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58화 (155/318)

6.

"뭐하고 계십니까? 신부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리델(Felex Clau Ridel 李福明) 신부는 뒤를

돌아보았다. 공사관 소속 의사로 이번 원정에 의료진을 이끌고 종군(從軍)하게 된

로제르 르메르(Roger Lemerre) 박사였다.

"아!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예, 헌데 무엇을 보고 계셨습니까?"

"예, 그저... 파도를 가르며 조선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 함대를 보고 있었지요."

조선 원정함대의 기함(旗艦)인 전함 게리에르(Guerriere)에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하고 있던 리델 신부는 갑판에서 함대의 항진 모습을 보다가 르메르 박사가

다가오자 이렇게 말했다.

1866년 음력 9월 4일(양력 10월 12일) 청국 산동성 치푸(芝 )를 출발한지 만 하루가

지난 지금 리델 신부의 마음은 착잡했다. 지난번 1차 원정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신도들의 근황에 대한 어떠한 자세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강력한

포대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의 탐사를 끝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결국 철수하게

되었지만, 다시 이렇게 조선 원정에 참여하게 되니 착잡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도 순박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아름다운 곳이고 순박한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렇지 않지요."

"위정자라 시면...?"

"지금 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섭정공이란 인물 말입니다..."

"예..."

리델 신부도 섭정공 김영훈과 천군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비록

궁벽한 경상도 일대와 충청도 일대의 산골에서 주로 선교했던 관계로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김영훈과 천군의 소문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군사들이라느니, 이양인이라느니 하는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그래서 김영훈과 천군의 집권에 마음 속으로 성원한 적도 있었다. 힘없고 나약한

백성들을 위해 여러 가지 좋은 정책들을 시행할 때는, 이제 조선에도 선교의 길이

열릴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순진한 생각까지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비록 천주교 평신도 사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남종삼이 섭정공의 반대파를 위해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프랑스함대를 불러들여 정권을 찬탈하려는데 앞장섰다고는 하지만,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9명이나 죽이고 선량한 신도들을 8000명이나 몰살시킨 것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제 입장만 아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소인배의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리델 신부의 마음이 그랬다.

여기까지 생각하며 리델 신부가 주위에 포진하고 항행하는 다른 함선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르메르 박사가 다시 말한다.

"엄청난 위용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 함대라면 조선의 운명은 그야말로 우리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 같은데요."

"... 음... 그렇지요. 지금 우리 함대가 전함 게르에르를 포함해서 모두 9척에

승선인원만 2000명이 넘으니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닐 겁니다."

군사작전에 문외한인 한낱 의사와 선교사의 눈으로 보기에도 프랑스함대는 막강했다.

기함인 전함 게르에르와 순양함 프리모게와 라플라스(Laplace), 통신보조함

데룰레데와 키엔샹(Kienchan) 연안포함 타르디프와 르 브레돈(Le Brethon), 그리고

코친차이나에서 급거 합류한 또 다른 연안포함 르두타블(Redoutable)과 듀피 드 롬(

Dupuy de Lome)으로 구성된 총 9척의 함선과 2000명이 넘는 무장병력은 동양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막강한 함대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국 시모노세키 앞 바다에서

영ㆍ미 연합함대를 수장시켰던 유령함대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민간인의 피해가 많지 않아야 하는데요..."

"군사작전에 민간인의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아닙니까?"

"예-에?"

"왜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군사작전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리델 신부는 르메르 박사의 단호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그냥 듣기에도 섬뜩한 소리가 나왔으니 달리 할말이 없었다.

"저들은 이미 무고한 우리 프랑스 선교사 9명뿐만 아니라 선량하고 힘없는 8000명의

천주교 신도들을 죽였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본때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조선 선교, 아니 동양 선교는 물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사님. 우리 외방전교회의 기본방침은 선교사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순교하신 베르뇌 주교님도 평소에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셨구요."

"하하하... 신부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넌센스군요. 누구보다 이번 조선

원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계신 분이 바로 신부님 아닙니까? 그리고 신부님을

따라온 조선인 신자들도 자신들의 나라를 침공하는 우리 프랑스함대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리델 신부는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을 따라 청국으로 밀입국한 조선인 신자들은 무려

11명에 달했으며, 이번 원정에도 최지혁(崔智爀 베드로)을 비롯한 3명이 수로안내인

겸 통역 일을 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을 이용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과연 천주님의

가르침일까 하는 회의가 든 리델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번 원정이

빨리 끝나기만 기도할 뿐 달리 할 일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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