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서 오세요, 두 분 대감."
한가위가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운현궁 아재당에서 김병국과 신헌을 기다리던 김영훈은 그런 서늘한 바람을 즐기는
것인지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합하, 신들을 찾으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제가 두 분을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시온지...?"
김병국과 신헌은 아침부터 김영훈이 찾는다는 기별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등청(
登廳) 전에 각자의 집으로 들이닥친 운현궁의 집사는 김영훈이 찾는다는 말과 함께
가벼운 차림으로 오시라는 말까지 함께 전달하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김영훈의 기별을 전해듣고 또 괴벽(怪癖)이 도지신 것인가, 아니면 무슨 문책할 일이
있으신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가벼운 경장차림으로 서둘러 말을 몰아 달려왔다.
"별 것 아닙니다. 그저 법국의 침공을 대비하는 의미에서..."
"...?"
"...?"
김영훈의 입에서 법국함대가 언급되자 김병국과 신헌은 긴장했다. 언제고 한 번은
언급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국방에 관한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는 두 사람만을 따로
불렀기에 그 긴장의 강도는 상당했다. 그리고 당시 한강유역에 침입한 법국함대를
피해 도성을 빠져나가던 사대부(士大夫)들이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이유로 철퇴를
맞았기에 두 사람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지난 7월 평안도 일대와 대동강 유역, 그리고 평양부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미국(米國)
해적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조선 측에서 평양부민 3명과 조선군 4명이 죽거나
상했고, 제너럴 셔먼호에 타고 있던 선주 프레스톤 이하 모든 승무원들이 몰살을
당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의 선체와 노획한 전리품들은
서울로 이송되어 운현궁으로 보내졌다. 나중을 위해 제너럴 셔먼호의 좌초 당시의
모습이나 죽은 승무원들의 모습은 대정원에서 파견된 요원의 손에 의해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되어 역시 운현궁으로 보내졌다.
이 필름은 다시 흑백사진으로 현상되어 미국과의 분쟁 시에 증거자료로 사용될
것이다.
한동안 평안도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양선(異樣船) 사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법국의 함대가 조선으로 몰려왔다.
청국 천진에서 조선에서 탈출한 선교사 리델(Felex Clau Ridel, 李福明) 등을 접견한
법국의 청국 주재 대리공사 벨로네(Claude Henri Marie Bellonet, 伯洛內, 白龍納)는
7월 13일에 청국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 보낸 조회에서 자국
선교사의 죽음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선왕국(王國)은 일찍이 속국(屬國)으로 청국제국(淸國帝國)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이 야만적 행위로 인해 영원히 청국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청국정부는
조선에 대해 권한도 권리도 없음을 본인에게 수차 선언하였고 이러한 구실 하에 이
나라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적용하고, 우리 선교사에게 우리가 요청한 여권을
발부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선언을 기록해 두었고, 이제, 조선왕국에 대한 청국정부의 아무런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우리 함대는 며칠 안으로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할 것이며, 우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폐하만이 조선과 그
공석이 된 왕위를 처리할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후략...
"
이렇게 선언한 벨로네 대리공사는 그동안 코친 차이나에서의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느라 움직일 수 없었던 무력을 사용할 것을 천명하고 코친차이나에서 돌아온
법국 코친차이나(Cochin China)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 Gustavus
Rose) 제독으로 하여금 조선을 정벌할 것을 명령했다. 벨로네 대리공사의 명령을
받은 로즈 제독은 일단 자국의 해군성에 이 문제에 대한 처리방법을 묻는 전문을
보냈다.
"이번에 우리 동국인(同國人)이 희생되었고, 왕명(王命)에 의해 집행된 폭행에 대해
단호한 보상 없이 버려 두지 말아야 할 것은 필연적인 일인 듯 합니다."
이런 로즈 소장의 전문에 대해 해군성으로부터의 답신이 9월 초에 도착했다.
해군성으로부터의 명령에 의거하여 로즈 제독은 먼저 조선의 상세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위력정찰(威力偵察)을 실시하기로 하고, 순양함(巡洋艦) 프리모게(Primaugue)
포함 타르디프(Taridif) 통신보급함(通信補給艦) 데룰레데(Deroulede) 등 3척을
이끌고 청국 산동성 지부(芝 )를 출발하여 조선의 강화도로 향했다. 이때가 병인년(
丙寅年1866년) 8월 10일이었다.
지부를 출발한 법국함대는 8월 16일 부평부 물치도(勿淄島 지금의 작약도) 앞
바다까지 진출하였다. 부평부사(富平府使) 조병로와 영종첨사(永宗僉使) 심영규는
법국함대를 찾아가 문정코자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문정을 거절한 로즈 제독은
물치도 앞 바다에 기함(旗艦)인 프리모게를 정박시킨 채로 타르디프와 데룰레데만을
이끌고 강화해협을 통과하여 한강에 진출했다. 한강 유역에 진출한 법국함대는
행주산성에서 조선 측이 설치한 강력한 포대의 공격을 받고 더 이상 항행을 하지
못하고 다시 물치도로 철수했다. 로즈 제독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 리델
선교사는 하함(下艦)하여 선교사들과 천주교도들에 대한 자세한 근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평양에 침범한 이양선 한 척이 격침되었다는 소문과
여전히 많은 천주교도들이 탄압을 받고 있다는 막연한 소식만 듣고 다시 승함(乘艦)
할 수밖에 없었다.
행주산성에서 포격을 받고 퇴각한 로즈 제독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서울을
공략한 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물치도로 돌아와 전 함대를 이끌고 음력
8월 22일에 청국으로 돌아갔다.
"법국의 침공을 대비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저와 대정원장 대감과 두 분 대감, 이렇게
넷이서 가볼 데가 있습니다."
"가볼 데라 하오시면...?"
"강화도에 한 번 가봅시다."
"알겠사옵니다, 합하."
법국함대가 물러간지 이제 겨우 열흘 남짓 되었을 뿐이라 당연히 그 문제를 언급할
것으로 예상하고 극도로 긴장한 두 사람은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김병국과 신헌은 김영훈의 괴벽을 알고 있었다. 가끔씩 소수의 수행원들만 대동하고
남양의 해군사령부로, 남한산성의 친위천군 사령부로, 또는 건교부가 시행하고 있는
토목공사현장으로, 불쑥불쑥 방문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평상시의 근무태도가 우수한
곳이나 공사의 진행이 빈틈없는 곳은 부대장 이하 사병들, 또는 공사 관계자와
노무자들까지 포상을 하거나, 아니면 한 바탕 푸짐하게 대접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렇게 지출되는 돈은 모조리 김영훈 자신의 사비에서 나갔다. 그러나
반대로 근무태도가 불성실하거나 훈련이 미비한 부대, 또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공사현장은, 책임자를 가차없이 문책하였으니, 공사와 논공행상이 분명한
처신으로, 일반 군사들이나 노무자들에게는 섭정공 합하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열렬한 성원과 지지를 보내고 있었으며, 부대의 지휘관이나
공사의 책임자들은 언제 김영훈 일행이 들이닥칠지 몰라 한치의 소홀함이나 태만도
부리지 못했으니, 기호일대의 단위부대나 토목공사현장은 그야말로 전례의 악습이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지방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지방으로는 김영훈 일행이 자주 나가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대정원에서 파견한
암행어사가 언제 자신의 관할 고을이나 부대를 점검할지 알 수 없었기에 지방 관아의
수령이나 지방군의 부대장들도 자신의 맡은바 직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