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로당을 빠져나온 김영훈과 중신들은 아재당으로 향했다. 아재당에 점심상이 차려져
있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재당은 30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비좁은 느낌이 있는 사랑이다. 하여, 일부 소장급
중신들이나 실무자들은 따로 상을 받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불편하지만 자리를 좀 죄고 앉으면 충분히 같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고, 그렇게 먹는
것이 좋겠다는 김영훈의 의견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죄고 앉아 점심을 먹어야 했다.
비록 옆 사람의 어깨에 닫아 숟가락질이나 젓가락질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둘러앉아 점심을 먹자 한결 서로간의 유대감이 공고(鞏固)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아재당에 차려진 점심을 먹고 난 뒤 김영훈은 담배 한 모금 생각이 절실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중신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흡연의 욕구를 억누르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이 나라 조선의 최고권력자라 할 지라도 나이
많은 중신들 앞에서 담배를 꼬나 물만큼 가정교육이 형편없지도 않았으며,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나이 어린 자신을 믿고 따라준 천군 출신의 중신들이나
조선의 중신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떻게 함부로 그들 앞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겠는가.
그저 눈앞에 있는 고로쇠 약수만 홀짝거릴 수밖에 없었다. 달짝지근하고 맛있는
고로쇠 약수는 전라도 강진에서 올라온 초로의 아낙이 진상한 것으로 앞에 있는 잔이
마지막 잔일 정도로 한동안 김영훈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렇게 모든 중신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자 한결 분위기도 좋아졌고,
나름의 유대감도 생긴 터라 합참차장 신헌이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는 것은
그런 분위기 탓도 있었다.
"합하, 신이 한 말씀드리고 싶은 말이 있사옵니다."
"말씀하세요. 위당 대감."
신헌은 막상 말을 꺼내 놓기는 했지만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왕 내친걸음... 천천히 다음 말을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전의 회의에서 김종완 해군사령관 대감의 해군력 강화에 대한 건의는 신도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옵니다. 헌데 우리 조선의 실정에 만 톤이 넘는 대형함의 건조가
필요한지 의문이옵니다."
"허-어, 그래요...?"
"외람(猥濫)된 말씀이지만 연안방어에 적당한 전함의 건조도 신경 써야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내 대감의 말씀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위당 대감, 올해
안에 우리 조선에 풍백함급 이상의 전함이 한 예닐곱 척 생긴다면 어떻겠습니까?"
"풍백함급 이상의 전함이 예닐곱 척이 생기다니요? 그 말씀이 참이옵니까?"
"아마, 그렇게 될 겝니다. 그래서 제가 만 톤이 넘는 대형 전함의 건조에 대한
해군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김영훈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전함에 대한 얘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김영훈이 이렇게 변죽만 울리고 입을 닫자 저 양반이 어디서 전함을 사온다는 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조선소가 있어 전함을 건조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어디에서 또
해적질을 해온다는 말인가? 하는 구구한 억측이 난무하였으나, 김영훈에게서 더
이상의 다른 어떠한 언질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김영훈을 보며 한상덕과 김종완도 따라 웃었는데, 한상덕과 김종완의
웃음을 본 중신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김영훈은 신헌을 보며 말을 한다.
"그리고 우리 막강 조선해군의 건설에 대해서는 천 톤급의 호위함(護衛艦), 삼천
톤급의 구축함(驅逐艦), 칠천 톤급의 경(輕) 순양함(巡洋艦), 1만 톤급 이상의 중(重)
순양함(巡洋艦), 1만 오천 톤급 이상의 전함(戰艦)의 건조를 위한 세부적인 계획과
천 톤 이하의 잠수함 건조에 대한 계획도 이미 해군에서 수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령관, 대감."
여기까지 말한 김영훈은 말머리를 김종완에게로 돌렸다. 아무래도 해군에 대해서는
김종완이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사옵니다, 합하. 위당 대감. 제가 건의한 신 조선소의 선거는 모두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렇지요, 1만 톤급 이상의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선거가 3개에다가, 2만 톤급
이상의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선거가 2개나 되니, 어마어마한 크기지요. 저는
상상이 가지를 않습니다."
"하하하..."
김종완은 신헌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김종완 자신도 그렇게
대형 전함을 건조하는 선거는, 한국에서 해군사관으로 복무했을 때 미국의 노포크
해군기지를 견학했을 때 빼고는 없었으니까,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 조선해군은 화력면에서는 동양에서 제일 갈지
모르나 수병들의 숙련도와 경험에 있어서는 저들 서양 제국(諸國)의 함대와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풍백함급의 운용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없지만, 정작 양무함과 같은 대형함의 운용은 솔직히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무함과 건무함을 남양만까지 끌고는 왔지만
실전에서도 우리 수병들이 아무 문제없이 다룰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힘들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음..."
해군이라는 것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대형함만
운용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조련해서 차츰차츰 커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의 조선 상황에서는 그것이
매우 어려웠다.
솔직히 그 문제를 따지자면 조선의 지금 상황으로 영국이나 법국같은 해양강국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요원한 문제였다. 하여 해군에서 계획하는 해군력 강화방안의
요점은, 일단 대규모의 선거를 여러 개 만들어 한꺼번에 여러 척의 함선을 건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만 톤급 이상을 건조할 수 있는 선거에서 삼천 톤급의 구축함을
한꺼번에 두 척에서 세 척까지 몰아서 건조하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잠수함의
경우에는 더 쉬웠다. 1만 톤급 이상을 건조할 수 있는 선거에 이론상으로 10척의 천
톤급 이하 잠수함의 건조까지 가능하니, 이렇게 건조한 함선은 운영요원만
뒷받침된다면 얼마든지 실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해군력 강화의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형함을 건조할 수 있는 대형선거에서 적은 톤 수의 함선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바로 핵심이었다. 그리고 한 두 개의 나머지 선거에서는 대형 전함의 건조도
추진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조선의 해군군관들이나
수병들이 어느 정도 서양식 전함에 대해서 익숙해 질 것이고, 또 그때쯤이면
해군사관학교의 생도들이 졸업생을 배출하여 정식 해군사관으로 임용할 것이니
인력수급에 있어서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김종완의 설명이 끝나자 신헌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김영훈은 두 사람의
얘기가 끝난 듯 하자, 이번에는 김병국을 부른다.
"영어(穎漁) 대감."
"하교하시옵소서, 합하."
국방대신 김병국은 자신을 부르는 김영훈의 말에 입에 머금고 있던 고로쇠 약수를
재빨리 삼키며 대답을 했다.
"지금 우리 조선의 육군의 정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지난해(1865) 제가 의무
복무병에 대해서도 칙령을 내린바가 있습니다만...?"
김영훈과 신헌의 대화에 뜻하지 않게 끼게된 김병국은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얘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잠시 잡담을 나누던 다른 중신들도 김영훈과
김병국을 주목하게 되고,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국무회의의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원래 우리 조선의 지방군 병력은 근근히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였사옵니다.
그러나 지난 갑자년(甲子年 1864년) 지방으로 파견된 천군 출신 지방관들과
병마사들의 노력으로 훈련의 숙련도와 즉응태세 같은 면에서는 크게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지난해(1865년)에 합하께서 내리신 칙령으로 인하여 군포를
내지 않고 3년 간의 의무 복무기간으로 군역을 대신하고자 하는 장정들이 크게
늘어나 이제는 중앙의 근위천군과 친위천군을 제외하더라도 근 10만에 이르는 병력을
육성할 수 있었사옵니다."
"음... 고무적인 일이군요. 허나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수의 장정들이 의무
복무병으로 지원하게 되면 여러 가지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대감께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외다. 특히 군포에 대한 세금을 납입할 충분한 형편이 되는
자들이 너도나도 의무 복무병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관리감독을 하셔야
할 것이구요."
"명심하겠사옵니다, 합하."
이미 지난해부터 시행된 군포납입이 어려운 장정들에 대한 3년 간의 의무 복무로
인해 상당수의 지방군이 육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근위천군과 친위천군 소속 직업병
중의 일부가 지방군의 사관과 부사관으로 전출하여 그들의 훈련을 담당하였기에
훈련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중앙군에 비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북방의
함경도와 평안도의 국경지방에 주둔하는 지방군의 훈련은 강도가 높기로 근위,
친위천군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난 지방군의 의무
복무병으로 인해 지금은 오히려 세수입의 감소를 걱정해야할 정도였다.
김영훈은 아직까지는 조선의 군사제도를 징집병으로 바꿀 생각이 없었다. 세수입도
문제지만 이들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부족했다. 아니 지금 당장에는 재정이
궁핍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시행할 여러 가지 정책들을 위해서는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조선이 김영훈과 천군의 바램대로 제국(帝國)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강화가 필수적이고, 그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징집병으로의 전환이
당연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생각을 김영훈은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 군이 해외로 파병을 나가야 할지 모르니 근위천군과 친위천군의 훈련에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예-에? 해외파병요?"
김병국은 이렇게 놀라며 말을 했으나, 놀란 것은 비단 김병국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부분의 중신들이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가사끼에 주재하는 윤정우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왜국의 사정이 많이 어지럽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저들 막부정부에서 우리 조선에 파병요청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소립니다."
"..."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아니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김영훈이 이렇게 입을 닫아버리자, 좌중의 중신들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씩 나타나는 김영훈의 이러한 함구는 그의 특기였고, 그렇게 적절하게
통제된 정보는 중신들의 공론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수단이기도 하였으니, 그가
한 번 입을 닫으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다음 상황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좌중의 중신들이 그렇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상공대신 박규수가 입을 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중신들의 눈과 귀는 박규수에게 쏠렸으나, 그런 중신들의 호기심과
의아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규수는 자신의 할 말만 한다.
"합하, 신 상공대신 박규수 이롸옵니다."
"말씀하세요, 환재 대감."
"합하, 김종완 해군사령관 대감의 신 조선소의 건설과 해군력 강화에 대한 건의는 잘
들었사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참에 중화학공업과 무기재료공업, 정밀기계공업,
등 중공업과 중화학공업을 한 곳에 집단으로 묶어 중공업단지를 건설하는 것이 옳은
일일 줄로 사료되옵니다. 이미 홍제원 인근에 세웠던 방직공장과 섬유공장, 라면공장,
등 경공업 공장들은 제물포와 부평현 인근 지역의 새로 건설된 경공업단지로 이주한
마당에,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중공업단지도 조성을 해서 육성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더불어 신 조선소가 건설되는 해주만 일대에 앞날을 내다보는
신항만의 건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줄로 사료되옵니다."
지난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홍제원 인근에 세워진 방직공장, 섬유공장, 라면공장,
등의 경공업 공장들은 그동안 조선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진기한 상품들을 공급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던 경공업공장들은 조정에서 쥬신상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독일에서 수입한 여러 공장기계설비들이 속속 조선에 들어오고, 그로 인해 대단위
공장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제물포와 부평현 인근에 경공업단지를 세워 이주를
끝마친 상태였다. 기존에 있던 여러 공장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계설비를 이용한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애초에 김영훈이 의도했던 지방경제의 활성화에 대한
노력도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제 경공업단지뿐만 아니라 중공업단지의 조성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되기에
이르렀는데, 사실 중공업단지에 대한 조성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열악한 재정상황이나 혼란스러웠던 정치상황으로 인해 그
시행시기가 갈수록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해주만의 제철소도 완공을
눈앞에 두게 되었고, 또한 신 조선소의 건설이 추진되는 마당에 더 이상 그 실행을
늦춰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제 재정의 자립도도 역대 어느 임금의 시대보다도
충실했고,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중공업단지의 조성은 시대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공대신 박규수는 제철소와 조선소, 여기에
무기재료공장과 중화학공업공장, 공중질소고정법을 통한 화약의 개발-비록 21세기의
RDX나 TNT에 비해서 폭발력이 떨어지지만-과 생산, 그리고 그 부산물로 생산되던
질소ㆍ요소비료 등 화학비료의 대량생산을 위해서라도 공중질소고정공장과
화학비료공장, 정밀기계공업공장까지 아우르는 대단위 중공업단지의 건설을 역설하고
있으니, 이미 실무진에서는 그에 대한 실사와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이제 김영훈의
재가만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중공업공장단지를 조성하고 가동하는데 필요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남아있는 모든 초고온 태양로와 풍력발전설비를 투입한다면 중공업단지의 조성과
가동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영훈은 여기에 더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
사업우선순위에 밀려 시행이 연기되었던 화력발전소에 대한 건설도 시행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화력발전소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서 올 때부터 준비를 해왔지만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창고에서 세월만 죽이고 있던 화력발전설비가 있었기에 따로
개발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생산된 전력은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삶의 질을
한층 더 향상시킬 수 있는 일이었기에 가급적이면 빨리 건설하고 시행해야만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그 건설과 시행을 미룰 수는 없었다.
"환재 대감은 들으세요. 내 대감의 건의를 받아들일 터이니, 대감께서는 관련부처와
잘 협의하여 중공업단지의 조성과 건설에 매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공하옵니다, 합하."
"건교부에서는 해주만의 중공업단지뿐만 아니라 전국의 주요항만에 대해서도 정비를
서둘러 주시고, 아울러 전국 주요 항ㆍ포구에 신 항만의 건설에 힘써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화력발전소의 건설에도 힘써주시고요."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합하."
"그리고, 지금 동원하고 있는 천주교인들과 죄수들 덕분에 도로망 확충사업이 서서히
성과가 나타난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대감."
"우리 건교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도로망 확충사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다른
사업에도 저들의 힘은 큰 보탬이 되고 있사옵니다. 합하. 그리고 올해부터는 저들이
닦아놓은 도로에 시멘트 포장공사도 하고 있사옵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하면 일단
한양과 제물포 사이의 시멘트 포장도로가 완공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막상 이렇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김정호는 이렇게 대답은 했지만 한숨부터 나왔다.
자식이라고는 달랑 딸내미 하나 있는데 그 딸내미를 천군에 시집보낸 후로는 딸과
사위, 그리고 지난해에 태어난 외손주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때가 1년에 겨우 서너
번에 불과할 정도로 지방출장이 잦았으니, 이제는 1년에 서너 번 볼 수 있었던 그
기회마저 없어지는 것 같아서 한숨이 먼저 나왔다. 특히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외손주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서 '이일을 우짜면 좋누...' 하는 한숨이 앞섰다.
그렇다고 김정호가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남보다 뒤지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묵묵히 함으로써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는 있지만,
핏줄이 아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충청도 문경에 세워진
시멘트공장에서는, 앞으로 시행할 국책사업에 소용되는 시멘트의 생산을 위해서 밤을
낮 삼아 일을 해야할 것인데...
김정호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김영훈의 말이 다시 들린다.
"그리고 이러한 국책사업을 위해서는 시멘트의 공급이 원활해야 될 것인데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습니까?"
딱히 누구에게 하는 질문이 아닌 모든 중신들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김정호는
시멘트공장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인 자신이 나서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기도감의 제조(提調) 최규철이 나섬으로써 김정호의 그런 시름을 덜어주었다.
"합하, 시멘트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서 저희 신기도감에서는 그동안 새로운
시멘트공장을 설립할 기계의 제작에 몰두하여 이미, 몇 개의 공장설비를 충당할 수
있는 기계의 제작에 성공하였사옵니다. 그 점은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것이 참말이오이까? 대감."
"그렇습니다, 건교대신 대감."
김정호는 최규철의 말에 큰 시름을 덜은 듯 이렇게 말하며 나섰는데, 그런 김정호의
행동에 김영훈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을 터뜨리며,
"하하하... 그것이 그렇게 기쁜 소식입니까? 고산자 대감."
"송구하옵니다, 합하. 다만 신의 시름이 거기에 있었는데, 너무나 기쁜 소식이라
이렇게 나서고 말았사옵니다."
"무슨 말씀을요, 대감께서는 그렇듯 밤낮으로 국정을 돌보시는데 이 몸은 그저
운현궁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지시만 하고 있으니, 제가 오히려 대감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께 송구하지요."
"아니옵니다, 합하.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이시옵니다."
"아닙니다. 대감. 오늘날 이만큼 우리 조선이 힘을 기르고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감과 같이 음지(陰地)에서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시행하시는 분들 덕분입니다."
"황공하옵니다, 합하."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나이다."
여러 중신들은 이와 같은 김영훈의 말에 너도나도 고개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황공하옵니다 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여러 중신들이 이렇게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김영훈도 덩달아서 고개를 숙이고 예를 차렸는데, 그 점이 오히려 중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러한 일을 예측하고 행동했든, 예측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에
우러나는 대로 행동했든, 중신들의 진심 어린 존경과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영훈은 최규철과 김정호에게 시멘트공장을 어디에 세울 것이며, 신항만을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느 지역에 세울 것이냐? 하는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묻지 않았다.
그런 일은 실무진들의 재량으로 알아서 해야지 일일이 자신이 참견하고 나선다면
오히려 일을 추진하는데 방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중신들과 실무진들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맡은바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해주는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할 생각이었다.
"헌데 오늘 어찌 혜강(惠崗) 대감께서 안 보이십니다. 그려..."
"합하, 문교대신 최한기 대감께서는 덕국(德國)으로 출발하는 유학생들의 환송을
위해 제물포로 가셨사옵니다."
자신의 오른 팔이라고 할 수 있는 한산덕 대정원장이 이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알아듣는 김영훈이었다.
"아! 그렇군요. 오늘이 우리 조선에서 덕국으로 유학하는 유학생 100명이 제물포에서
출발하는 날이었군요. 이런..."
"그렇사옵니다, 합하.
김영훈은 조선 최초의 서양유학생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게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 최초의 독일 유학생 100명은 독일 측이 제공한
헤르타(Hertha)호를 타고 독일로 향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 출발하는 유학생들은 성균관대학 문과에서 20명, 이과에서 20명이 선발되었으며,
성균관대학에서 선발된 인원 중에는 이항로의 제자인 면암(勉庵) 최익현, 김병기의
양자(養子)인 고균(古筠) 김옥균, 김병필의 아들인 김자중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육군사관학교에서도 40명이 선발되었는데, 합참차장 신헌의 아들인 향농(香農)
신정희, 훗날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이름을 떨치는 동무(東武) 이제마, 한승렬의
아들인 다옥(茶玉) 한규직과 강석(江石) 한규설, 근위천군 이장손 주임원사의 아들
이춘영과 그의 친구 강명준, 등이 선발되었으며, 해군 풍백함의 관측병이었던
박상현도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20명 중 천군에서 유학생들의
감시와 서양제국(諸國)의 정보탐지와 그 밖의 특수 임무를 띠고 7명이 파견되었고,
10명은 동학의 최시형과 동학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신기도감
기기창의 화포기술자들이었다.
"허면, 혜강 대감 대신에 어느 분이 문교부에서 오셨습니까?"
"합하, 신 문교차관 이창호 예 있사옵니다."
강문구는 천군 출신의 역사학도로써 안동대에서 역사와 국학을 강의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일제의 침탈로 피폐해지기 이전의 우리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원정단에 지원한 올해 서른 일곱의 혈기 왕성한 젊은
사학도였다.
"오--- 영감께서 오셨습니까?"
"예, 합하."
김영훈과 이창호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한국에서 원정단 전체가 합숙할 당시
이창호는 김영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김영훈은 이창호에게서 우리 역사의
감춰진 진실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었다.
"그래, 그동안 연구성과는 좀 있었습니까?"
"아직까지 뭐라고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렵사오나, 나름의 성과는 충분히 거두고
있사옵니다. 언젠가는 합하께 신이 연구한 우리 역사의 비밀에 대해서 보고를
올리겠나이다."
"하하하... 모쪼록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망극하옵니다, 합하."
김영훈은 합숙할 당시처럼 이형(兄)! 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런 욕구를 자제하고 그저 덕담을 해주는 것으로 이창호의 노고를 치하했다.
"합하, 신이 한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청요? 말씀하세요."
"나중에 우리 조선이 지금보다 더 강대해지면 만주에 있는 광개토태왕비(
廣開土太王碑)와 왜국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七支刀)를 꼭 한 번
연구를 해보고 싶사옵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창호가 문교차관으로 있으면서 발굴한 역사서는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발굴한 역사서를 가지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도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미 성균관대학과 육군사관학교, 전국의 사범학교에서는
이창호가 발굴한 역사서를 기초로 한 역사교육이 한창이었고, 앞으로 더욱 활발한
연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영훈은 일단 조선이 커나가기 이전에는 그러한 연구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을 가급적이면 지양(止揚)하고 싶었다. 이직도 일부 사대주의자들이 내린 뿌리가
조정이나 사회에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는 시점에서 괜한 경거망동(輕擧妄動)으로
타초경사(打艸驚巳)의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청국의 눈치를 살피며
안으로 내실을 다져야 할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눈치를 봐야하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호태왕비(好太王碑)와 칠지도 말씀입니까?"
"그렇사옵니다, 합하."
"... 음... 그렇게 하세요. 앞으로 영감께서 하시는 연구에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지
지원해 드려야지요. 지금은 이렇게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지만 언젠가는 영감의
연구성과가 빛을 발할 때도 있을 겝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망극하옵니다, 합하."
"헌데 올해만 교육시키면 2년제 사범학교의 첫 졸업생들이 나온다지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그들이 우리 조선의 초등교육을 담당할 것이옵니다."
"좋은 소식이군요. 그런데 초등학교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새로 짓기로 했나요?
아니면...?"
"내년에 개교할 전국각지의 초등학교는 기존의 향교(鄕校)와 향사를 사용하기로
했사옵니다. 그리고 앞으로 세워지는 중ㆍ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작년부터 폐지되어
국고로 환수한 서원을 이용하기로 했으니 크게 재정이 소모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음... 비어있는 서원과 향사에 대한 관리도 잘하셔야 할 겝니다. 영감께서도
아시겠지만 집이나 건물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피폐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규모 있는 대학교를 세우려면 서원 건물의 보수와 확장도 검토해봐야 할
것이고요."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합하. 심려 거두시옵소서."
이창호의 대답을 듣는 김영훈은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뭔가 알 수 없는 희열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올해만 지나면 조선의 힘없는 백성들의
자식들에게까지 교육을 혜택을 골고루 나눠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오르고
있었다.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제야 그
힘을 마련할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문교차관 이창호와 얘기를 나눈 김영훈은 잠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좌중을
둘러보는데 자리가 좁아서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중신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아재당의 자리가 비좁은 관계로 여러 중신들이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회의를 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영로당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빨리 회의를 진행하고 마무리를 하는 수밖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농림대신 대감."
"말씀하시지요, 합하."
농림대신 김인호는 조선에 온지 2년이 넘게 지나서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금관조복(金冠朝服)과 좁은 자리 때문에 허리를 배배 꼬고
있다가 김영훈이 자신을 부르자 황급히 대답을 했다.
"자리가 좁아서 불편하시지요?"
"예? 아...예..."
"잠시만 참으십시오, 이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괜찮사옵니다, 합하."
김인호는 좁은 자리 때문에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제 회의의 끝이 보인다는 김영훈의
말에 순식간에 화색(和色)이 돌았다. 김영훈은 그런 김인호를 보면서 나중에
영로당에 회의용 탁자와 의자를 들여놔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말을 잇는다.
"농림부에서 시행한 토지개혁은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까?"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기호지방과 강원도, 황해도 이북지방의
토지개혁은 별다른 문제가 없이 마무리되었으며, 삼남의 토지개혁도 일부 못된
무리들이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협박하여, 토지를 내 놓지 않으려고 한 경우가
조금 있었지만 군사들이 출동하는 기미가 보이자 저절로 수그러들었사옵니다."
지난 정초에 김영훈이 농림부를 통해 시달한 토지개혁은 사실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의 모든 토지는 일단 나라의 소유임을 천명하고 지금까지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모두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렇게 몰수된 토지의 원주인에게는
지난 10년 동안의 수확을 평균값으로 계산한 것을 토지매매가(價)로 정하고, 이렇게
책정된 토지매매가의 8할을 10년 동안에 걸쳐서 보상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몰수된
토지의 소유를 원하는 자에게는 다시 원주인에게서 매입한 토지매매가를 그대로
적용하여 되파는 형식을 취했다. 물론 대금의 납부형식도 10년 동안 분할하여
납부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실시된 토지개혁에서 조정은 중간거래자의 입장에
지나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조정의 재정이 소모된 것은 아니었다.
토지개혁에서 분배의 원칙은 간단했다.
김영훈은 토지개혁시행령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으며, 만약 그 시행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엄벌로 다스릴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분배의 최우선순위는 원래 그 토지에 농사를 짓던 소작인들에게 줌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으며, 토지소유의 상한선은 개인의 경우에는 한
마지기(토지를 세는 단위 보통 논은 200평, 밭은 300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집안이나 상단(商團) 같은 단체의 경우에는 한 결(結 보통 3000평)
이상의 토지소유를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금(嚴禁)했다.
당연히 양반 사대부를 비롯한 대지주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미 지난해부터
토지개혁의 시행에 관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나돌면서 여론이 형성되었고, 호남유림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노사 기정진이 토지개혁을 거부하는 대지주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한 것은 물론이고, 전 우의정 이경재도 자신이 소유한 기호일대의 토지를 거의
헐값으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자신의 본향인 경상도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시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토지개혁이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미 2년 동안 시행된
상업진흥정책으로 인해 농사를 치부의 수단으로 여기던 지난날의 생각이 이제는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전환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토지개혁이
무리 없이 시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김영훈과 천군의 힘에 기인한 것이
사실이다. 이미 지난해 말 역모와 관련돼 피 바람이 한바탕 불었기에 김영훈과
천군의 서슬에 조선의 모든 양반 사대부와 대지주라는 작자들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토지개혁이 쉽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마무리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이 모든 일이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합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진
결과이옵니다."
김인호의 말이 맞았다.
토지의 개혁에 대해서는 고래(古來)의 모든 왕이나, 임금, 정권에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였지만 누구도, 어느 정권에서도 이렇듯 완벽하게 마무리한 예는 없었다.
누구도 몇 천년을 이어온 수탈과 질곡(桎梏)의 악순환을 끊었던 예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훈과 천군,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고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모든 조정의 중신들은 칭찬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런 김인호의 칭찬에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김영훈은 행여나 그런 기미가 보일 새라 서둘러 말을
돌린다.
"음... 모내기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김인호는 김영훈의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더 이상 그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고
김영훈의 물음에 답을 한다.
"이미 모내기에 들어간 논도 있으며, 이모작 논의 경우에는 조금 더 지나야 모내기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음... 모내기에 필요한 일손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아니옵니다, 합하. 비록 일부 장정들이 의무 복무병으로 빠져나갔다고는 하지만
농사일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사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전국의 지방관아에 명을 내려 모내기 일손
돕기에 적극 나서라고 하세요. 이렇게 하면 과거에 민과 관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의
골도 매울 수 있을 것이며, 백성들이 우리 조정을 더욱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군 병력도 농사철에는 발벗고 농사일을 도울 수 있어야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겝니다. 아시겠습니까?"
"명심하겠사옵니다."
"명심하여 거행토록 하겠사옵니다. 합하."
"합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김영훈의 이와 같은 말에 좌중에 자리한 모든 중신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하니,
이렇게 해서 백성을 돕는 군과 관의 전통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김영훈은 어느 정도 회의가 마무리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산회를 선포한다.
"모두들 불편한 자리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논의된 사항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시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제야 김인호를 비롯한 천군 출신 중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니, 전제
왕권하의 신하라면 아무리 힘든 자리이고, 불편한 몸일지라도 추호의 내색도 없었을
것이나, 그들과 달리 21세기 한국에서 도래한 중신들은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회의였다.
김영훈은 저들을 위해서라도 영로당 회의실에 의자와 탁자를 비치할 것을 생각하면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대정원장 대감과, 국방대신 대감, 재정원장 대감, 합참차장 대감,
해군사령관 대감께서는 잠시 저와 의논할 것이 있으니 자리에 남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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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72 도약(跳躍)의 첫걸음...4
번호:5097 글쓴이: yskevin
조회:134 날짜:2003/12/18 21:35
..
버그자수입니다.
어제 연재분에서 개인당 한 마지기, 집안당 한 결만을 허용했던 토지보유 상한선을,
한 가정당 한 결, 집안이나 상단 같은 경우에는 열 결의 토지를 허용하는 것으로
수정하겠습니다. 그렇게 이해해주십시오. 작가가 농사경험이 전무하다보니 그런
허접한 설정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지난 챕터인 "밝아오는 아침의 나라"에서 묘사한 탈곡기와
탈곡하는 풍경은 제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노인들에게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썼는데
"호롱기"라는 이름은 확실히 옛날 어르신들이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때 한 마지기 당 수확량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였다면 어제와
같은 허접한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인데... 정말 죄송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