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동검도 건너편에 위치한 강화도의 택지돈대에서 쌍안경으로 법국함대를 관측하고
있던 택지돈대의 책임자 이을설 소위는 분통이 터졌다. 택지돈대는 동검돈대와
직선거리로 겨우 1250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영헌수 연대장의 작전계획대로
강화해협 양안에 설치되어있는 돈대의 75mm와 120mm 후장식 속사포는 이미 철거를
했고, 돈대의 군사들도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다만 요소 요소의 몇 군데 돈대에만
군사들이 남아서 적함을 관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 광성보! 광성보! 여기 택지돈대, 여기 택지돈대, 이상."
"지지직...여기 광성보, 이상."
"방금 법국함대가 동검돈대를 포격했다. 이상."
"... 지지직... 감도가 좋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라 이상."
"방금 법국함대가 동검돈대를 포격했다. 이상."
"... 음... 법국함대의 함선 수와 현재 위치는?"
"법국함대는 총 5척의 포함과 작은 주정 14척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염하를 향해
북상중이다, 이상."
"알았다. 이상, 통신 끝."
"통신 끝."
통신이 끝나자 이을설 중위는 무전기의 전원 스위치를 껐다. 지금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무전기는 천군이 가져온 PRC-999K 무전기 중 일부이다. 천군이 가져온 PRC-999K
무전기는 그 수량이 20대가 채 안될 정도로 한정된 수량이었다. 당초 신헌을 비롯한
조선군 수뇌부에서는 이 PRC-999K 무전기 전부를 강화도에 배치할 것을 주장했으나,
현대식 전자장비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군이 잘 다룰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중요한 돈대 몇 곳과 나름대로 무전기에 숙달된 무관이 있는 돈대에만 일부 배치를
하게 된 것이다.
남양 조선소의 3000톤급 선거에서 건조되고 있는 잠수함 용 무전기는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었지만 보병용의 무전기는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고 있었다. 보병용
무전기의 개발이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이유는 신기도감 기기창과 신기창의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처음부터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개발에 착수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신기도감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이 정신 없이 바쁘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원인이었다.
처음 신기도감에서는 최초의 한국형 분대용 무전기 KPRC-6와 중대용 무전기 PRC-77를,
무전기 개발의 기본 모델로 삼고 개발에 착수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KPRC-6는 1.6km까지가 유효거리이다. 통신거리가
짧으면 쓸모가 없고 너무 길면 다른 부대와 혼선이 되기 때문에 1.6km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이 KPRC-6가 개발되고 나서 중대용 무전기인 PRC-77와 지금 이을설이
사용한 PRC-999K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무전기라는 것이 기술과 지식만
가지고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자기술과 주물기술, 절삭가공기술,
도금기술, 밀봉기술 등 온갖 기술이 필요했다.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아야 되고
페인트가 벗겨지지 않아야 하고 영하 40℃가 되거나 영상 75℃가 되더라도 동작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온갖 기술이 필요한 것이 무전기의 개발이었다. 사실 무전기를
만드는 일 자체는 신기도감의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크기를 보병용에 적합하도록 소형화 경량화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KPRC-6와 PRC-77를 단 시일 내에 개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문제점을 깨달은 신기도감에서는 부랴부랴 2차 대전 당시 수준의
무전기를 개발한다는 것으로 개발 방향을 선회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신기도감 기기창과 신기창의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상품이나 기술
개발의 범위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 원인이었다. 정말이지 밤잠을 못할 정도로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금 시대에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는 보병용 무전기를 개발하는 문제는 자연적으로 우선 순위에서 밀리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잠수함이야 그 특성상 꼭 필요한 물건이 무전기였고, 또 크기가
크더라도 충분히 탑재가 가능했기에 문제가 될 수 없었지만 아직까지 보병용
무전기의 필요성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개발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을설 중위는 무전을 때리고 나서 신기한 듯이 PRC-999K 무전기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겨우 등에 질 수 있을 정도의 자그마한 물건이 100리나 넘게 떨어진 곳과
자유롭게 교신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천군은 천군인갑다'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소대원 하나가 그 생각을 깨트린다.
"소대장님. 초지진이나 덕진진은 무전기라는 요 이상한 물건이 없는디, 문제가
없을랑가 모르것습니다."
"왜? 걱정되나?"
"당연헌 것 아닙니까? 거그도 우리 전우들이 있을틴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우리 돈대처럼 강화도의 모든 돈대의 포와 군사들은
철수하여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처럼 관측을 위한 몇몇 군사들만이
숨어서 적함을 지켜보고 있을 터이니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을 것이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