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난 6월 초 죠슈번의 불온한 움직임을 간파한 막부는 다시 한 번 죠슈번에 대한
무력사용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2차 죠슈번 정벌이다.
지난해(1865년), 번주인 모리 요시지까의 굴욕적인 항복 선언이 있고 나서,
죠슈번에서는 다까스끼 신사쿠(高杉普作 たかすぎしんさく) 등의 주도로 그동안 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를 타도하고, 새롭게 토막파(討幕派)가 득세하여 막부에
대한 전의를 가다듬고 있었고, 이런 죠슈번의 불온한 움직임을 좌시하고 있을 막부가
아니었다.
영ㆍ미 연합함대가 몰살당하고, 법국이 코친차이나와 조선 문제 때문에 왜국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애초에 4개국이 주장했던 개세약허의 칙허와
관세의 인하, 효고항의 개항같은 것들이 저절로 물거품으로 사라진 이 때, 막부는
어느 때보다 정국주도의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1854년 미국(米國)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하고 나서 정국변화의 회오리 속에
힘 한 번 제대로 못쓰고, 권위는 땅에 떨어져, 막부 성립이래 가장 나약한 막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예전의 막부가 아니었다. 1차 죠슈번 정벌이 끝나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한 막부는 이번 기회에 더 이상의
토막운동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여, 죠슈번의 불온한 움직임을 기화로 그
힘을 만방에 보여줘 실추된 권위를 되찾기 위해 2차 죠슈번 정벌(征伐)을 결정했다.
죠슈번 정벌을 결정한 막부는 1866년 6월 7일 해군을 동원하여 죠슈번의
시모노세키를 포격하는 것으로 정벌의 서막(序幕)을 열었다. 대집정(大執政)
오가사와라 나가미찌를 정벌군 총대장으로 임명한 막부는 해군을 이용하여
시모노세키를 포격하였고, 육군을 이용하여 죠슈번 지역으로 진격했다. 막부의
해군은 충분히 제 몫을 다했다. 비록 후지야마호를 비롯한 두 척을 조선의
쥬신상사에 팔아 넘겼다고는 하지만 10년의 세월 동안 키워온 해군은 죠슈번의
구닥다리 해군과 비교할 수 없었다.
당초 허약할 것으로 예상됐던 해군과 달리 막강하리라 예상했던 육군은 연전연패했다.
새롭게 등장한 다까스끼의 지도아래 죠슈번은 지난 1년 동안 절치부심(切齒腐心)
힘을 길러온 상태였다. 새롭게 군감(軍監)으로 취임한 야마가다 교스께를 비롯한
후꾸다 교헤이, 미요시 군다로, 도끼야마 나오도, 야마다 호스께, 이또 쓘스께 등
하층민 출신의 등용으로 인해 패배주의에 사로잡혔던 군대의 분위기를 정열이 넘치는
군대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고, 여기에 쥬신상사를 통해 조선에서 몰래 구입한
양식보총이 힘을 실어줬다.
죠슈번 지역으로 진격한 막부군은 죠슈군 군감 야마가다에게 패하더니, 급기야는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죠슈군의 힘을 과소 평가한데다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던 사쓰마번이 이번 정벌에 불참함으로써, 지난 1차 죠슈번 정벌 때보다
실질적으로 군사력이 감소한 것이 원인이었다.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한 죠슈군은
즉시 막부가 관할하던 지역으로 쳐들어가 막부의 조력자 중 하나였던 하마다번의
하마다 성을 포위하고 7월 18일에는 하마다 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오사까 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죠슈군의 승승장구는 얼마가지 않았다. 일단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세토
내해를 통하거나 끼고 진격할 수 없었던 죠슈군은 육로로 진격하는데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7월 27일 구마모또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죠슈군은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죠슈군의 사기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주저앉기에는
그동안 죠슈번이 받았던 설움이 너무 컸으며 사쓰마번과 아이즈번 그리고 막부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깊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죠슈군은 오사까 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는데 바로 고꾸라 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때가 8월
2일이었다.
그러나 죠슈군의 육군이 이렇게 막강했지만 해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였기에 어려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고, 해군은 막부군이 막강했지만 전쟁의 승패를 실질적으로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 양측의 딜레마였다. 한 마디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해군이 막강한 막부군은 해군력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세토 내해에서 육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죠슈군의 진격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고, 해군이 전무하다시피 한
죠슈군에서는 오사까 성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세토 내해의 제해권 장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육로로의 접근밖에 할 수 없었고, 양측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쉽게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수 없는 교착상태가 된 것이다. 이때가 조선을
침범한 법국함대가 물러날 즈음인 8월 21일이었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사까모도 료마의 해원대와 사이고의 사쓰마번의 지원을 받은
죠슈번 해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고, 막부의 장군 이에모찌가
사망함으로써 후임 장군이 되는 요시노부의 주도로 휴전이 성사되겠지만, 료마와
사이고가 죽고 없어진 요즘 사쓰마번과 죠슈번의 동맹이 성립되지도 못하였고,
조선에서 제공한 항 결핵제 덕분에 장군 이에모찌가 죽지도 않았기에 역사는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윤 공사,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막부의 구리모도 죠운은 2차 죠슈번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부랴부랴 나가사끼의 조선공사관을 방문했다. 구리모도는 윤정우의 방에
들이닥치자마자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구리모도 공(公)."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요? 어떻게 조선이 우리 막부에게 이렇게 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
구리모도는 윤정우의 능글맞은 얼굴에 침이라도 뱉을 기세였다. 양식보총으로 무장한
죠슈번 군사들에 의해 파죽지세로 밀리다 겨우 전선을 고착화시킬 수 있었기에 그런
구리모도의 심정은 정말이지 윤정우를 찢어 죽일 수만 있다면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조선에서 죠슈번에 양식보총을 판매할 수 있다는 말이오?"
"예? 죠슈번에 양식보총을 팔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의 윤정우가
그런 상태였다. 대외적으로는 모든 무기의 판매권을 쥬신상사가 인수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 조정에서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윤정우도 이미
쥬신상사가 죠슈번에 양식보총 1만 정과 200만 발이 넘는 총탄을 판매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미 막부에서도 쥬신상사가 판매권을
인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그럼, 공사께서는 이 일을 모르고 계셨다는 말씀이시오?"
"정말이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공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국(我國)
조정에서 무기 판매권을 쥬신상사에 넘긴 것을요.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 끙..."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국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진상 조사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로 밝혀질 경우에 쥬신상사에 부여한 무기 판매권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윤정우가 이렇게 버티자 구리모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구리모도를 보며 윤정우는
다시 말한다.
"그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끙..."
죠슈번에 양식보총을 판매한 일은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미 지난 일로 양국의 화기(
和氣)를 깨트릴 수는 없었다. 구리모도는 막부의 또 다른 대집정 오구리
다다마사로부터의 밀명(密命)을 성사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선공사관을 방문한 것도 그 밀명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 밀명의 성사가
더 중요했다.
"... 윤 공사..."
"말씀하시지요."
구리모도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지만 말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품을 물면서 상대방에게 달려들다가 갑자기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구리모도는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연다.
"공사께서도 지금 아국의 사정을 잘 아실 것으로 믿소이다."
"... 예..."
"아시다시피 우리 막부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상태요. 해군은 그럭저럭 선전(
善戰)하고 있다고 하지만 육군은 죠슈군에게 밀리고 있는 실정이오. 요시노부 공이
필사적으로 막아 전선을 고착화(固着化) 시켰다고는 하지만 언제 그 전선이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음..."
"그래서 하는 말이오만... 귀국에서 우리 막부를 좀 도와줬으면 싶소이다."
"도와달라고요?"
"그렇소이다."
"... 음...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양식보총이 좀 더 필요한가요? 아니면
총탄이 필요한가요?"
윤정우는 구리모도가 필요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짐짓 모르는 일인양 말을 했다. 이른바 어르고 뺨치는 격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
구리모도는 자꾸 더듬거리고 있었다.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기에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야 했다.
"사실 우리 막부에서 필요한 것은 귀국의 우수한 화기(火器)가 아니라 귀국의 군대가
필요하오이다."
"아국의 군대요?"
"그렇소. 우리 막부를 위해 귀국 조정에 출병(出兵)을 요청해주시오."
"... 음..."
윤정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막부뿐만 아니라 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공관에서도 법국의 조선 침공은 기정 사실화 되어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법국이 선교사의 죽음과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조선을 침공한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또한 요코하마 주재 법국공사관의 경비병력까지 참전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사실 저도 귀 막부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아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법국함대가 이미 한 차례 아국을 침범하여 아국의
수도까지 위협했다는 전문을 받은 일이 바로 어제였습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소이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국 조정도 지금 초비상입니다. 그리고 법국 요코하마공사관의
경비병력까지 아국을 침공하는 대열에 합류하기 위한 준비로 부산하다는 얘기까지
있으니,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구리모도는 깜짝 놀랐다. 청국에 있는 서양 제국(諸國)의 외교관이라면 이미 한 차례
법국함대가 조선을 침범했다 돌아온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왜국에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구리모도의 놀라움은 컸다.
애초에 구리모도가 대집정 오구리 다다마사로부터 받은 밀명은 간단했다. 조선에
출병을 청하라는 것이다. 만약 조선의 출병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전통적으로 막부를
후원해 주었던 법국의 힘을 빌리는 방법이 차선책으로 모색되었다. 그러나 법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인다면 최선책은 물론이고 차선책도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으니 구리모도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이 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법국함대를 물리친 다음에라도 출병해 줄 수 있겠소이까?"
"음... 아마도 그것은 가능할 듯 싶습니다."
막상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생각이 들었는데, 윤정우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듣자 구리모도는 의구심이 들었다. 청국도 물리치지 못한 법국의
함대를 하찮은 조선이 어떻게 물리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런 구리모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정우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잇는다.
"만약 아국의 군대가 귀 막부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다면 귀 막부 측에서는
아국에게 무엇을 내 놓겠습니까? 설마 그냥 출병해 달라는 것은 아닐테고..."
"음... 사실 귀국이 출병해 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죠슈번을 무찌를 수만 있다면,
아국에서는 북해도(北海島)를 할양할 용의가 있소이다."
"호-오... 북해도를요?"
"그렇소이다. 이미 대집정 오구리 공의 승낙도 받아놓은 상태이고 장군의 내락(內諾)
도 받아놓은 일이오이다."
대집정 오구리 다다마사는 죠슈번을 무찌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시는 왜국에
토막운동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북해도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내 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선에서 제공한 항 결핵제로 병세가 호전된 장군 이에모찌의
감사한 마음까지 있었으니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오구리
다다마사는 법국의 힘을 빌리는 조건으로 북해도를 할양할 생각을 했었는데, 뒤바뀐
역사에서도 그런 근성은 쉽게 버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귀 막부의 제안을 아국 조정에 품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