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어 대감, 그리고 위당 대감. 좁은 자리 때문에 불편하셨지요?"
"아니옵니다, 합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김병국과 신헌이 이렇게 겸양의 말을 했지만 김영훈은 알고 있었다. 오늘처럼 비좁은
자리에서 장시간 회의를 하는 것은 아무리 전제군주 시대의 신하들이라 할지라도
불편했으리라는 것을... 젊디젊은 한상덕이나, 김기현, 김종완 같은 이도 불편해
했는데, 하물며 나이 많은 노신(老臣)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물론 김병국과 신헌이
노신이라 할 만큼 나이가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자신들보다 훨씬 윗연배의
인물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우리 여기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잠시 산책이라도 하면서 바람도 쐬고, 신선한
공기도 좀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시지요."
김영훈이 이렇게 운을 떼자 네 사람은 김영훈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떻습니까? 한결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김영훈은 운현궁의 뒤뜰을 거닐며 이렇게 말했다. 가끔씩 몸이 찌뿌둥한지 어깨를
돌리기도 하고 목을 좌우로 움직이고 하는 모습이, 고지식한 양반 사대부나 완고한
유생들이 봤다면 채신머리없다고 혀를 차며 나무랐을 것이나, 이 나라 조선의 젊은
최고권력자의 소탈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김병국과 신헌은 신선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 저기 정자가 있군요. 우리 모두 정자에 앉아서 담소(談笑)나 나누시지요."
소담하게 생긴 정자는 각종 봄꽃이 화사하게 핀 주변 풍광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김영훈을 비롯한 일행이 정자에 자리잡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하인인지
아니면 변복(變服)한 대정원 요원인지 모를,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나더니, 쟁반에서 가벼운 다과(茶菓)를 내려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두 분 대감. 제가 흡연의 욕구를 참기 어려워서 그러는데 담배를 좀
태워도 되겠는지요?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우리 모두 다같이 담배를 태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김병국과 심헌은 김기현과 김종완이 김영훈이 권하는
궐련을 서슴없이 받아서 입으로 가져가는 것과는 반대로, 송구하고 황송한 마음에
고개를 외로 돌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김영훈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품속에서
지포발화기를 꺼내 불까지 붙여주었다.
후 하고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뿜은 김영훈은 먼저 신헌에게 입을 연다.
"위당 대감, 이번에 영식(令息)께서 국비 덕국(德國) 유학생으로 뽑히셨다지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미천한 신(臣)의 자식놈이 합하의 은덕으로 덕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사옵니다."
"영식에 대해서는 저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영식께서는 반드시 이 나라
조선의 간성(干城)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망극하옵니다, 합하."
김영훈은 이번에는 김병국에게 말머리를 돌린다.
"대감의 조카들도 두 명이나 덕국 유학생으로 뽑혔다지요?"
"송구하옵니다, 합하. 신의 사촌이었던 김병기와 김병필의 자식들이옵니다."
김병국은 김병기와 김병필의 자식인 김옥균과 김자중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가볍게
몸을 떨었다. 김병기와 김병필은 흥선을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위해할 목적으로
변란을 일으켜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그들의 자식들이 이렇게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덕국으로 유학까지 가게 되었으니, 혹시 그것 때문에 무슨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김영훈에게서
총애를 받아 국방대신이라는 감투를 쓰고는 있지만, 그리고 자신의 질녀(姪女)가 이
나라 조선의 중전마마라고는 하지만, 원죄(原罪)처럼 따라다니는 안동 김씨
일파였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제가 듣기론 두 조카의 나이가 가장 어린 축에 속하면서도 그 인품이나 학식이
출중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에게도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망극하옵니다, 합하."
잠시 두 대신의 자식과 조카 얘기를 함으로써 분위기를 환기시킨 김영훈은
김종완에게 묻는다.
"사령관, 대감. 아까 대감의 말씀을 듣고 한 가지 의심 가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합하."
"대감께서는 우리가 몰고 온 화물선 두 척을 분해하여 전함 20척을 건조할 수 있는
철을 확보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제가 해군과 선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자라 잘은 모르지만, 우리가 몰고 온 청해진함과 삼별초함은 말 그대로
컨테이너를 운반하는 화물선이라, 속은 텅 비었을 것인데, 그리고 해군 함선에서
말하는 배수량이라는 것은 전함과 승무원, 그리고 그 승무원이 사용할 물자와 총탄,
거기에다 엔진을 움직일 연료까지 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화물선의
배수량은 적재한 화물의 중량과 선박 자체의 중량을 합하는 것으로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속이 거의 텅 비다시피 한
화물선을 해체하여 다시 가공한다고 해도 대감의 말씀처럼 전함 20척을 건조할 철이
나오지도 않을 것 같은데, 아니 그렇습니까?"
김종완은 잠시 당황했다. 육군, 그것도 특전사 출신인 김영훈이 이렇게 정확하게
전함과 수송선의 배수량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고, 자신이 과장하여 말한
것 때문에 더 당황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일은 벌어지고 말았으니 일단 수습하고 볼
일이었다.
"합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이 조금 과장하여 말씀드린 것이지요. 아마도
청해진함과 삼별초함의 해체한 철을 다시 가공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한 두어 척이나
건조할 수 있는 철이 생산될 것이옵니다. 신은 그저 당분간 전함 건조 시, 필요한
철의 수급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린다는 것이 그렇게 과장되게 말씀드렸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합하."
김종완은 등에서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한국에서
김영훈과 자신의 계급은 겨우 한 단계뿐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
자신은 그저 일개 해군사령관의 신분이고 김영훈은 이 나라의 최고권력자의
신분이었다. 만약 다른 중신들이 이와 같은 실수, 또는 과장을 하는 일을 저질렀다면
당장 웃전을 기망(欺罔)하였다는 탄핵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처벌까지도 받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김영훈이 그와 같은 처벌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을 더 이상 문제삼지도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어디 그런 일로 대감을 나무라자고 하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대감의 충정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조선이 어디
철광석이 부족합니까? 아니면 기술이 부족합니까? 해체한 화물선의 철이 조금 적게
나왔다고 해도 하등 문제될 것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공하옵니다, 합하."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대감께서 이러시면 제가 오히려 미안합니다... 그런데
누구 혹시 우리 조선의 철광석 매장량에 대해서 알고 계신 분 있습니까? 아니,
무산광산의 총 매장량이 어느 정도 되는 지 아시는 분 없습니까?"
김영훈은 김종완의 입장을 생각해서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제가 알고 있사옵니다, 합하."
"아. 대정원장. 대감. 말씀해보세요."
"제가 알기로는 함경도 무산광산의 철광석 매장량은 추정매장량 30억 톤, 가채(可採)
매장량이 13억 톤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습니다. 대정원장 대감의 말씀이 맞아요. 무산광산은 채굴 가능한 가채
매장량이 무려 13억 톤에 이릅니다. 13억 톤. 어마어마하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무산광산의 철광석이 대부분 노천에서 땅만 파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철광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조선이 전함 건조에 필요한 철광석 조달이 무에
어렵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사령관 대감은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
김종완은 김영훈이 이렇게 무산광산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변호하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저 송구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대정원장, 대감. 올해 완공될 해주제철소는 일관 제철소라고 그랬죠?"
"그렇사옵니다, 합하. 선철을 제조하는 단계부터, 제철, 제강, 압연가공 등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관 제철소이옵니다. 일관 제철소는 열효율을 높이고 운반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산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등 경영상 유리한 점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잘됐군요."
김종완을 변호한 것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김영훈은 본격적으로 네
사람을 따로 부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대정원장, 대감. 일전에 충청도 서해안에 도착한 유태계 덕국 상인 오페르트와
천주교 신자들과의 일은 잘 마무리 됐다고 했지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지난 2월 11일 충청도 평산진과 해미현에 나타난 것을 보고
받았고, 그때 숨어있는 천주교 선교사들과 저들이 접촉하여 청국으로 밀입국한 것을
확인했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오페... 머시라고 하는 상인은 누구이며, 또 그자가
숨어있는 천주학 쟁이들과 접촉해서 청국으로 밀입국했다니요? 좀 자세히
말씀해주시오, 대감."
김병국은 처음 듣는 말에 호기심을 나타내며 한상덕에게 물었다. 그런 궁금증은 옆에
있는 신헌도 마찬가지였으니, 두 사람은 그저 한상덕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실은 지난 2월 11일 해미 현감 김응집으로부터 장계(狀啓)가 왔었습니다. 장계에
따르면 오페르트라고 하는 덕국 상인이 우리 조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 해미로
상륙했다고 합니다."(*1)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요?"
"아니! 이런 변이 있나? 그 덕국 상인이라는 자는 우리 조선이 청국과 왜국과의
무역을 시작하면서 양국 국적의 배라면, 그 배가 비록 이양선이라 할지라도 개항장(
開港場)에 자유로운 기항(寄港)과 무역을 허용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의당 조정에 알려 공론에 부쳤어야지 어찌 여태
숨기고만 있었다는 말이오이까?"
신헌이 그냥 궁금함을 피력하는 것에 그친 반면에 김병국은 국방을 책임지는
대신답게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김병국이
이렇게 역정을 내자 김영훈이 나서며 김병국의 화를 진화한다.
"영어 대감, 고정하세요. 그 일은 모두 제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조치한 겝니다. 오해하시지 마세요. 그래서 이렇게 두 분께 따로 알리는 것이
아닙니까?"
"음..."
김병국은 화가 나기도 했지만 김영훈이 이렇게 사과의 뜻을 나타내자 많이
누그러졌다. 더구나 다른 중신들은 부르지 않고 자신과 신헌만을 불러 이렇게 알리는
것에 일종의 선민의식 같은 것도 느끼고 있었고, 김영훈이 그렇게 행한 이유가
궁금했다.
지난 해 있었던 변란의 소용돌이에서 몸을 피한 3명의 천주교 선교사들과 그들을
돕는 조선인 천주교도들은, 서울에서 무려 백 명이 넘는 역모 가담자들이 참수되고,
그 중에는 남종삼과 정의배, 홍봉주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끼어 있는 것에 경악했다.
더구나 매일같이 나머지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참수하라는 유림의 상소가 빗발쳤고,
실제로 새해부터 그들을 참수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자 더욱 몸을 움츠렸다.
새해가 되자 결국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
8000여명이 절두산에서 목이 잘렸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그리고 자신들을 찾는
수사관들의 포위망이 서서히 좁혀드는 것을 느낀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 몇은, 결국
충청도 해미 인근의 바닷가 야산으로 도피하면서 청국으로 밀입국할 배를 수소문하게
되었다. 그러다 2월 11일 해미의 조금진(津)에 상륙한 오페르트의 도움으로 청국으로
밀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천주교 선교사들과 신자들, 그리고 오페르트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의 만남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상덕이
지휘하는 대정원 요원들과 경무청의 수사관들은 천주교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마치
토끼몰이 하듯이 한 곳으로 몰았는데 그곳이 바로 충청도 해미였다. 오페르트가
그곳에 상륙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과 접촉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해미 현감인 김응집도 대정원의 지시를 받아 일부러 양자의 접촉과
밀입국을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마지막으로 해군에서는 이미 오페르트가 타고 온
영국 국적의 기범선 로나호의 일거수 일투족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하고
있었으면서도 저들이 청국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천주교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오페르트를 만나 청국으로 밀입국할 수
있었던 것은 대정원과 해군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북경주재 조선공사 오경석이나 대정원 요원들의 보고는 없었지만 시기적으로 이미
저들은 법국의 북경주재 대리공사 벨로네(Bellonnet, Claude Henri Marie, 伯洛內,
白龍納)와 접촉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북경에 있는 오경석이나 우리 요원들이
조정에 보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육로로나 해로로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늦어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면, 저들의 군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좀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합하."
"이유는...?"
"그 이유는 아직 법국의 아시아함대는 아직 코친 차이나에서 벌어진 원주민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대로라면 올해
7월이나 되야 완전한 반란의 진압이 이루어지게 되옵니다. 아마도 그 반란이 완전히
진압한 연후에 우리 조선으로 침공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저들의 침공(侵攻)은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9월 정도 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사옵니다."
"... 음..."
김병국과 신헌은 지금 정신이 없었다. 법국의 조선 침공을 유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선교사들과 덕국의 상인과의 접선을 유도했다는 말을 듣고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법국의 침공 예정일까지 태연하게 거론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
배포에 다시 한 번 입이 다물어졌다.
"합하, 신이 듣기로 일부러 법국의 침공을 유도하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하셨는데 그
연유가 무엇이오이까?"
김병국은 입맛이 썼지만 이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저들은 어떤 이유를 걸어서라도 우리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덕국과 수교를 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대외적으로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비밀 수교입니다. 아직은 청국도 우리와 덕국의 수교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더더욱 모르고 있지요. 제가 덕국과의 수교에 있어서 굳이
내년 이후에 수교 사실의 대외적인 공표와 공관의 교환설치를 삽입하고 관철시킨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올해는 저들 법국에서 어떻게든 우리 조선을 침공하려고 할
겝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들의 침공을 물리친 연후에 당당하게 국제사회에 발걸음을
내딛을 생각이구요."
"하오나, 합하. 굳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우리 조선이 국제 사회에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사옵니까?"
김병국은 거듭해서 물었다. 딴에는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덕국과의
수교처럼 평화적으로 또 평등하게 수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양인이라는 인종이 어떤 인종인지 모르는 것에서 오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동양인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서양인들이 얼씨구나 하고 손을 덥석 잡겠다... 이런
생각을 김종완은 하고 있지만 김영훈이 어련히 알아서 잘 설명할 것이라 잠자코
있었다.
"대감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 동양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우리 동양권의 여러 나라들을 개항시켰을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저들은 절대 평화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에
북경주재 영국대리공사 웨이드(Wade, Sir Thomas, 威妥瑪)의 청국 총리아문으로 보낸
조회(照會) 잊으셨습니까?"
"아..."
1865년 10월말에 북경주재 영국대리공사 웨이드는 청국 총리아문으로 보낸 조회에서
영국군함의 청국 북방지역 해안 및 조선 해안 탐사계획을 통보하면서, 특히 안남(
安南)의 실례를 들어 조선을 겨냥해서 "태서이동각국(泰西以東各國 동양의 제국(諸國)
을 칭함)에서 해금(海禁)을 이유로 군사력이 막강한 태서각국(泰西各國 서양의 제국(
諸國)을 칭함)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나라의 멸망 또는 분할점령과 같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국에서 조선 측으로 이번
탐사행동에 나선 영국군함의 식품구매요청 등을 거부하지 말도록 권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비록 영국함대의 청국 북방지역 해안 및 조선 해안의 탐사계획이 왜국에서 일어난
영ㆍ미 연합함대의 몰살로 실현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에서는 상당한 불쾌감과
더불어, 청국 조정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리고 청국은 더 이상 우리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서양 제국(諸國)에 내세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그 일이 증거이며, 앞으로 법국함대가 우리
조선을 침공할 때 청국 조정의 무능력함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겝니다. 저는
이것을 기화로 청국과의 사대(事大) 관계를 확실하게 청산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선이 당당한 자주국이며 주권국임을 대외에 선포할 생각입니다."
"아..."
"...예..."
김병국과 신헌은 가슴이 벌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뭔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가슴이 벅찼으며, 더 이상 사대외교를 펼치지
않고 자주국임을 대외에 천명한다는 김영훈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영어 대감."
"하교하시옵소서, 합하."
"지금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총 병력이 얼마나 되지요? 그리고 지휘관은
누구입니까?"
"강화도에서는 양헌수가 지휘하는 친위천군의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양헌수 대령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훈련상태는 완벽하겠지요?"
"물론입니다, 합하. 양헌수 대령은 우리 조선군관 중에서도 발군의 지휘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믿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한식보총(韓式步銃)
과 한(韓)-4198식 기관총, 유탄발사기와 박격포의 지급이 전(全) 중앙군에 완료된
시점에서 우리 조선 육군을 대적할 상대는 이 지구상에 없을 것이옵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김병국의 장담에 좌중의 인물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으니, 자신감이 물씬 묻어나고
있었다. 하기야 중앙의 근위천군과 친위천군의 모든 군사들에게는 한식보총의 지급이
완료되었으며, 한-4198식 기관총과 유탄발사기는 분대당 1정씩 지급이 됐고,
박격포는 연대단위로 1개 대대의 박격포병이 편성되어 있었기에, 비록 야포(野砲)의
개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포병이 없다손 치더라도, 서양의 어느 나라 육군과
비교해도 월등한 화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군사들의 실전경험이 전무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우수한 화기와 피나는 훈련으로
충분히 상쇄(相殺)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김종완 대감이 이끄시는 해군이 있는데 저들이 과연 우리 조선에 발을
붙일 수나 있겠습니까?"
신헌은 해군에서 알아서 적 함대를 격멸(擊滅)할 것인데 육군이 과연 할 일이 있을
것이냐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대감. 우리 해군은 법국의 함대가 침공한다고 해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그럼, 저들의 군대가 그냥 상륙하도록 놔두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대감. 우리 해군은 법국의 군대가 강화도에 다 상륙하면 그때서야
움직일 생각입니다."
김종완의 말이 끝나자 신헌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법국의 군대가 고스란히 상륙할 수
있도록 놔둔다? 왜? 한참을 골머리를 앓던 신헌은 김영훈이 아까 회의에서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아--- 혹시, 그럼...?"
"그렇습니다. 법국의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고 비어있는 법국함대의 전함들을
탈취할 생각입니다."
"아... 묘수(妙手)입니다. 정말 묘수입니다."
김종완과 신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김병국이 그때서야 이해를 한 모양이다.
이미 양무함과 건무함을 탈취한 경력이 있는 해군에서 법국의 전함이라고 탈취하지
못할까... 잠시 웃고 있던 김병국은 김종완에게 한 가지를 더 묻는다.
"법국의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지 않고 한강을 통해 서울로 직접 올라온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우리 해군이 한강까지 직접 저들의 함대를 쫓아올 생각이오이까?"
"영어 대감, 대감께서는 행주산성의 요새포(要塞砲)를 잊으셨습니까?"
"행주산성의 요새포요...? 아... 그 머시냐 양무함과 건무함에 원래 있던 영국과
미국의 대포요... 행주산성에 포대를 구축했다고 했지요... 이런 정신을 봤나..."
양무함의 원래 무장인 110파운드(7인치) 후장포 10문과 건무함의 주포인 11인치
후장포 14문은 올해 초에 모조리 행주산성의 포대로 배치되었다. 만일을 위해 한강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려는 외국의 함대를 요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행주포대는
수도방위의 최 첨병이나 다를 바 없는 곳으로 이곳의 무장이라면 법국의 함대가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얘기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신헌은 마음속의 궁금증을 피력했다.
"하온데, 합하..."
"예. 말씀하세요?"
"아까 말씀하셨던 왜국으로의 파병은 무슨 말씀이옵니까? 신은 당최 궁금해서..."
"하, 그거요. 대정원장 대감께서 설명해 주세요. 아무래도 위당 대감께 그 문제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오늘밤 잠을 못 이룰 것 같습니다. 하하하..."
신헌의 애가 닳은 모습에 김영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상덕에게 말해줄 것을
지시했다. 어차피 신헌이 묻지 않아도 국방대신 김병국과 합참차장 신헌에게는
말해줄 생각이었다.
"예, 합하. 두 분 대감께서도 왜국의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요..."
"두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왜국의 정정(政情)은 아주 불안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막부의 죠슈번 토벌이후에도 죠슈번이 그렇게 호락호락 막부에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있구요. 우리 대정원이 판단하기로는 저들 막부에서 그런 죠슈번을 다시 한 번
토벌할 것 같습니다."
"허면, 그때 우리 조선에서 병력을 파견해서 막부를 돕는다는 말씀이시오?"
"아닙니다, 위당 대감. 우리는 죠슈번에 무기를 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죠슈번이
승리하도록 말이지요."
"죠슈번에서 승리하면 막부의 정권이 위태로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김병국이 물었다. 김병국도 왜국의 정치상황이 조선의 이익에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요, 당연히 막부의 정권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때 우리 조선에서 병력을
파견해서 막부를 도와주는 겁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는 거지요."
"몇 가지 요구요?"
이번에는 김병국을 제치고 신헌이 물었다. 허-어 이것 참, 탁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쪽 저쪽에서 번 갈아서 묻는구나...
"우리는 저들이 쓸모 없는 땅으로 생각하고 있는 북해도(北海島)와 원래 우리 조선의
영토였던 대마도(對馬島)를 요구할 생각입니다."
"북해도와 대마도요?"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 북해도라고 해봤자, 겨우 10만 정도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을 뿐이고, 왜국에서는 북해도를 애조지(황무지라는 뜻)라고 부르면 일종의 죄를
지은 사람을 유배하는 유배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부에서도 북해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으니 우리에게 할양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문제는 대마도인데... 대마도야 임진왜란(壬辰倭亂) 전(前)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을 바치던 곳이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막부의 장군 이에모찌가 우리가 제공한 결핵 치료제로 인해 건강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우리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지금 막부가 기댈 곳은 우리
조선밖에는 없다는 말이 맞겠지요."
김병국과 신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도 엄청난 얘기를 쉽게 하는 한상덕의
간은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저렇듯 태연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재경대신 김기현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미 왜국에 공사관을 설립할 때부터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기는 했어도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두 분 대감께서는 우리 군의 임전태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하시고, 앞날에
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사옵니다, 합하."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그리고, 대정원장 대감."
"예, 합하."
"경흥 부사 이재화 박사는 러시아 동(東)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예프와 어느 정도의
유대관계가 생겼다고 했지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음... 그럼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해 보라고 하세요."
"그 일을 말입니까?"
"그렇소. 현금으로도 안 된다면 전에 얘기했듯이 우리 항구 몇 개를 러시아에 제공할
용의도 있다고 하세요."
"하오나, 합하... 그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현금보다는 저 들이 원하는 몇 개의 개항장을 주는 것이 더
이익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김영훈과 한상덕의 얘기는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얘기였다. 그저
단순하게 러시아와 관계가 된 일인 줄은 짐작했으나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재경대신 대감."
"예, 합하."
"지금 우리 조정에 덕국에서 들여온 차관 이 천만 파운드가 고스란히 남아있겠죠?"
"그러하옵니다, 합하."
"좋습니다. 앞으로 그 돈을 사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용하신다고 하면...?"
"아! 아직 다들 모르고 계시죠?"
모두들 말이 없었다. 러시아와 관계된 일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오로지
김영훈과 한상덕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김기현이나 김병국같은 대신이라고 해서 알
수 없었으니, 합참차장 신헌이나 해군사령관 김종완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할 생각입니다."
"예-에? 알래스카를요?"
"예?"
"...?"
"..?"
김기현과 김종완은 김영훈의 말에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으며, 알래스카가 어디에
붙은 곳인지 알 리가 만무한 김병국과 신헌은 그저 눈만 떴다 감았다 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경흥 부사 자리에 러시아 전문가인 이재화 박사를 앉힌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직 러시아와 미국이 알래스카 문제로 접촉하기 전에 우리가 선수를 칠
생각입니다."
"아... 정말 좋은 생각이옵니다, 합하."
"정말이옵니까?"
"그렇습니다."
김병국과 신헌은 영문을 몰랐다. 김기현이나 김종완이 놀라는 것을 보면 그
알래스카라는 곳이, 혹은 물건이? 굉장히 값나가는 것? 같은데 얘기만 듣고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합하, 알래스카라는 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옵니까? 말씀을 들어보면 굉장히
값나가는 물건 같사온데...?"
"하하하... 물건요...? 이런... 알래스카에 대한 설명을 안 드렸군요."
김병국과 신헌이 알래스카에 대해 알 리가 없으니, 그곳이 땅인지 아니면 물건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김영훈과 두 사람에게 알래스카가 어떤 땅이며 어디에 붙어
있으며 필요한 이유 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김영훈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그때서야 알아들었는데, 그래도 뭔가 알 수 없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렇게 넓은 땅을 조선이 사서 관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비단 두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의구심이 아니었다. 김기현이나
김종완, 심지어는 알래스카의 매입을 추진하고 있는 김영훈과 한상덕도 가지고 있는
의구심이자, 딜레마였다.
"대정원장, 대감."
"예, 합하."
"보위부에서는 올해도 여러 전염병에 대한 예방 접종을 했다지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작년부터 시작된 예방 접종은 계속해서 꾸준히 진행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신의도감에서 개발되는 여러 신약들이 제약공장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일반 백성들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고 있사옵니다. 또한
2년 전부터 보위부 주도로 실시하고 있는 위생환경의 개선 작업도 서서히 그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좋은 일이군요. 위생과 의료수준만 올라간다면 우리 조선의 인구는 향후 5년에서
10년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겝니다. 그리고 한성의과대학의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보위부의 주도로 시행하고 있는 한의학(韓醫學)의 정비사업도 마무리된다면
더욱 좋은 의료혜택을 누리게 될 겝니다. 그러면 인구의 증가는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고, 그렇게 증가된 인구는 우리 조선이 얻는 땅 덩어리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재산이 될 겝니다."
"아..."
"역시..."
한상덕과 김기현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김영훈의 말대로 적절한 먹거리와 의료혜택만
받을 수 있다면 조선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사실 조선 후기의 인구가 쉽게 늘어나지 않은 이유는 양란 이후에 계속된 흉년과
전염병의 창궐에 기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일 조선이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전염병의 마수(魔手)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자식이 곧 재산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이 더 많은 자식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김영훈은 이 점을 생각하고 있었고, 지리적으로 조금 멀더라도 나중을 위해서
알래스카를 반드시 얻을 생각이었다.
"재경대신 대감."
"말씀하시옵소서."
"국무부와 내무부, 등 관련부처와 협의하여 백성들에게 다산(多産)을 장려토록
하세요. 그리고 일정 숫자 이상의 자식을 생산하는 가정에게는 그에 따른 각종
지원을 하는 방법도 강구하도록 하시구요."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합하."
"그러나 사례편람의 내용처럼 혼인연령에 대한 규제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겝니다.
아시겠습니까?"
"명심하겠사옵니다, 합하. 심려 거두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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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73 도약(跳躍)의 첫걸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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