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조선군의 항복사절이 왔다간 뒤로 프랑스군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이미 일반
병사들까지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로즈 제독을 비롯한 참모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원정함대의 임시 사령부는
로즈 제독이 하룻밤을 넘긴 민가의 마당에 세워져 있었는데 하얀색 천막 안에 커다란
탁자 하나와 몇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강화성을 점령한
후에 거기에다 사령부를 설치할 생각이었으니, 상륙지에 불과한 갑곶나루에 제대로
된 사령부를 설치할 생각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었다. 그 사령부에 로즈 제독이
참모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사령부라는 느낌보다는 패잔병의 집합소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엄청난 패배감이 좌중을 감싸고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깬 것은 패트릭 대위였다. 좌중에
자리한 참모들 중 가장 젊은 패트릭 대위는 침묵의 고통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로즈
제독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독님."
"..."
로즈 제독은 말이 없었다. 아니, 패트릭 대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흡사 정신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로즈 제독을 보면서 패트릭 대위가 다시
말한다.
"제독님!"
"... 으응...? 날 불렀나?"
로즈 제독은 누가 자신을 불렀나? 하는 표정이었다. 패트릭 대위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령관인 로즈 제독은 엄청난 패전의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사령부의 눈치를
보면서 삼삼오오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패전의 먹구름이 프랑스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가만 놔두다가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패트릭 대위는 로즈 제독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다시 말한다.
"제독님! 우리 위대한 프랑스군의 사전엔 항복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제독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프랑스군은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
로즈 제독은 역시 말이 없었다. 자신도 패트릭 대위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줄
알아듣고 있었다. 위대한 프랑스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상황을 헤쳐나갈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로즈
제독이 안고 있는 딜레마였다. 올리비에 대령이 지휘하던 400여 명의 육전대를
몰살시킨 조선군이었다. 프랑스 해군이 자랑하는 6척의 함선을 순식간에 수장시켰던
조선군이었다. 영국 해군 외에는 바다에서 상대가 있을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진 프랑스 해군의 대형함 세 척이 조선군 요새포의 공격에 침몰했다고 했다. 꼭
눈으로 봐야만 믿을 수 있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로즈 제독은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무모한 원정이었다. 대형함 세 척을 비롯한 아홉 척의 함선에 겨우 2000여
명의 병사만으로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무지의 소치였으며,
자가당착의 소산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처음에 조선 침공의 이유로 내세웠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죽음에 대한 응징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아니, 이제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일만 남은 상태였다. 물론 그것도 살아서
조선 땅을 벗어나야 할 터이지만.
사실 국제사회의 비난은 두렵지 않았다. 언제 위대한 프랑스가 국제사회의 여론에
신경 쓰면서 다른 나라를 침공했던가. 로즈 제독이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로즈 제독이 걱정하는 것은 동양인들의 서양에 대한 두려움이 걷히는 것이었다.
동양의 조그만 나라 조선에서, 서양 제국(諸國) 중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영국과
쌍벽(雙璧)을 이룬다는 프랑스군이 처참하게 패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된다면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이 프랑스군을 무찔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만 한다면, 그동안 서양 제국의
위세에 눌려있던 청국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고, 그 움직임은 자칫하면
동양 전체에 퍼질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그러한 움직임은 수면 위로 부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서양 제국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도 몰랐다. 식민지에서 싼값에
수탈해오던 자원은 물론이고, 자국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소비지로서의 가치도 떨어질
것이다. 당장, 공장은 상품이 팔리지 않아 문을 닫는 곳이 속출할 것이고,
거리거리에는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넘치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되면 자신은 영원히 역사에서 기억하는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서양의 영광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이는 위대한 프랑스의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Pierre Gustavus Rose) 제독이라고...
어떻게든 그 일만은 막아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올리비에 대령의 400여 명
육전대 병사들을 물리친 것으로 봐서는 조선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장비와 훈련된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조선군의 중령이라는
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강화성에는 최소한 연대급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강화된 연대급... 실제로는 여단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는 병력이 강화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화력도 막강할 것이다. 육전대를 괴멸시킬 때 대구경 야포의
공격은 없었다고 하지만, 막강한 요새포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군이 대구경 야포가
없을 리 만무했다. 거기에 단단한 석성(石城)을 방어거점으로 삼고 있었으니,
프랑스군이 유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화력의 우위도 없었고, 병력의 우위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형의 유리함도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로즈 제독은 큰 결심을
한 듯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제군들..."
"예, 제독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제독님."
참모들의 대답을 뒤로 하고 로즈 제독의 말이 다시 들린다.
"본관은 심사숙고한 끝에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제군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프랑스군은 패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관은 조선군에게 항복하고자 한다."
"그건 안됩니다! 제독님."
"왜 안 된다는 건가? 패트릭 대위."
"그건... 그건..."
패트릭 대위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안 된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안 되는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말로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라도 뛰어들어간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는 패트릭 대위였다.
"남아있는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라도 살려서 조국의 품에 돌려보내야 한다. 이미
절반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지금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말을 하는 본관의 마음도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사태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본관의 무능함을 탓해라."
"크흑... 제독님..."
"제독님..."
"이럴 수가...크흑흑..."
항복을 결정한 로즈 제독이나 그 말을 듣고만 있어야 하는 참모들이나 비통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프랑스의 군대가, 언제 항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줄
생각이나 했었던가. 언제 위대한 프랑스군이 동양의 노란 원숭이들에게 무참하게
패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었던가. 언제 동양의 노란 원숭이들에게 자비를
구걸하게 될 줄 예감이나 했었던가.
아마도 1866년 10월 15일(음력 9월 7일) 오늘은, 프랑스군 역사상 이 날은 가장
치욕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이다. 가장 치욕스러운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