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영미 연합함대의 참사는 왜인들에게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왔다.
존왕양이의 지사, 좌막파의 무사, 이름 없는 상인이나, 농부들은 참사소식을 접하고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마치 하늘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때아니게 폭죽(爆竹)을
터뜨리는 일이 많아졌고, 사람이 둘만 모여도 영미 연합함대의 참사 얘기로 날을
지새기 일쑤였다.
비록 영미 연합함대를 수장(水葬)한 세력이 왜국의 막부나 제번(諸蕃)이 아닐지라도
그 기쁨은 필설(筆舌)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1854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의 비운을 겪고 나서 그동안 느껴왔던
약소국(弱小國)의 설움이나, 열등민족이라는 자괴감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모든 왜인들이 그 사실을 기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막부나 왜왕(倭王) 조정의 중신들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영국(英國)과 미국(米國)에서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고, 이번 참사를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갑론을박(甲論乙駁)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세또 내해의 일부 해안가
주민들은 당장이라도 난리가 날 것처럼 피난 짐을 꾸리고 있었으니, 막부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막부의 대집정(大執政) 오구리 다다마사와 하마구리 어문의 변에서 막부군(幕府軍)을
총 지휘했던 요시노부는 일단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시모노세키 현지로 급파했으며, 영국과 미국공사관에 이 사건이 어떠한 왜국 세력도
연계되지 않은 일임을 설명하고, 양국 정부에 위로의 뜻을 전달할 사절단(使節團)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그 사절단장에는 구리모도 죠운이 임명됐다.
윤정우는 지금 나가사끼의 조선공사관 회의실에서 나가사끼 주재 독일영사 막스 폰
브란트(Max August Scipio vom Brandt)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조선공사관을 방문하여 조선과 독일 양국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고
했던 브란트는 약속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하여튼 독일놈들은 무슨 일일 하던지 꼭 제 시간을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별스런
놈들이라니까... 하는 생각을 윤정우는 하고 있었다.
윤정우는 지난 21일 오사까 성에서 구리모도로부터 영미 연합함대의 참사 소식을
전해듣고, 이틀을 더 오사까 성에서 머무르면서 막부의 대응방법을 지켜보았지만
자신이 관여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보니 그냥 돌아오게 되었다.
구리모도가 대표로 임명된 사절단의 선편(船便)에 동승하여 나가사끼로 귀환한
윤정우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공사관의 잡다한 업무였다.
윤정우는 여독(旅毒)이 채 풀리기 전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업무를 처리하는데
매달려야 했다. 영미 연합함대의 참사 이후 달라진 외국 공관들의 움직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으며, 자신이 조정의 밀명을 받아 작성한 암살대장자의 점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사이고 다까모리(西鄕隆盛)와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오꾸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유신삼걸(維新三傑)로 역사 속에 기억되던 인물뿐만 아니라 막부의 전
군함행정관인 가쓰 가이슈(勝海舟), 이와꾸라 도모미(岩倉具視), 나가오까 신따로(
中岡愼太郞), 등 향후(向後) 왜국의 정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될 인사들을 미리
제거한 것인데 그 수가 무려 열 네 명에 이르렀다. 다행히 암살을 시행하기 위해
떠난 요원들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나가사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쓰를 암살하기 위해 에도(江戶)로 간 박지현과 이민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바람에 에도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윤정우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교또에서 사이고와 이와꾸라를 암살한 박지현과 이민화는 다음 암살대상인 가쓰가
살고 있는 에도로 향했다.
비교적 손쉽게 가쓰를 암살한 박지현과 이민화는 일이 수월하게 마무리되자 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후꾸자와 유끼치(福澤諭吉)와 그가 운영하는 영학숙(
英學塾)을 불지르는 계획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후꾸자와에 대한 얘기를 박지현이 듣고 와서, 그가 하는 일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꾸자와를 암살하기에 이르고, 후꾸자와가 운영하던
영학숙까지 불을 지르고 말았으니, 본래 목조건물이 주를 이루었던 에도 시내가 화마(
火魔)에 휩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로써 훗날의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
도 나타날 일이 없게 되었지만...
다행히 중간에 비가 내려서 불길은 잡을 수 있었지만, 이미 에도 시내의 1/3 정도가
박지현과 이민화가 지른 방화(放火)로 인해 전소(全燒)되고 말았으니, 북풍한설(
北風寒雪) 몰아치는 한겨울에 이재민(罹災民)이 된 왜인들로 인해 막부는 또 다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공사님, 독일의 브란트 영사와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조선공사관 일등 서기관 김기수는 이렇게 말하며 브란트와 독일 외교관을 안내했다.
김기수의 안내를 받으며 윤정우가 기다리고 있는 공사실로 들어온 브란트는 윤정우를
향해 인사를 하며 악수를 건네다.
"안녕하십니까? 공사각하."
"어서 오십시오, 브란트 영사.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그동안 별 일 없으셨습니까?"
브란트는 윤정우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어떻게된 것이 조선사람들은 동양인답지 않게 이렇게 키가
클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을 하는 브란트였다.
사실 독일인들은 서양인 중에서도 비교적 키가 큰 편에 속하는 인종이었지만, 그런
독일인보다 더 키가 큰 조선외교관들을 볼 때마다 이런 의구심과 함께 약간은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브란트를 비롯한 독일외교관들과 윤정우를 비롯한 조선외교관들이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자, 잠시 날씨와 왜국의 사정, 그리고 영미 연합함대의 참사에
관한 일로 환담을 나누었다. 아무래도 무작정 조약을 체결하는 일로 들어가기에는
서로간에 조금은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의
가벼운 일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분위기는 금새 화기애애(和氣靄靄)해 졌다.
"영사께서는 귀국(貴國) 정부(政府)의 전권위임장(全權委任狀)을 가져오셨습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자 윤정우가 먼저 운(韻)을 뗏다.
이미 자신은 조정에서 독일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였다. 브란트가 독일정부의 전권위임장을 가져와서 교환만 하면,
나머지 세부적인 조항은 이미 어느 정도의 의견 접근을 이루었기에 조약의 체결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될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공사각하. 한 번 보시죠."
"아국의 전권위임장도 여기에 있습니다."
브란트가 전권위임장을 건네자 윤정우도 준비하고 있던 전권위임장을 건넸다.
브란트가 건네준 전권위임장은 각각 영어와 한문, 그리고 독일어로 작성돼 있었으며,
윤정우가 브란트에게 건네준 전권위임장은 각각 한글과 한문, 그리고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건네준 전권위임장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브란트는 한글이란 문자를 처음 보았기에 그 모양새를 대단히 신기해하며, 한글을
가리키며 윤정우에게 묻는다.
"각하, 이 문자가 무엇이오이까? 본관이 오랫동안 동양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지만
이렇게 생긴 문자는 처음 봅니다."
"아, 그 문자는 아국의 한글이라는 문자입니다."
"한글요?"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문자로 그 역사가 사뭇 유구(悠久)하답니다."
"오... 본관은 귀국에 이런 문자가 존재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조선에서 우리 문자인 한글이 천대받았던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역사와 독창성, 과학적 우수성에 있어서 따라올 문자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
"음... 그렇군요."
자그마한 조선에서 그 문자의 역사가 길면 얼마나 길 것이며,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날 것인가? 하는 생각을 브란트는 했지만 일단은 상대방을 추켜세워서 원만한
조약을 체결해야 했기에 이렇게 말했다.
윤정우는 브란트가 그런 생각을 하던지 말던지 신경도 쓰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미 조약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 합의가 된 걸로 아는데 어떻습니까? 아국에서
제의한 차관에 대해서 귀국 정부의 결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군요."
"음... 실은 그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브란트가 이렇게 말하자 윤정우는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사실 그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윤정우는 이미 지난 4월에 브란트에게 조약체결의 전제조건으로 대규모의 차관과
다른 몇 가지를 요구했는데, 다른 어느 것보다도 차관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에 이
모든 조약의 성사가 판가름난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 독일연방 정부에서는 귀국의 차관요구에 대해서..."
"..."
"승인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귀국이 요청한 이 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장기 저리로 제공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브란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윤정우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가장 걸림돌로 작용할 단서가 될 수도 있었는데 독일 정부에서는 파격적으로 조선
조정의 요구를 수용하다니... 그 기쁨이란 너무도 컸다.
"다행입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본관은 혹시라도 귀국 정부에서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본관도 귀국의 요구가 수용된 것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귀국에서
요청한 유학생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에서는 전폭적으로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영사께서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영사의 그러한 후의(厚意)에 진심으로
사의(謝儀)를 표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이 일을 계기로 귀국과 우리 독일 정부가 항구적인 동맹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소망입니다. 각하께서도 이러한 우리 정부와 본관의 뜻을
헤아려 주시고 우리 정부의 뜻을 귀국의 정부에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국에서 허다한 다른 서양 제국(諸國)을
제쳐두고 귀국을 아국의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걸요."
윤정우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며 사의를 표하자 당황한 것은 브란트였다.
그동안 뻣뻣하기가 이를 데 없던 윤정우가 진심으로 이렇게 경의를 표시하자
브란트의 마음도 뿌듯해졌다.
이렇게 체결된 조덕수호통상조약(朝德修好通商條約)은 다른 서양의 나라가 동양의
나라와 체결했던 불평등한 조약과는 달리 완전한 평등에 입각한 조약이었는데,
오히려 독일에서는 조선에 여러 가지의 특혜를 베풂으로써 조선 조정을 감격하게
했다. 그리고 조선과 독일 양국은 3개월 이내에 양국 정부의 비준을 받아 실행하기로
합의를 하였으며, 양국에 교환 설치될 공관에 대해서는,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1867년에 1월 이후에 설치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 독일 정부에서는
구구한 억측이 많았으나, 차차 밝혀지게 된다.
이렇게 체결된 조덕수호통상조약은 그동안 동방의 은둔국(隱遁國)이었던 조선이
국제사회에 한 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되는데, 그런 역사적인 조약이 체결된 오늘은
12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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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68 밝아오는 아침의 나라...8
번호:5082 글쓴이: yskevin
조회:220 날짜:2003/12/13 16:56
..
지난 회에 체결된 조덕상호통상조약에 관한 빠진 점을 안내해 드립니다.
양국 공관의 교환설치에 대해서 1867년 1월 이후에 설치하기로 한 것에 한가지를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약 성립의 대외적인 공표입니다. 조약이 성립되고 나서
대외적으로 공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조선과 덕국 간의 비밀로 하기로
하고 1867년 이후에 발표하기로 하는 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유는 나중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