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오! 이것이 바로 워리어급에서 자랑하는 8인치 주포(主砲)인가?"
"그렇습니다, 사령관 대감."
조선해군 운영요원들이 말끔히 치운 워리어급 아가멤논에 이순신함의 함장 김종완과
부함장 박종화, 그리고 풍백함의 함장 이원희 등 조선해군 수뇌부와 참모들이
올라와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김종완 등은 아가멤논의 건 데크(Gun-Deck)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4문의 8인치
주포와 24문의 7인치 부포(副砲)가 설치돼있는 아가멤논의 건 데크는 그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8인치 주포는 포수들이 얼마나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까만
포신(砲身)이 윤기가 반들반들할 정도로 잘 닦여져 있었다. 약 5도 정도의 기울기가
있는 포가(砲架)에 올려져 있는 8인치 주포는 함께 둘러보고 있던 조선해군의 다른
수뇌부의 기를 죽일 정도로 육중한, 그러면서도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조선해군 수뇌부들은 총 705명의 승무원과 해병대가 승선했던 아가멤논을 거의 피해
없이 무혈점령(無血占領)한 천군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김종완을 비롯한 해군 수뇌부와 참모들은 걸음을 함장실로 옮겼다.
따로 사령관실이 없었던 아가멤논함에서 영국해군의 로저스 제독이 사용하던
함장실은 어마어마했다.
한쪽에 마련된 식탁에는 여러 명의 장교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테이블에는 어제 밤의 마지막 파티를 짐작케 해주듯 기묘한 모양의
크리스탈 병에 위스키로 보이는 술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우유빛 벽지로 마감한
벽과 천장에는 몇 개의 등이 설치되어 있어 그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침실로 통하는 문 옆에 있는 커다란 소파와 그 한 가운데 있는, 어제까지만 해도
영국함대의 제독이나 아가멤논의 함장이 앉았을, 빅토리아풍의 의자에 김종완이
떡하니 앉으며 이렇게 말한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세요."
김종완을 따라온 수뇌부와 참모들은 분분히 소파에 앉았는데 이미 풍백함에도 이와
비슷한 양식(洋式) 소파와 의자, 탁자 등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앉았다.
"영감, 앞으로 영감께서 이 함을 맡아주셔야 겠소이다."
"소장(小將)이요?"
"그렇습니다. 영감이 아니면 누가 이런 거함(巨艦)의 함장을 맡겠소이까?"
김종완의 갑작스런 말에 풍백함의 함장 이원희는 당황했다.
자신이 비록 풍백함을 지휘한 지 1년이 넘어 나름대로는 양선(洋船)을 다루는데
일가견(一家見)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거함의 지휘는 의당 사련관인
김종완이나 천군 출신의 해군이 함장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김종완이 이렇게 말하자 이원희는 당황했다.
그리고 감격했다. 집안의 선조(先朝)이신 이순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이렇게 다시 조선해군이 최초로 보유한 막강 철갑선의 주인이 된다는 생각에
감격했고, 또 감격했다.
"아직 정식으로 조정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섭정공 합하께서도 이런 저의
뜻을 헤아려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일단 남양의 조선소로 돌아가서 여러 가지 개장(
改裝)을 해야겠지만 그 뒤로는 영감께서 이 함의 새 주인이 되시는 겝니다."
"황공하옵니다, 대감."
"그리고 부함장."
"말씀하시지요, 사령관 대감."
박종화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순신함에서야 다른 조선해군이 많지 않았기에 사령관님이나 함장님으로 호칭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조선해군의 쟁쟁(錚錚)한 수뇌부와 참모들이
모여 있었기에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부함장이 운사함의 승무원들과 우리가 데려온 운영요원을 지휘해서 아가멤논과
뉴 아이언사이드를 남양으로 몰고 가세요. 남양에 가면 우리 해군 조선소의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겝니다. 그리고 영감께서는 풍백함으로 이 두 함을 호위하도록
하시고요."
"알겠사옵니다, 사령관 대감."
"알겠사옵니다. 대감.... 하온데 대감 단독으로 법국의 함대를 상대하실
생각이시오이까?"
이원희는 풍백함으로 탈취한 두 함을 호위할 것을 김종완이 명하자 의구심을
나타내며 이렇게 물었다. 비록 이순신함의 당금(當今) 천하(天下)의 무적함(無敵艦)
이라고 할지라도 부하로서 상관을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왜요? 우리 이순신함이 적 함대에게 곤란이라도 겪을 것 같소이까?"
"그것은 아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영감께서 아시다시피 우리 이순신함은 천하무적입니다. 법국의
함대쯤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우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사령관 대감, 법국의 전함은 탈취하지 않으실 생각이시옵니까?"
"부함장은 그것이 궁금했었나?"
"그렇사옵니다, 사령관 대감."
김종완과 이원희 두 어른이 말씀을 나누시는데 끼여들기가 민망했지만 박종화는
김종완의 생각이 궁금했다. 지금 조선해군의 능력으로는 충분히 법국의 전함 몇 척은
가볍게 탈취할 수도 있었기에, 이순신함 단독으로 출정을 하는 것에 의구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 박종화의 궁금증은 다른 참모들도 한결같이 가지고 있는 의문이었다.
김종완은 좌중을 훑어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미 우리는 지금 세계의 최강 장갑함 두 척을 확보했습니다. 이 두 함은 앞으로
우리 조선해군의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법국의 함선 몇 척도 충분히
탈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운영요원의 부족에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양선의 지휘와 운용법은 하루아침에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꾸준히 준비한 덕분에 우선 두 척의 함선에서 근무할
운영요원을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이 이상은 솔직히 우리의 능력으로는 무리이고,
부담입니다. 더구나 오늘 밤 탈취한 이 두 함선을 안전하게 남양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인데 그 과제를 등한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자칫해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면 새벽에 고기잡이를 나오는 왜국 고깃배에게 발각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이 두 함선을 안전하게 남양으로 이동시키는 게
급선무입니다."
김종완의 말이 맞았다.
사실 모든 외국의 함선을 탈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 탈취할 함선에서 근무할 요원이
부족했다. 비록 지난 정초에 정식 해군이 출범했고, 이미 풍백함과 운사함을
진수시켜서 나름대로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서양 제국(諸國)에 비하면 아직
조선해군의 수준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함선을 운영할 요원도 없는 이런
마당에 애써 적함을 탈취해서 무엇할 것이며 탈취한 적함을 어떻게 조선까지 끌고 갈
것인가? 이순신함이 예인하면 될 것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참모도 있었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순신함의 엔진 출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것도 한 척까지만 가능했다.
탈취한 적함이 두 척이 넘으면 어림없는 얘기였고, 설사 어찌어찌해서 예인을 한다고
쳐도 중간에 다른 외국의 선박들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조선은 상당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었다.
그저 약간 포만감(飽滿感)이 느껴질 때 밥숟갈을 내려놓는 게 건강에도 좋았다.
"자, 모두 서두릅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해도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모두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일을 서둘러 주세요."
이렇게 말한 김종완은 수뇌부와 참모진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깜깜한 어둠이 지배하는 밤바다였지만, 자세히 그 밤바다를 바라보면 파괴된
적선의 부유물들과 시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김종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마음이 아팠다.
그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시체를 바라보며 느끼는 그런 연민과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고국을 떠나와서 머나먼 타국의 찬 바다에 몸을 누이고 있는 영미(英米)
연합함대(聯合艦隊) 승무원들의 죽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조선해군의 마음도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김종완은 이순신함으로 가는 주정(舟艇)에 오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모두들 서둘러 주세요. 최대한 빨리 이 해역(海域)을 벗어나서 남양을 귀환하세요.
그럼, 이만..."
"사령관 대감께 경례!"
"충--성"
"충성!"
"충성."
김종완은 이원희의 인사를 받으며 주정에 몸을 실었고, 김종완이 그렇게 떠나자
풍백함과 아가멤논 그리고 뉴 아이언사이드는 조선을 향해서 천천히 북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에 이순신함도 천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