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화 (165/318)

1.

"합하, 이것이 바로 신 화폐이옵니다."

운현궁 아재당에는 지금 김영훈을 비롯하여 정원용, 조두순, 김기현, 김병학,

박규수등이 새로 설립한 조선은행(朝鮮銀行)에서 발행한 신 화폐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재경대신 김기현은 신 화폐의 견본품을 가지고 와 아재당에 모인

대신들에게 보여 주며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이 신 화폐는 우리 조선의 우수한 제지 기술과 천군(天軍)이 보유한 기술이

접목되어 생산된 종이에다, 천군이 가져온 인쇄기를 이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전(銅錢)도 역시 마찬가지로 천군이 가져온 기계를 이용하여 찍어낸

것입니다. 여러 대신들께서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종이로 만든 화폐일지라도 그

질김이 상당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 모인 중신들에게 견본품 화폐를 돌리기 시작하는데, 정원용과

조두순같은 원로 중신들은 사대부(士大夫)의 신분으로 속되고 더러운 물건인 돈을

만진다는 선입견(先入見)이 있는 탓인지 한 번 만져 보고는 좋다 싫다 말이 없다.

이들과는 반대로 내무대신 김병학과 상공대신 박규수는 화폐의 재질을 살펴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장 경제의 첫걸음이 내딛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는 지난 철종의 인산이 끝난 후부터 준비하고 유통시키려던 신 화폐였으나

조정에서 조율할 의견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시행(施行)에 어려움이 많았다.

대부분의 조정 중신들이 신 화폐의 발행과 통화에 어느 정도의 의견 접근을 이루기는

하였으나 정작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화폐에 도안될 인물의 확정이었다.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과 그에 동조하는 신진 대신들은 화폐의 도안과 화폐에 새길

인물에 대한 의견이 쉽게 모아졌으나, 정원용과 조두순을 비롯한 기존 조정 중신들의

입장은 화폐와 같은 속된 물건에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집어넣는 것도 크나큰

불경(不敬)인데 하물며 임금의 어진이 아닌 역대 위인의 진영(眞影)을 그려 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그 주장에는 김병학, 김병국

같은 천군에게 호의적인 대신들까지 동조하였으니 이들의 거부감을 희석(稀釋)시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은 새삼 조선 사대부들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벽을

실감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우회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첫 번째로 한상덕 휘하의 대정원 요원들을 조선 팔도 방방곡곡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의 여론을 조작한 일이다. 팔도에 파견된 대정원 요원들은 마치 뜬구름처럼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는데 주된 내용은 천군에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대부의 안이(安易)한 의식을 문제삼은 것이었고, 그와 더불어 신 화폐

발행으로 인하여 기존에 양반들이 광속에 쳐 박아 둔 돈에 대한 성토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 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했으니 사신(使臣)이 청국과 왜국을 다녀온 요 몇 달

사이에 백성들의 주된 관심사는 신 화폐의 발행이었고, 그런 백성이 셋 만 모이면,

"도대체 새로운 화폐의 발행은 언제 된다는 감?"

"이 사람아!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도대체 양반이란 종자들은 속이 어떻게 생겼길래 섭정공 합하께서 하시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래...반대는..."

"아무렴, 그런 놈들은 기양...!"

이러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대정원에서 퍼트린 "양이(洋夷)들의 화폐에는 이름 없는 백성들도 새겨져

있다카더라--" 하는 소문을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백성들의 의견은 주로, 양이들의 나라에서도 그러한 일들을 하는데 하물며

동방의 으뜸가는 예의지국(禮儀之國)이자 스스로를 문명국(文明國)으로 자부하는

조선에서 그들보다 못해서야 말이 되느냐 하는 식이었다.

두 번째로는 김영훈이 일 대 일로 중신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하였으니, 운현궁

아재당에서 뒷짐만 쥐고 호통만 칠 줄 알았던 김영훈이 몸소 중신들을 찾아다니며

허리를 굽히고 협조를 구하자 그들의 마음에 흡족함이 들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세 번째로는 모든 일체 정사를 김영훈에게 맡긴 채 창덕궁 대조전에서 칩거하고 있는

어린 임금을 움직인 것이다. 결국 김영훈의 뜻대로 어린 임금은 반대하는 원로

중신들을 대궐로 불러 위무하고 협조를 당부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녹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린 임금의 언문

교서가 내려오고 나서야 반대하는 의견이 잠잠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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