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윤 공사."
"말씀하시지요. 요시노부 공(公)"
막부의 중신 도꾸가와 요시노부는 대집정 오구리 다다마사와 함께 지금 나가사끼의
조선 공사관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법국 함대의 조선 침략이 엄청난 인명피해 끝에
수포로 돌아가고, 더불어 천 이백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포로만 남기고 법국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사까에서 바로 달려오는 길이다. 평소 같으면 윤정우의
상대역인 구리모도 죠운이 달려 왔을 것이나, 이제 조선 공사 윤정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요시노부와 오구리 다다마사가 직접 달려와야 할 만큼 조선이 부쩍 성장한
상태였다. 이래서 나라는 강하고 봐야한다니까... 윤정우는 가능하면 최대한 위엄을
보이기 위해 천천히 말했다. 장군 이에모찌가 죽은 후에 다음 장군으로 오를 이가
바로 요시노부 아니던가. 그런 요시노부가 몸소 자신을 찾아왔으니, 새삼스레 조선의
위상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번에 감찰 구리모도가 공사께 귀국 군대의 출병을 요구하였지 않았소이까?"
"그랬던 적이 분명히 있었지요."
"그래, 귀국 조정에서는 우리 막부의 출병 요청에 대해 어떤 답을 주셨소이까?"
"아, 예. 그거요. 그것이라면 아국 조정의 답신이 이미 도착한 상태입니다."
"그래요...?"
요시노부와 오구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평소 법국의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선물한 하체가 꽉 끼는 하얀색 바지와 금빛 수실과
금빛 단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푸른색 상의로 이루어진 법국 장군복을 즐겨 입던
요시노부는 오늘은 예외적으로 전통 하까마 차림으로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사실
요시노부와 오구리는 막부의 중신들 중에서도 친 법국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법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지금이야 형세가 변해 이렇게 조선 공사관까지 몸소 행차를 한
것이지만, 그동안 법국에서 막부에 쏟은 노력과 정성은 정말 엄청났다. 무상으로
무기를 지원해주겠다고 했고, 요꼬하마에 제철소까지 지어준다고 했으니 법국에서
막부에 쏟은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생겼으니 요꼬하마에 있는 법국의 롯슈(L.Roches) 공사가
알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할 일이지만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있는 쪽이 모든
것을 차지하게 돼 있는 법이었다.
"귀 막부의 요청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허나, 아국 조정에서는 몇
가지의 조건을 더 관철시키리라는 명을 본관에게 내렸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지난번 구리모도 공께서는 오구리 공의 제의라고 하면서 북해도(北海島 홋카이도)를
아국에게 영구히 넘기시겠다고 하셨는데..."
"... 꼴깍..."
"사실 북해도 가지고는 귀 막부의 요청을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윤정우의 말이 떨어지자 요시노부와 오구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색에서 똥색으로
변해버렸다. 올해 겨우 스물 아홉 살의 요시노부보다는 쉰이 넘는 오구리가 아무래도
정치감각이나 외교감각에서 앞서 있었다. 요시노부가 혈기왕성한 청년이라면
오구리는 모진 풍상을 다 겪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어쩔 줄 모르는 요시노부대신 오구리가 나선다.
"그럼 귀국에서 원하는 조건이 무엇이오? 조건을 말해보시오."
"... 음... 좋습니다. 아국 조정에서는 북해도 외에 세 가지의 조건을 본관에게 더
지시했습니다. 먼저 대마도(對馬島)를 영구히 아국에게 넘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사쓰마번이 장악하고 있는 유구(琉球 류큐)를 역시 아국에게 넘기라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귀국과 아국 사이의 교역에 있어서 최혜국대우를 아국에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 음..."
"... 끙..."
요시노부와 오구리는 말이 없었다. 조선이 순순히 북해도만으로 만족하여 자신들의
출병 요구를 들어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되자 상당히 난처한 지경에 봉착하게 되었다.
"대마도야 원래부터 아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곳인데, 지난 임진년의 7년 전쟁이후
귀국의 영향력 하에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는 아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곳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윤정우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종무(李從茂 1360~1425)의 대마도 정벌을 논하지
않더라도 대마도는 대대로 조선의 속국과 같은 곳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조정으로부터
만호(萬戶)의 벼슬을 받았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도 대마도주는 조선과의 조공무역에
사활을 걸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왜국의
관계가 소원해 졌을 때도, 당시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대마도의 생사가 걸린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종의지는 광해군 원년(1609) 기유조약(己酉條約)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왜국의 막부 사이에서 줄타기 교린 우호 관계에
들어갔다.
"윤 공사의 말씀이 맞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대마도주 소오 요시아끼라(宗義達)가
따를지 모르는 일인지라..."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 막부에서는 그저 아국에 귀순하라는 한 장의 문서만
종의달에게 전달하면 나머지는 아국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막부의 형편상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전통적으로
대마도와 유구는 왜국에 속해 있지 않은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마도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왜국의 막부에 협력하기는 했지만 이후에는 조선과 막부의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활로를 모색했던 곳이고, 유구는 최근에 이르러서 사쓰마번이 병합한
곳이기 때문에 실상 막부에서 손해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조선이 유구를
차지한다면 가만있을 사쓰마번이 아니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 같은
사쓰마번의 버릇을 조선을 통해 손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까지 저들이 할
것이라는 생각을 윤정우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혜국 대우야 아국만을 위한 불평등한 대우가 아닌 귀국에 대해서도 아국이
동등하게 적용해 드리겠다는 것이니 귀국이 손해날 것이 없지를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요시노부와 오구리의 얼굴이 다시금 밝아졌다. 두 사람도 막부의 중신답게 머리가
있었다.
윤정우의 조건이 그렇게 손해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양국이
동등하게 서로에게 최혜국 대우를 해준다면, 서양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최혜국
대우를 해주고 있는 불평등한 수호통상조약보다도 훨씬 나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정우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막부에서 받아들일 것을 알고 있었다. 막부의 처지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고, 언뜻 보기에는 막부나 왜국에 하나도 손해 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더욱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조건이 왜국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할 날이
멀지 않음도 알고 있었다.
북해도는 겨우 10만에 불과한 아이누 원주민이 살고 있는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인
동네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북해도를 차지하면 바로 위에
있는 사할린으로 통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되면 오츠크해를 거슬러 올라가
시베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동쪽의 쿠릴열도를 타고 올라가면
캄챠카 반도까지 이어졌고, 캄챠카 반도는 다시 베링해의 알류산열도와 알래스카까지
손쉽게 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북해도는 바다를 통해 시베리아에 접근할 수 있는
요충지였고, 알래스카까지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북해도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유구의 여러 섬들도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큐슈의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유구의 섬들은 대만까지 손쉽게
이어질 수 있었고, 유사시 청국이나 왜국에 있는 외국 상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었다. 아울러 동남아시아로도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유구였다. 더구나 지금 유구는 큐슈의 사쓰마번이 장악하고 있으니, 유구를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쓰마번을 굴복시켜야만 했다. 그렇게되면 자연적으로
큐슈까지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큐슈를 차지하게되면 북해도와 함께 왜국을
남북으로 제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섭정공 김영훈은 여기까지 생각하여 윤정우에게 유구까지 얻을 것을 지시했다. 사실
일부 천군 중에는 왜국을 복속시킬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영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 조선의 형편상 왜국을 복속시키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나 복속 후에 관리가 문제였다. 겨우 천 육백만에 불과한 조선의 인구로
삼천만이 넘는 왜국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스리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은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왜인들의 반감만 사게 되어 나중에 골치 아플 소지가 많았다.
이 정도만 얻어도 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충분했다.
최혜국 대우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를 요구해도 됐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조선과 왜국과의 교역량에서 조선이 왜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8할이면, 왜국에서 조선으로 직접 수출하는 물량은 겨우 2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 2할도 곡류와 같은 1차 생산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쥬신상사에서 왜국인을 대리로 내세워 수입하는 원유와 석유, 경유의 경우에는
조선이 미국에서 직접 수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이런
상태에서 양국이 서로 상대방에게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다고 해도 왜국의 산업이
마비되면 마비됐지 조선이 피해를 볼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이렇게 동등한
자격을 서로에게 부여한다는 감언이설에 더 쉽게 막부에서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알리 없는 요시노부와 오구리는 서로 눈짓을 한 번 주고받더니 뭔가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막부에서 귀국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많은 군사들을 출병할
수 있겠소이까?"
"음... 아국 조정에서 보내온 답신에 따르면 약 3000명에서 4000명 정도 병력의 여단급
부대를 출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겨우 4000명 정도요?"
"그렇습니다. 왜요? 너무 적은가요?"
"너무 적지 않구요. 우리 막부에서 죠슈번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한 군사들이 물경
20만에 이릅니다. 이 20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군사들로도 죠슈번에게 밀리고 있는
처지에 4000명이라면 너무 적은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 그 4000명이 이번에 법국 군대를 몰살시켰던 부대라면 어떻겠습니까?"
"법국 군대를 몰살시켰던 부대라고요?"
"그렇습니다. 실제 법국 육전대 400명을 아국의 대대급 부대에서 단 5분만에
몰살시켰다고 합니다. 이래도 모자라겠습니까?"
요시노부와 오구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법국 육전대라고 하면 그야말로
최강의 군사들이었다. 그 최강의 육전대 병력 400명이라면 왜국의 1만 무사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육전대 400명을 단 5분만에 몰살시켰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윤정우는 당시 강화도에 침입했던 법국 군대가 어떻게 조선군에게 당했는지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강화도에 법국이 상륙한 일부터, 육전대가 강화성 남문에서
몰살당한 일과 법국 함선 9척이 조선군의 요새포에 의해 어떻게 수장 당했는지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상세하게 말해줬다.
요시노부와 오구리는 윤정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법국이 어떤 나란데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가슴속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나가사끼에는 법국 함대의 소식으로 들끓고
있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서양의 강대한 법국 함대를 무찌르고 천 이백
명이 넘는 법국 군사들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을 오가는 왜국
상인들의 입에서부터 나온 소문은 들불처럼 일어나 나가사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
왜국에 퍼져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요꼬하마의 법국 공사관까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지만 법국 공사관으로부터는 자세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법국 공사관 직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법국
공사 롯슈로부터 직접 확인한 사실은 아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는 조선군이
법국 함대를 무찌른 것이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부랴부랴 나가사끼까지
달려온 두 사람이었지만 막상 상세한 전말을 조선 공사 윤정우로부터 듣게 되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모자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 윤정우의 말소리가 들렸다. 잠시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요시노부와 오구리는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면서 말한다.
"좋소. 그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한 여단급 부대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요시노부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신과 동년배의 조선
공사라는 자는 무슨 놈의 조건이 많고 말이 많은지, 정통 무가에서 교육받고
무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자신을 이렇게 골탕먹인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치밀었다. 윤정우는 요시노부의 짜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다.
"사실 아국은 육군은 강할지 몰라도 해군은 강하지 못합니다. 하여, 귀국의 해군에서
아국 군대를 수송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그거야 어렵지 않소. 우리 막강한 해군이 귀국의 군대를 수송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정식으로 양해각서를 체결할까요?"
"좋습니다."
윤정우는 요시노부가 동의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몇 장의 서류를 꺼내 놓았다.
이제 정식으로 양해각서에 도장만 찍으면 북해도와 대마도, 그리고 유구까지 조선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