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40화 (137/318)

3.

아침부터 서울 장안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12부 거리에서 운종가(雲從街)로 이르는 모든 관공서와 시전 상인들의 가게는 문을

닫았으며, 거리거리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렇게 길을 나선 백성들은 하나같이 고운 옷들을 차려입고 있는 것이, 오늘은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한 나머지, 이들을 붙잡고 무슨 일이시오? 어디로 가시오? 하고 묻는다면,

"이런, 넋빠진 인사를 봤나? 그래,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른단 말이오?"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어린 임금이 창덕궁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맞이하는 세 번째 맞이하는

봄날이다.

병인년(丙寅年 1866년) 음력 3월 21일.

오늘 드디어 그동안 비어있던 대궐의 안주인을 맞이하는 날이다.

지난 철종대왕의 급서(急逝)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두 해가 지났다.

열 세 살 어린아이였던 어린 임금이 이제는 열 다섯의 소년(少年)이 되었다.

법도(法度)대로 할 것 같으면 진즉 왕비(王妃)를 간택했어야 마땅했을 일이나,

철종대왕이 승하하신 지 두 돌이 지나지 않아 대상(大祥)을 치르지 못했기에, 지금껏

중궁전(中宮殿)이 비어있어야만 했다.

지난해 12월 8일로 승하하신 철종대왕의 대상도 마쳤다.

이제 그동안 대상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미루어왔던 임금의 배필을 맞이하는 문제가

서둘러 진행되었다. 왕실의 가장 웃어른이신 대왕대비 조씨는 어린 임금의 생모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 등 왕실의 어른들과 상의를 하여 어린 임금의 가례(嘉禮)를

서두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린 임금의 양모(養母)인 대왕대비 조씨와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 두 과부가 주선하는 어린 임금의 가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동안 친정 집안 식구들이 역모를 획책하여 어육(魚肉)이 된 후로 시름에 잠겨있던

부대부인 민씨도 비록 자신이 의중에 둔 며느리가 아닐지라도, 오늘만큼은 기쁘기

그지없었으니 잃었던 생기를 다시금 되찾을 수 있었고, 왕실의 분위기도 활기에

넘치기 시작했다.

지난 12월 10일에는 추밀원을 통해 금혼령(禁婚令)이 전국에 내려졌다.

특히 수도인 한성부(漢城府)에 사는 모든 권문세가와 사족들의 집에는 더욱 엄격하게

금혼령이 시행되었다. 이렇게 금혼령이 내려진 후 대궐도 들어온 왕비후보의 단자는

모두 46건에 이르렀다.

12월 23일일의 초간택으로 서른 여섯 명이 밀려났으며, 정월 초승께 있었던

재간택으로 다시 여섯 명의 처자가 밀려났다. 그리고 마지막 삼간택은 지난 3월

6일에 실시되었다.

삼간택에 올라온 네 명의 처자 중에는 부대부인 민씨의 친정 집 동생인 민자영도

끼어 있었으며, 어린 임금의 정혼자인 김병학의 여식도 끼어 있었다.

부대부인 민씨의 의중에는 친정 집 동생인 민자영이 있었으나, 대왕대비 조씨의

의중에는 김병학의 여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섭정공 김영훈의

몫이었다.

이 두 여인네를 비롯한 조선의 모든 백성들은 섭정공 김영훈의 손에 의해 왕비가

결정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김영훈은 왕비의 간택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역사대로 민자영을 어린 임금의 배필로 맞자니,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자신과 천군의

의중에 거리낌이 없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대부인 민씨의 의중도 헤아려줄

필요가 있었는데, 지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친정 집이 어육이 된 후로 하루 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고,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부대부인 민씨의 모습이

어린 임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비록 어린 임금 자신이 민자영을 탐탁치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혈육이라고는 달랑

하나 남은 생모의 간청을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김영훈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여흥 민씨의 척족들은

대부분 지난 해 있었던 역모 사건으로 어육이 되었기에, 역사에서처럼 외척의 발호(

跋扈)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오라비들이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의 손에 도륙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던 민자영이었기에 나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더불어 지난 정초에 실시했던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중신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김영훈은 김병학과의 약조를 저버리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상공대신 박규수가 운현궁으로 김영훈을 찾아왔다.

박규수는 김영훈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대뜸,

"합하. 우리 속담에 양반일지라도 삼대(三代)를 민취(民娶)하면 패가망신(敗家亡身)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시중에서는 주상전하께서 또 다시 민씨 처자를 왕비로

맞이한다면 삼대민취(三代民娶)가 된다는 말이 횡행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부디

현명하신 결단을 내리시어, 어리석은 백성들의 저와 같은 우려를 불식시켜

주시옵소서."

삼대민취(三代民娶)라는 말은 양반이 삼대에 걸쳐서 상사람의 딸을 배필로 맞이하여,

그 집안의 문벌이나 체통이 땅에 떨어져 양반 대접을 못 받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 시중에서는 이것을 삼대민취(三代閔娶)로 바꾸어 부르는 일이 횡행하고 있었다.

어린 임금의 조부인 남연군(南延君)도 민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어린 임금의

생부인 흥선도 민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다시 어린 임금이 민씨 처자를 왕비로

맞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삼대민취(三代民娶)를 삼대민취(三代閔娶)로

달리 부르고 있었다.

이 말은, 자칫하면 왕실도 삼대민취하는 양반네와 같이 패가망신 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으니, 어디서부터 퍼진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제야 나라꼴이

안정돼가고 있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왕비와 천군 간에 알력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부대부인 민씨의 간곡한 청을 못이긴 어린 임금의 부탁 때문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김영훈은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도 그런 일에 심력(心力)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김병학을 비롯한 중신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그와의 약조를

버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더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아비 없는

과부의 여식은 왕비로 간택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으니, 그 대목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김영훈의 의중은 김병학의 여식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이 일을 계기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

백성들의 삶의 지혜와 세상을 보는 안목이 많이 성숙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동학을 비롯한 천군에게서 교육받은 인사들의 훈육도 주효했겠지만, 몇 년 사이의

변화를 몸으로 실감하면서 스스로 진화하는 백성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었기에 어찌

흡족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김병학의 여식이 어린 임금의 배필로 정해지자,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병학의 사동 집은 별궁(別宮)으로 선포되어 대궐과도 같은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으며,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대왕대비 조씨는 별궁으로 선포된 김병학의 사저(

私邸)에 납채(納采)를 든 사신을 보내 청혼을 하였고, 다시 혼인의 정표를 별궁에

보냈으니 이것이 바로 납징(納徵)이다. 납채와 납징이 끝나자 이번에는 관상감(

觀象監)에서 길일(吉日)로 가례일(嘉禮日)을 정하여 별궁에 아뢰는 의식인 고기(告期)

가 있었다.

고기 후에는 책비(冊妃)라 하여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과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에 사신을 보내 왕비로 책봉 받는 의식을 마쳤고, 오늘 드디어 친영(親迎)

이 있는 날이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사대문은 아침부터 활짝 열려져 있었다.

전국각지(全國各地)에서 어린 임금의 친영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평생을 가야 서울 근처에도 와보지 못한 지방의 촌로(村老)들이 어린 임금의 친영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돈화문 앞에서 사동 네거리에 이르는 대로와 골목

구석구석에는 개미떼가 몰려든 것처럼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어린 임금의 친영이 저녁 무렵으로 정해졌는데도, 벌써부터 친영행차가 이르는 길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시중이 이렇게 북적거리는 데 대궐이라고 북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섭정공 김영훈을 비롯한 12부의 삼품 이상의 원임(原任)ㆍ시임(時任) 관료들이

창덕궁에 모여들었으며, 대궐 안의 모든 궁녀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친영 시간이 되자, 어린 임금은 대왕대비 조씨, 부대부인 민씨, 섭정공 김영훈에게

인사를 한 후 보련(寶輦)을 타고 돈화문을 나섰다.

무려 이백 여명에 이르는 문무백관들이 뒤를 따랐고, 기치창검을 번득이는 추밀원

소속의 호위군사들이 호종했으며, 연도에는 경무청과 소방청 소속의 관헌들만으로도

몰려드는 인파를 정리할 수가 없어서, 근위천군의 1개 마군대대가 특별히 연도의

정리에 나서야 했다.

돈화문을 출발한 어린 임금의 보련은 곧바로 사동 네거리로 행했는데, 연도에 운집한

백성들은 주상전하 천세를 연호하며 좋아라 했다.

원래대로라면 임금의 행차 시에 백성들은 모두 길가에 엎드려 고개를 쳐 박고 감히

용안(龍顔)을 우러러 뵐 수도 없었을 것이, 오늘 같은 기쁜 날 모든 백성들에게 어린

임금의 용안을 뵐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함으로써 백성들의 주상전하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관습이나 전례를 뜯어고칠 생각을 한 김영훈의

명에 의해 이렇게 모든 백성들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임금에 대한 예를 표했으며, 그런 백성들의 우러름을 한 몸에 받은 어린 임금은

기꺼운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함으로써 친영행차는 절정에 이르렀다.

"참으로 의젓하기도 하시네. 어찌 저렇듯 의젓하실꼬."

"이 사람은 주산전하께옵서 달리 만 백성의 어버이시겠는가? 저리도 늠름하고

의젓하시니 섭정공 합하를 비롯한 천군이 충심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암, 그렇구 말구. 그나저나 섭정공 합하의 행차는 보이지 않는구만...?"

"이 사람은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나? 섭정공 합하께옵서는 주상전하의 숙부(叔父)

되시는 몸이시니, 중신들과 어찌 같이 주상전하를 호종할 수 있단 말인가? 벌써

대궐에서 주상전하의 인사를 받으셨을 것이네. 그리고, 주상전하께옵서 새로운

중전마마를 맞이하여 대궐오 환궁하시면 다시 거기에서 하례를 올리실 껄세."

"아--- 그렇겠구만..."

이렇게 연도의 백성들이 어린 임금의 용안을 우러러보며 알거냥하고 있는데

친영행차는 어느새 사동에 접어들고 있었다.

돈화문을 출발하여 사동 네거리에 이르기까지 무려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된 것이다.

처갓집에 들어온 어린 임금은 대청 앞에 마련된 초례청에서 상견례(相見禮)를 치르니

이렇게 해서 김병학의 여식은 정식으로 중전마마가 되었다.

원래는 바로 환궁하여 대궐에서 가례를 올려야 하나, 어린 임금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기가 섭섭했는지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겨, 대청에 마련된 용상(龍床)에 앉았다.

어릴 적 생부인 흥선과 자주 이 집에 드나든 경험이 있었던 어린 임금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생부인 흥선은 귀천(歸天)하여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도 소망하였던

김병학의 여식을 며느리로 맞이하였으니, 저 세상에서도 아들의 가례를

축복해주시리라...

잠시 이런 생각을 한 어린 임금은 주변의 청을 받아들여 환궁을 하게 되니 이제는

김병학의 여식이 따라온 다는 보련을 타고 어린 임금의 보련과 나란히 길을 나섰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졌지만 신기도감에서 오늘의 가례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할로겐 전등 덕분에 사위는 대낮같이 밝았기에, 이렇게 좋은 구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백성들은 한 사람도 흩어지지 않고. 어린 임금과 역시 어리신 중전마마의

친영을 구경하며 연신 주상전하 천세와 중전마마 천세를 연호하였다.

대궐을 출발하였던 것의 역순으로 이제는 다시 대궐로 환궁하는 어린 임금과 어린

중전의 친영행차는 천천히 돈화문을 향해 나아갔다.

"합하. 친영행차가 막 환궁하였다 하옵니다."

김영훈과 그의 아내 조씨가 모처럼 대궐안 부용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추밀원 소속의 내관 한 사람이 와서 이렇게 전하고 갔다.

새로운 중전마마를 모시고 이제야 환궁한 모양이다.

김영훈은 아내 조씨와 함께 인정전(仁政殿)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인정전 앞 너른 뜰에는 오색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몇 백이나 되어 보이는 내ㆍ외명부(內外命婦)들이 아름답게 치장하고 한쪽에

시립하고 있었으며, 친영행차를 옹위하여 사동 김병학의 집에까지 갔다온 금관조복을

입은 문무백관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하고 있었다.

가정당(嘉靖堂)을 지나 선정전(宣政殿) 너른 뜰을 가로지르고 있는 김영훈의 눈에

대조전(大造殿) 한 쪽에 다소곳이 서 있는 처연해 보이는 앳된 얼굴의 상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응? 저 아이는 주상의 성은(聖恩)을 입었다는 이 나인(內人)이 아닌가? 음...

주상의 가례가 저 아이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모양이군...'

이제는 상궁에 봉해져 마땅히 이 상궁이라고 칭해야 했지만, 인정전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김영훈에게는 그런 것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어린 나이에 첫 정(

情)을 준 사내가 임금이다 보니 저렇게 마음고생을 하는 구나' 하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조카보다 어린 임금이 진즉 음양의 이치를 터득한 것이나 오늘 이렇게 가례를

올리는 것이 마땅치 않았지만 조선의 관습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물론 앞으로 이러한 것들도 손을 봐야 하겠지만 이제 겨우 도래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런 것까지 손을 대기에는 무리였다. 다만 앞으로 바로 잡을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그런 김영훈의 눈에 이 상궁이 천천히

대조전 동온돌 뒤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주상께서 나중에 후궁(後宮) 자리에 올리시겠지... 허, 참. 후궁이라니... 이거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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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70 도약(跳躍)의 첫걸음...2

번호:138  글쓴이:  yskevin

조회:2  날짜:2003/12/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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