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44화 (141/318)

7.

지난 해 11월에 벌어진 영ㆍ미 연합함대의 참사는 엄청난 충격을 서양제국(諸國)에게

안겨줬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왜국의 막부에서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철저한 수색을 했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바다에 떠오른

시체들을 수거하여 장사를 지내는 일 정도였다. 덕분에 영ㆍ미 양국의 외교관들만

죽어났다.

본국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문(電文)이 날아오거나, 아니면 특사를 파견하여 사건

진상에 대한 것을 닦달했지만 그들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인들의 말처럼 유령이 저질렀다는 말도 있었고, 아니면 강력한 해적에 의해

몰살당했으리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해적이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기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 해적이라니...

아무런 단서의 발견도 없이 몇 달의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도 차츰 잊혀져 갔지만,

영ㆍ미 양국 외교관들까지 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의 공관에서는 행여

이와 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해군뿐만 아니라 민간의 각 선박과

선주들에게 공문을 내려보내 선박의 운항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ㆍ미 연합함대의 몰살 사건이 워낙 파장인 큰 사건이고, 왜국에 주재하고

있는 모든 서양 외교관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보니, 함부로 막부에 생떼를 쓸

수도 없었다.

또한 영ㆍ미 양국의 외교관들도 왜국에서 연합함대의 몰살과 같은 대담한 일을

저지를만한 배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니 설사 배포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와 같은 일을 벌일만한 무력(武力)이 없는 왜국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국의 막부는 막부대로 애가 닳아 있었다. 영ㆍ미 연합함대가 몰살당한 것은 왜국의

입장에서는 통쾌하고 기쁜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 중신들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환호하거나, 기뻐할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서양의 강대한 두 나라의 함대가 몰살당한 사건은, 그것도 왜국의 해역에서 몰살당한

사건은 막부로서는 골치 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막부에서는 구리모도 죠운을 위문사절단의 대표로 임명하여 영ㆍ미 양국 관계자들을

위문했고, 이번 사건과 왜국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극구 부인하기는 했지만, 영ㆍ미

양국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왜국만을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곤혹스러운 것은 영ㆍ미 양국의

외교관들과 막부의 중신들뿐이었다.

조선에서 모내기가 한참일 음력 4월 말에 상하(常夏)의 도시 나가사끼는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가사끼 항에는 서양 각 국의 배가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것이

정신이 없었으며, 왜국의 배들도 여러 가지 수입품들을 전국으로 실어 나르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가사끼 항에 두 명의 젊은이가

나타났다. 아니 두 명의 젊은이를 태운 기선이 나가사끼에 기항했다고 해야 옳으리라.

오무라번의 문장을 마스트에 달고 있는 기선은 초라한 외관과 볼품 없는 모양새로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이노우에, 여기는 나가사끼다. 행동에 각별한 주위가 요구된다."

"알고 있다. 이또."

이노우에라고 불린 청년은 이또의 딱딱하면서도 위압적인 말에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무라번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은 나가사끼 항을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걷는 이또에 비해 이노우에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것이

나가사끼가 초행임에 분명했다.

"이또. 지금 어디로 가는가?"

"오우라(大甫) 해안가의 글로버 상회에 간다."

"이봐, 이또!"

"왜?"

"나가사끼는 여자 값이 싸다는 거야. 그리고 이곳의 유녀(遊女)들은 얼굴이

예쁘기로는 우리 왜국의 삼대 유곽촌(遊廓村)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소문이다.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가 뻐근하지 않냐?"

"그래서...?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이노우에는 이또의 서슬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 이노우에를 보며 이또가 다시 낮고

힘있게 말한다.

"이봐, 이노우에. 우리는 여자를 품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무기를

사러왔단 말이다. 무기! 알아듣겠나? 이노우에!"

"... 알았다.... 하지만..."

"우선 무기를 산 다음에 마루야마 유곽촌에 가도록 하자. 우리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사끼에 온 이유가 뭔가? 바로 무기 때문이지 않는가?"

"알았다. 그런데 무기를 구입한 다음에는 꼭 유곽촌에 가야한다. 약속했다."

"좋다, 약속했다."

이노우에와 이또는 나가사끼에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잠입했다고 했다. 오무라번의

무사들이라면 왜왕 측근의 번이라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이렇게 잠입까지 할

이유가 없을 것인데, 이 두 사람은 잠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오무라번의

무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이또. 글로버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너나나나 그 사람 덕분에 영국에

밀입국할 수 있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걱정이다."

"걱정하지 마라, 이노우에. 나도 비록 글로버라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번국에서 파악한 바로는 그 사람이 조선의 쥬신상사라는 곳의 도움을 받아 글로버

상회를 제건 했다고 했으니,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조선의 무기를 구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글로버라는 사람은 우리가 영국에 밀입국할

때 선편을 주선해준 사람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리고 우리가 선금을 준비해 온 이상

저들은 우리에게 무기를 팔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잘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잘돼야 한다. 반드시 무기를 구입해야 우리 번국이 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또의 얼굴은 알 수 없는 결의로 충만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의 양식보총이라는 후장식 소총을 구입해야만 번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번국의 땅을 밟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오우라 해안가의 글로버 상회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있던

글로버 상회가 머세슨 상회에 의해 망한 후로, 새로 설립된 글로버 상회는

쥬신상사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쥬신상사는 나가사끼의

왜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업(盛業) 중에 있었기에 수월하게 찾아올

수 있었다.

"누구슈?"

정운두의 사는 낙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밤에 마루야마 유곽촌에 놀러 가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처럼 한가한 시간에 대로변에 의자를 펼쳐놓고 앉아

지나가는 왜녀들이나 외국여인들의 잘록한 허리와 살랑거리는 궁둥이를 훔쳐보는

것이다. 그런 정운두였기에 지금처럼 한가한 오후에 자신의 취미생활을 방해하는

이방인이 썩 달갑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청국으로 수출하는 우레시노 차의 선적문제로 한 바탕 난리 굿을 치르고

난 후라 꿀맛같이 달콤한 휴식과 취미활동을 방해하는 허름한 하까마 차림의 두

사람이 달가울 리 만무했다. 그래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방해한 상대방에게 내뱉는

말도 자연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글로버 상회가 맞습니까?"

"그렇소만..."

이제 왜국에서 생활한지 1년이 넘어 어느 정도 왜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정운두였기에 이또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글로버씨를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

"토마스를?"

이또는 눈앞의 조선사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런 내색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글로버 상회에서 일하는 조선사람 비슷하게 생겼는데,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비유가 뒤틀렸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 토마스는 이곳에 없으니까 나한테 말해보슈. 내가 이곳의 책임자요."

"아! 그렇습니까? ... 헌데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드리면 안되겠습니까? 여기는

사람들의 이목이 번다(煩多)한 곳이라서리..."

"그럽시다."

이미 취미생활을 즐기기에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선선히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하는

정운두였다. 아니 그 보다는 뭔가 돈 냄새를 맡고 두 사람을 안내하는지도 몰랐다.

글로버 상회 안으로 들어온 이또와 이노우에는 적잖게 놀랐다. 설마 정말 앞의

같잖아 보이던 사내가 사장일 줄이야... 정운두는 일단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의 의자에 턱허니 앉았다.

"두 분은 어디에서 오신 누구 신데, 토마스를 찾으십니까?"

"아!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또 슌스께,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 이노우에

몬다라고 합니다. 죠슈번에서 왔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죠슈번에서 온 자들이었다. 이또 슌스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이또라는 하급무사의 양아들로 들어갔다. 그 뒤 평생의 스승인 요시다 쇼잉을

만나게 되고 그의 주선으로 상급무사 출신의 이노우에 몬다와 함께 죠슈번의 비밀

유학생으로 영국에까지 건너 갔다온 경력이 있는 자였다. 이또는 훗날 슌스께라는

이름을 히로부미로 개명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바로

이또 슌스께였다.

막부령인 규수의 나가사끼까지 온 것은 순전히 양식보총의 구입 때문이었고, 막부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래서 죠슈번의 문장을 달지 못하고 구차하게

오무라번의 문장을 달아야 했지만, 이렇게 라도 해서 양식보총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개인의 구차함은 감내할 각오를 하고 온 이또와 이노우에였다.

"예, 반갑습니다. 나는 글로버 상회의 책임자로 있는 정운두요, 헌데 죠슈번에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죠슈번이라... 죠슈번... 헌데 죠슈번 분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조선의 양식보총을 사러왔습니다."

"양식보총을요?"

"그렇습니다."

토마스가 자신의 누이와 함께 남아프리카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러 갔기에, 정운두

자신이 글로버 상회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 정운두가 왜국의 돌아가는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정운두도 왜국의 정치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은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 막부에

의해 토벌된 죠슈번은 그동안 번의 정권을 잡고 있던 중신들이 물러나고, 이제

새로운 토막파가 정권을 잡았다고 하더니 '드디어 막부와 한판 뜰려고 준비하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흠... 양식보총이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왕이면 1만 정 이상 구매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총탄도 100만발 이상 구매하고 싶습니다. 되겠습니까?"

"호... 그렇게나 많이요?"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물건을 파시겠습니까?"

이또와 이노우에는 비록 4개국 연합함대의 시모노세키 포격사건으로 중도에 영국에서

돌아와야 했지만, 영국 물을 먹어서 후장식 소총이 좋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제

리 앤필드 후장식 소총이나 법국제 미니에 후장식 소총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양식보총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 하여, 좀 무리를

해서라도 원하는 만큼의 양식보총과 총탄을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

막부에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지난 해 죠슈번의 토막파

지도자인 가쓰라 고고로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토막파의 잔챙이들이

살아남아 이렇게 막부에 대항하고 있었으니, 왜국의 정정(政情)은 갈수록 점입가경(

漸入佳境)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나 1만 정의 양식보총과 100만발의 총탄은 조금 기다리셔야 됩니다.

그리고 대금은 전액 황금으로, 그것도 선금으로 지급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정운두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죠슈번에서 온 놈들이라면 막부의

양식보총에 이미 혼이 날만큼 났으니, 그 위력과 성능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더 잘

알고있을 테고, 다른 서양의 후장식 소총이 있는데도 굳이 조선의 양식보총을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애가 닳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 정운두는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금은 바로 지금 드리겠습니다.

"지금요? 방금, 대금을 지금 지급하신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배에 지급대금이 있으니 바로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취미생활을 훼방놓은 건방진 왜놈들에게 물이나 먹이자는 심산으로 선금을

요구했었는데 이렇게되자 오히려 한 방 먹은 것은 정운두 자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한 방 먹었다고 대수일까? 엄청난 황금이 바로 들어오는데...

정운두는 어느새 자신의 취미생활을 훼방놓은 두 왜놈이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상담을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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