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연대장님. 광성보에서 무전이 들어왔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방금 법국함대가 손돌목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우리측의 피해는?"
"동검도의 동검돈대와 초지진의 세 군데 돈대가 포격을 받아 사용불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덕진진과 광성보의 돈대들은 포격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고
합니다."
통신군관의 보고가 있자 강화연대 양헌수 연대장 이하 참모들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연대장님, 법국함대가 우리의 무저항계에 속은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야, 다행한 일일세."
"그렇습니다, 연대장님."
"그나저나 갑곶나루 인근 백성들은 모두 소개가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대장님. 이미 갑곶나루 인근의 모든 백성들은 모두
강화부성으로 소개를 한 상태이며, 군하나루의 백성들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모두 통진부로 소개된 상태입니다."
작전참모 강혁수 소령의 보고를 들으면서 양헌수는 일이 계획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강혁수의 말은 계속된다.
"그리고 서둘러 피난을 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가재도구와 세간 등은 어지럽게
흩어 놓으라고 했으니 법국함대가 상륙한다고 하더라도 별 다른 의심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강화도연대가 행하고 있는 무저항계는 천군 출신의 작전참모 강혁수 소령이
입안한 작전이었다. 염하 양안의 돈대의 무저항에 안심한 법국함대가 별 탈 없이
갑곶나루에 상륙하도록 유도한 후에 상륙한 법국군대와 접전하여 적을 물리칠
생각이었다.
"헌데 초반에 박격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직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네만..."
"아닙니다, 1대대장님. 솔직히 우리 연대의 화력은 너무 막강합니다. 처음 접전부터
적들에게 막강한 화력을 과시한다면 저들은 지레 겁을 먹고 철수할 수도 있습니다.
박격포를 제외해도 우리가 보유한 한식보총(韓式步銃)과 한(韓)-4198식 기관총,
그리고 유탄발사기의 화력만으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섭정공 합하의
말씀처럼 최대한 적의 오판을 유도하고, 피해를 강요해서 다시는 우리 조선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음..."
1대대장 어제연 중령은 강혁수 연대 작전참모의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반부터 양안의 요새포를 이용해서 적함대를 수장시키거나, 아니면 상륙한 적들을
몰아 부쳐 일거에 섬멸하면 될 것인데, 작전참모가 너무 어렵게 작전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조정의 섭정공 김영훈의 명에
의해서 이런 작전이 세워진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섭정공 김영훈은 조선군이 너무 쉽게 법국군을 이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최대한의 포로들을 획득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염하 양안에 배치된
돈대의 요새포로 공격하여 격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쉽게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
여러 번에 걸쳐 적과 접전하여 최대한의 실전 경험을 조선군이 쌓기를 원했고, 많은
수의 포로들을 획득하기를 원했다. 나중에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까지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그 덤이 무엇인지 알 길 없는 연대장 양헌수 이하 참모들은 그 점이
불만이었다.
강화연대의 참모들이 강화부성 남문 안파루(晏波樓)에서 이렇게 작전에 대한 숙의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믄을 열고 들어왔다. 강화유수(江華留守) 이인기가 아전들을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영감."
"수고가 많소이다, 연대장."
강화유수 이인기는 몸소 아전들을 이끌고 와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문하던 차에
현재 상황이나 앞으로의 작전이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김영훈과 천군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화유수라고 하면 조선 팔도에 단 네 개밖에-개성,·강화,
·광주, 수원- 없는 부의 책임자이자 정 2품의 품계를 지닌 막강한 위세를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특히 강화유수는 그 중요성으로 인해 유사시(有事時)에 선참후계(
先斬後啓)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자리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행정사무만 돌보는 자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강화유수를
홀대(忽待)할 수는 없었다.
"법국함대가 갑곶을 향해 오고 있다고 들었소만..."
"그러하오이다, 영감. 지금 법국의 함대는 손돌목을 통과하여 갑곶나루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고 하오이다. 이 대로라면 앞으로 30분이나 1시간 안으로 갑곶에
상륙할 것으로 사료되오이다."
"음... 이(二) 각(刻)에서 반 시진(時辰)이라... 허면 문정을 하실 생각이오? 아니면
문정하지 않을 생각이시오?"
천군에 의해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양헌수는 현대식으로 30분에서 1시간이라는
표현을 하였으나, 이인기는 아직도 분이나 시간 단위보다는 각이나 시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편한 모양이었다.
"허면, 문정을 하실 생각이오? 아니면 문정하지 않을 생각이시오?"
"문정은 형식적이나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들이 갑곶나루에 상륙한
순간 문정관으로 어재연 1대대장을 보낼 생각입니다."
:음... 그렇구려... 형식적인 문정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지..."
양헌수의 말을 들으며 이인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평소부터 가슴속에 품어왔던
의구심을 이번 기회에 해소할 심산인지 양헌수가 묻는다.
"헌데, 영감."
"...?"
"강화부성 안의 외규장각과 삼랑성(三郞城) 서고에 있는 서책들이 어디로 옮겨졌다고
들었소이다만, 사실이오이까?"
"아! 그거요? 사실이오. 올 초에 전주(全州)의 서고로 옮겼소이다. 뿐만 아니라
장녕전(長寧展)에 모셔진 숙종대왕과 영조대왕의 어진(御眞)도 전주의 경기전(慶基展)
으로 옮겨졌소. 헌데, 그것은 왜 묻는 것이오?"
"아니오이다. 그냥 우리 연대가 적들을 물리칠 것인데 왜 그랬는지 의문이
들었사오이다."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하여 문교부에 물어본 적이 있었소. 문교차관 영감의 설명이,
우리 강화도가 예전에는 난리가 일어났을 때 피난처로 활용되었기에, 중요한
외규장각의 서책들을 여기에 보관한 것이지만, 이제는 바다로 침략해오는 양이들의
위협에 비교적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하였소. 하여 상대적으로 내륙에 위치한 전주로
모든 서책과 어진을 옮기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소."
"예..."
올 초에 강화부성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서책들과 장녕전에 모셔져 있던
숙종대왕과 영조대왕의 어진은 모두 전주로 옮겨졌다. 외규장각의 서책들은 모두
전주 서고에 보관되었으며, 문교부에서는 전주 서고를 확장하여 국립도서관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숙종대왕과 영조대왕의 어진은 전주에 있는
경기전에 따로 모셔졌는데, 원래 전주가 전주 이씨의 발원지이고, 경기전에는 이미
태조대왕의 어진이 모셔져 있었고, 전주 이씨의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가 경기전 내 조경단(肇慶壇)에 모셔져 있었기에, 두 분 숙종대왕과
영조대왕의 어진을 경기전으로 옮겨 모신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외규장각의 서책들을 전주 서고로 옮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주는 한반도에서는 그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전무하다시피 한 곳이다. 전주는 한글로 온고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 말은 완전하고 편안한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해마다
찾아오는 한발(旱魃)이나 홍수(洪水), 태풍(颱風), 한파(寒波), 폭설(暴雪) 등의
자연재해가 거의 유일하게 비껴 지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모든 자연환경이 사람이
살기에 알맞게 찾아오는 곳이 바로 전주였다.
특히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몰아닥친 태풍 루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두 눈으로
묵도한 천군은 이창호 문교차관이 주도한 외규장각 서책의 전주로의 이전과 조선
최초의 도서관으로의 발전을 강력히 후원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려는 섭정공 김영훈의 뜻에도 부합되었고, 태풍 루사로 인한 피해로
전국이 시름에 잠겨져 있을 때 유독 전주만은 그런 피해와 시름이 없었던 곳이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만큼 전주는 사람이 터전을 삼고 살아가기에 풍요로운
곳이었다.
이인기는 그러한 사정까지 알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군사를
통솔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은 자신이 유수라는 지위만으로 군 지휘부가 작전회의를
하는 곳에 끼어있는 것이 민망한 느낌이 들었는지 한 가지를 더 묻는다.
"섭정공 함하께는 장계(狀啓)를 올리셨소?"
"아니오이다, 영감. 법국함대가 침공했다는 장계는 우리 강화도연대가 올리는 것이
아니라 통진부에 주둔하고 있는 다른 부대에서 담당하기로 이미 약조가 되어있소이다,
영감. 아마도 그 부대에서 장계를 올렸을 것이오이다."
"그렇구려... 그럼, 고생들 해주시오, 나는 난리를 당한 백성들을 위무(威武)할
터이니, 연대장과 여러분들께서는 오로지 적들을 무찌르는데 매진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