 질문을 하자 더욱 황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섭정공 합하의 물음에 대답을 해야하는 법. 김영훈의
바로 앞에 앉아서 밥을 먹던 이가 대답을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서 음식 맛이 좋은 게 아니구만요."
"그럼, 원래 이렇게 음식이 잘 나오고 맛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요. 합하. 여기 식당은 일반 주막이나 식당보다도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구만요."
"예... 헌데 보리가 이렇게 조금씩 섞인 것에 대해 불만은 없습니까?"
누가 질문하는데 감히 함부로 대답을 할 것인가. 불만이 있어도 그런 불만을 쉽사리
내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보리가 드문드문 섞인 밥일지언정 과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는 어딜 가나
있는 법이다. 김병국의 곁에서 얌전히 밥을 먹던 중년의 근로자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말씀드려도 괜찮을란지 모르겄는디유..."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합하께옵서는 보리가 섞인 밥을 드셔보셨을랑가 모르겄지만서도 이 보리밥이라는
것이 여러 모로 사람 몸에 이로운 음식이고만유. 전 같으면 이렇게 좋은 밥을
구경하기도 힘들었고만요. 보리가 섞였다고는 하지만 이만하면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밥이고, 또한 반찬도 이렇게 푸짐헌디 무슨 불만이 있겄어유. 글허고 일하는
중간 중간에 새꺼리라고 나오는 것도 아주 달고 맛있구만유."
"새꺼리요? 아! 새참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라지유."
충청도 출신인 모양인지 사투리가 구수했다. 그 사내의 말을 들으며 김영훈이 수저를
다시 뜨면서 다른 근로자들의 그릇을 보는데 일반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실을 한 가지 발견했다.
"이 정도만 드시고서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의 일반 백성들은 밥을
많이 먹는 걸로 들었습니다만...?"
"아! 예... 사실이구먼유. 원래 우리 같은 가난뱅이 백성들은 언제 배를 곯아야 될지
모르니께 있을 때 많이 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유. 그리고 밥을 먹더라도
반찬거리가 벨로 없으니께 밥만이라도 몽창 먹어야 배가 든든허고 그랬구만유. 헌디
합하를 비롯한 천군 나으리들이 도래허고 나서는 살기가 편해지믄서 배곯을 걱정이
없어지고, 살기가 낳아진께 자연히 반찬도 여러 가지가 올라왔구만유."
"그럼, 댁에서도 여러 가지 반찬을 즐기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유. 비록 푸짐허게는 못 먹어도 구색을 갖추면서 먹고 있구만유. 그러다 봉께
자연히 반찬도 많이 먹게 되고 그럼서나 밥만 몽창 먹어대는 습관도 쪼꼼씩 고쳐지기
시작허등만 이제는 이 정도만 먹어도 충분히 배가 차는구만유."
사내의 말처럼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은 대식(大食)이요, 폭식(暴食)이었다. 워낙
먹고살기가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 그러했다.
먹을 것이 있을 때는 한꺼번에 왕창 먹고, 없을 때는 쫄쫄 굶어야 했던 것이
일반적인 조선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그리고 워낙 어렵고 힘들게 살다보니 별다른
반찬도 없이 그냥 맨밥에 김치 하나만 가지고도 한 끼를 해결해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던 것이 천군이 도래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일반 백성들의
삶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향상되었고, 그렇게 향상된 삶의 질은 당장 식생활의
변화를 몰고 왔다. 한 가지 반찬만으로 한 끼를 너끈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서너 가지의 반찬이 상에 올라오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늘어난 반찬 가짓수에 반비례해서 먹는 밥의 양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으니 불과 3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치고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헌데 말투를 들어보니 이 지역 출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
"저유?"
"예."
"예... 저는 이곳 남양 출신이 아닌 충청도 해미 출신이구만유."
"해미요? 해미라면 서산 당진 그쪽 아닙니까?"
"맞구만유."
"헌데 어떻게 이곳까지...?"
"지는 원래가 해미 관아에서 일을 하던 공장(工匠)이구만유. 그라다가 이곳에
조선소가 세워지고 일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예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구만유."
"예..."
원래 남양은 인조대왕 시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이 강화도 인근의
교동도로 이전하고 나서 서서히 쇠퇴하던 지방이었다. 그러나 갑자년(甲子年 1864년)
남양에 조선소가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양조선소는 수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게 되었고, 그동안 농사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 지역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남양조선소의 수 많은 일자리는
외지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동도로
이전했던 삼도수군통어영이 해군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남양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식으로 국가 기간산업이 남양에 뿌리를 내리게되자 지역 경제는 순식간에
활성화되었다. 과거에 이름 없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남양이 이제는 호서(湖西)
일대의 새로운 지방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남양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천군이 주도가 되어 새롭게 건설하고 있는 각종 기간산업이 들어서는
지역이나 도시들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전통 있는 지방 도시들과 더불어서 나름대로 특색 있는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이런 산업의 발전은 조선의
백성들의 삶을 조금씩 변화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