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서 오시오, 부사."
"안녕하셨습니까? 총독각하."
법국함대가 조선으로 오고 있을 때, 경흥부사 이재화는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총독부에 와 있었다. 지난 4월, 알래스카 매입에 관한 문제를 처음 협의한 후로
꾸준히 그 문제를 논의했었고, 이제 드디어 최종적인 매입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렇게 총독부에 온 것이다.
러시아 동(東)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예프와의 친분, 또는 그동안의 관례로 미루어 볼
때 총독관저에서 최종 매입작업을 마무리해야 옳을 일이었으나, 사적인 만남이 아닌
공적인 만남에서 관저를 이용한다는 것은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차림으로 총독 관저를 방문했던 것과는 달리 지방관의 전통적인 문관복(
文官服)을 착용하고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재화와 무라비예프의
수행원들도 꽤 있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총독각하."
무라비예프는 서둘러서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스크바 중앙 정계(政界)에 진출할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무라비예프는 이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고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고 싶었다. 이미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 접근이 이루어진 상태였기에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실무진에서 합의한 알래스카에 대한 최종 매각대금이 650만$ 정도로 의견이 모아진
것을 부사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총독각하."
"그런데 귀국에서 과연 650만$라는 거금을 지불할 능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음... 사실 650만$에 매입하기로 의견이 모아지긴 했지만 조금 과한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쓸모 없는 동토에 불과한 땅을 650$ 달러에 산다는 것은 너무 비싸다는
여론이 아국 조정에서 비등(沸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재화가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조건으로
지불한 금액은 720만$였다. 그것에 비하면 조선이 지불할 650만$는 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650만$도 비싸게 팔아먹는 것이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무라비예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재화에게 선심 쓰는
것처럼 말을 한다.
"알고 있소, 귀국 같은 작은 나라에서 650만$라는 거금을 지불하기에는 힘에
부친다는 것을... 하여, 매각대금을 한 500만$ 정도로 싸게 해드릴 용의가 있소만..."
"예-에?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렇소.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이다."
이재화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굳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 이재화를 보면서
무라비예프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조건은 다름아니라 귀국과 통상을 하는 것이오."
"통상을요?"
"그렇소, 귀국의 사정상 통상조약까지 체결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아국과
귀국의 국경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통한 통상 정도는 가능할 것 같소만... 어떻소?"
"... 음..."
무라비예프나 이재화는 모두 양국 정부로부터 알래스카 매각과 매입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무라비예프가 먼저 이런 제의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청국에 주둔하고 있는 법국함대가 이미 한 차례 조선을 침범한 일을 알고 있고, 또
다시 대대적인 조선 침공을 법국에서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라도 조선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선점(先占)의 목적도 숨어있는 제의였다.
"좋습니다.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요?"
"그렇습니다, 총독각하."
"말씀해 보세요. 무슨 조건인지..."
"솔직히 500만$ 정도로 싸게 해주신다고 해도 통상까지 허용한다면 아국의 손해가
너무 큽니다."
이재화는 거기에서 말을 끊고 무라비예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라비예프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재화의 그런 행동에 무라비예프도 깊은 침음성을 내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이재화의 말이 계속된다.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을 달고 싶습니다."
"말해 보시오, 무슨 조건인지...?"
"아국에 시베리아 일대의 벌목권(伐木權)을 주십시오."
"벌목권을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지금 귀국의 영토인 시베리아 일대에는 주민들의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발할 땅은 널리고 널린 반면에 제대로 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을 아국이 하겠습니다. 벌목장까지 가는 도로도 아국에서
건설할 것이며, 벌목한 목재의 3할을 일종의 세금 형식으로 귀국에 제공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벌목장 인부들에 대한 여권의 발급까지 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벌목권이라... 벌목권..."
무라비예프는 양미간을 찡그리며 벌목권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재화의 제의가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이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면서, 선심 쓰듯이 매각대금을 깎아주면서, 그것을 기화로 통상까지 덤으로 얻을
생각이었는데, 이재화는 거기에서 한 술 더 떠서 벌목권 문제와 벌목장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건설까지 조선이 담당한다고 제의를 했으니, 순식간에 협상의 주도권이
상대방에게 넘어간 것 같아서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통상만 허용되게
된다면, 그래서 조선에 대한 일종의 선점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이 그렇게도 염원해
마지않고 있던 중앙 정계로의 진출도 꿈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의 우수한 자기(瓷器)를 독점으로 공급받아서
자국에 팔 수만 있다면 정계 진출은 물론이고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라비예프도 그동안 조선 관리인 이재화와 접촉하면서, 또 나름대로
조선의 사정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면서, 조선과의 무역에서 러시아가 크게 이득을 볼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조선의 섬유제품의 질은
영국의 유명한 섬유제품을 능가하고 있었으며, 유리제품과 자기제품의 경우에도 그
강도와 아름다움에서 유럽 제품에 비해서 뒤지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여러 가지
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역에 집착하는 이유는 정치 경제적인
선점을 한다는 의도가 강하게 있었다. 이것은 '내가 먼저 찜해 놓은 물건이다,
그러니 누구도 손대지 말아라'하는, 혼자만의 망상(妄想)에 사로잡힌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이런 경우를 일컬어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조선과
같은 자그마한 나라가 자국 러시아와 무역을 하면서 이득을 취한다면 얼마나 취할
것이며,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지금의 시베리아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교역품이
자국에 스며들겠는가 하는 자신감을 무라비예프는 가지고 있었다.
이재화가 벌목권을 조건으로 내세운 이유도 나름대로 충분했다.
대대로 각종 토목사업에 목재를 사용해 왔고, 난방의 유일한 방법으로 땔감을 사용해
왔던 조선의 산림은 황폐화의 정도가 극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증가한 것이 바로 산송(山訟)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두드러지게 증가한 것이
산송이었는데, 특히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에는 각각 2건과 4건에 불과했던 것이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는 각각 12건과 23으로 증가하고, 그와 유사한 소송이
무려 68건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산송의 대부분이 난방의 연료로 사용되는 땔감의 잠채(潛採)에 관한 것이었다.
산림의 입회권(入會權 촌락의 공유림에 입장하여 임산물, 특히 비료로 사용할 수
있는 낙엽, 관목 등을 채취할 수 있는 권리)을 둘러싼 분쟁도 전국적으로 빈번하게
발발했다.
김영훈과 천군이 등장하면서 "백도혁신(百度革新)을 위하여 백폐(百弊)를 삼제(芟除)
하는 건"이라는 108개 항목의 개혁안(改革案)을 제정하고 산림 식재(植栽)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식재를 권장하였고, 그동안 무분별하게 벌목을 남용하던 약탈적
산림이용에서 식재와 조림을 병행하는 재생적 산림이용으로 전환하였다고 해도,
난방의 유일한 수단이 땔감을 이용한 것밖에 없는 상황에서 산림자원의 이용은 크게
줄지 않았다.
이 점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농림대신 김인호는 섭정공 김영훈에게 새로운
형식의 난방과 취사방식을 건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연탄이었다.
신기도감의 기기창과 신기창 중 군사적인 부문의 신무기와 각종공업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계를 개발 생산하는 곳이 기기창(機器廠)이라면, 실생활에 필요한 제품과
기계를 개발ㆍ생산하는 곳은 신기창(神器廠)이었다. 그런 신기창에서 연탄공장을
만들 수 있는 기계들을 개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개발되어 연탄공장을
만들고, 또 연탄을 생산하여 실생활에 사용될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재화의 제의대로 조선이 시베리아 산림자원의 벌목권을 얻는다 하여도
거리상의 제약 때문에 땔감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땔감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각종 토목사업에 소용되는 목재의 벌채는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이 나중에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베리아에 자연스럽게 조선인
벌목꾼들이 진출하고 또, 도로건설을 위한 인부들이 자연스럽게 진출한다면 한결
수월하게 시베리아 일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조선과 이재화의 이러한 숨은 의도를 알리 없는 무라비예프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좋소이다, 부사의 뜻대로 하겠소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총독각하. 아국에서는 귀국의 쓸모 없는 동토를 매입하면서,
귀국의 남아나는 목재의 생산까지 이룰 수 있어서 좋고, 귀국은 아국의 인력으로
그동안 내버려두다시피 했던 산림자원을 개발하게 되어서 좋고, 이거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자... 그럼 정식으로 계약을 할까요?"
"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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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부터 본격적인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시작됩니다. 전투장면의 묘사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없는 작가가 과연 잘 묘사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리고
조선군이 너무 먼치킨이라는 점도 걱정입니다... ㅠ.ㅠ...
많은 분들이 大韓帝國記에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국과의 관계나
왜국의 사정은 아주 자세하게 나오고, 왜국에서의 공작도 아주 잘 표현되었는데, 왜?
청국과의 관계나 청국의 사정은 거의 언급이 없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일반적인 대체역사소설들처럼 청국과의 관계를 다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체역사소설에서 청국과의 관계가, 조선과 외국의
교류에서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大韓帝國記까지 그것을 따라한다면 천편일률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大韓帝國記만의 독특한 색깔도 찾기 힘들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왜국과의 관계를 아주 상세히 묘사하고
청국과의 관계는 아주 조금 묘사한 이유입니다.
또 한가지의 이유를 대자면 청국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보려면 필연코 저들과 무력
충돌이 있어야 합니다. 힘을 다 기른 상태에서의 무력 충돌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힘을 기르는 상태에서의 무력 충돌이라면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명치유신을 전후로한 왜국과의 관계는 큰 무력 충돌 없이도 조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매리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청국을 주로 다룬다면 글이 한없이
늘어질 공산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大韓帝國記에서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고,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나름의
색깔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청국과의 관계는
나중에 내보낼 생각이지, 지금 내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이 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79 제 1차 조법전쟁(朝法戰爭)...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