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31화 (128/318)

11.

이순신함과 풍백함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영ㆍ미

연합함대의 사관이하 모든 수병들은 잔뜩 취해 있었다. 모처럼 위에서 음주(飮酒)를

허락하면서, 그동안 창고 속에 짱 박아둔 잭 다니엘(Jack Daniel)을 상자 째

꺼내놓고 오늘밤만큼은 마음껏 취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잭 다니엘은

옥수수를 증류해서 만든 버번 위스키의 상표명(商標名)인데, 증류한 버번 위스키를,

내부를 태운 오크통에서 이 년 동안 숙성시키면 불에 탄 오크통의 독특한 스모크향이

배여 나름대로 마실만하다.

미국의 수병들이 싸구려 잭 다니엘의 향에 취하고 있을 때 영국의 수병들도

스코틀랜드에서 보급된 위스키를 오늘만큼은 실컷 마시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유래 없이 이들이 이렇게 음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막부의

연락관 덕분이었다. 막부에서 파견한 연락관은 영ㆍ미 연합함대가 머무는 해역까지

와서 죠슈번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알리며 이제 그만 연합함대를 철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아직 왜국 조정에서 정식으로 조약칙허와 개세약허의 비준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섣불리 함대를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동안 양이(攘夷)의 선봉장(先鋒將)

이나 다름없던 죠슈번의 번주인 모리 요시지까가 지난 11월 11일 막부의 정벌군

총대장에게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모든 수병들에게 충분한 만큼의 술과 고기를 내렸고, 양국

함대의 지휘부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자축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 4개국의 연합함대가 구성될 수 있었던 것에는 미국의 힘이 컸었다. 아니

미국의 요청에 영국이 참여하고, 법국은 왜국에서의 이권을 얻을 생각에 따라서

참여한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야 마땅히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생색이나 내자는 심정으로 참여한 것이고... 이름하여 꿩 먹고 알 먹고 였다.

미국은 지난 1854년 체결된 미왜수호통상조약(米倭修好通商條約)의 조인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분란의 소지가 있었기에 그것을 바로 잡고

왜왕의 조약칙허(條約勅許)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실 미왜수교통상조약은 미국정부와 왜국정부 사이에 정식으로 체결된

국제조약이었다.

그런데 왜국의 실질적인 정부인 막부에서는 이 조약의 칙허를 왜국의 명목상의

정부인 왜왕의 조정에 신청하지 않고 1858년 무단(無斷)으로 조인(調印)하여

정치적으로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 미국정부는 이번 기회에 이것을 바로잡을

생각이었고, 영국과 법국, 네덜란드는 개세약허의 비준을 통하여 왜국의 평균 20%에

이르는 높은? 수입관세를 5%로 낮추면서 세관에 자국의 조수를 박아둠으로써 왜국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욕심에서 나선 것이다.

"자, 내 술도 한 잔 받으시오."

"감사합니다. 로저스 제독님."

존 로저스 제독은 이번 연합함대의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영국의 홍콩 주둔

해군사령관이었다. 그리고 그가 술을 권하는 상대는 미국의 뉴 아이언사이드의 함장

제임스 가드너였고, 가드너의 옆에는 역시 미국의 콜로라도의 함장 에드워드 포터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저스 제독의 옆에는 순양함 케이프타운과

포츠머스의 함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영ㆍ미 연합함대의 실질적인 기함(旗艦)인 아가멤논의 사령관 실에서는 영ㆍ미

양국의 해군 수뇌부가 자리를 함께 하며 죠슈번의 항복을 자축하고 있었다.

아가멤논은 세계최강의 장갑함인 워리어급 함정답게 길이가 무려 115.87M에 이르렀고,

전폭도 17.78M나 됐기에 사령관 실도 대단히 크고 화려했다.

한쪽 벽에는 영국함대의 사령관인 존 로저스 제독의 경력을 말해주는 여러 장의

사진과 그가 근무했던 인도의 지방 군주에게서 선물 받은 벽걸이용 융단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다른 한쪽의 벽에는 홍콩에 주둔하면서 새롭게 취미를 붙인

청국의 고서화들이 빼곡하게 장식돼 있었다. 그리고 마루 바닥에는 역시 인도에서

가져온 두툼한 비단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제독님께서는 막부의 요청을 수락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요청 말이오? 함대를 철수시켜달라는 요청 말이오?"

"그렇습니다."

콜로라도의 함장 포터 중령은 약간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이렇게 물었다.

로저스 제독에게 질문 한 포터 중령은 지난 1월 미국내전(米國內戰) 당시, 남군(南軍)

의 피셔요새(Fort Fisher) 공략전(攻略戰)에서 모니터함 마호팍(Mahopac)을 이끌고

남군에게 치명타를 안겨준 공로를 인정받아, 내전이 끝나자 프리깃함 콜로라도의

함장으로 승진한 인물이었다.

"중령의 생각은 어떻소?"

"음... 제 생각으로는 이제 그만 철수할 때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음...?"

"우리 함대가 무력시위를 한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됐고, 죠슈번도 막부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왜국의 왕과 막부에서는 우리의 요구조건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하지 않았잖소?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철수를 한다면 우리 연합함대의 위신은 어떻게 되겠소? 그

점은 생각해 보신 것이오? 포터 중령?"

로저스 제독은 영국인답지 않게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이런 성향은 인도와 홍콩에서 오래 근무하면서부터 생긴 버릇으로 동양(東洋)에

오래있으면서 저도 모르게 동양적인 사고에 젖어들었으니, 이제 막 동양에 부임한

식민지 촌놈에 포터 중령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포터의 머리 속에는 지금 온통 나가사끼로 돌아갈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왜국에 와서 나가사끼의 마루야마 유곽촌(遊廓村)의 왜녀(倭女)에게 푹

빠지고 나서는 상륙할 때면 어김없이 마루야마 유곽촌으로 달려가던 그였기에 더욱

그 생각이 간절했다. 벌써 두 달이 다 되도록 마루야마 유곽촌의 왜녀는 커녕 상륙도

못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의 이러한 생각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동안 연합함대가 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효고현 앞 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한 번 벌였을 뿐 달리 한 일이 없었다.

날이 밝으면 세또 내해를 한 바퀴 돌고 오고, 해가 지면 이렇게 시모노세키까지

돌아와 정박하기를 반복하는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가끔씩 보급선에서 싱싱한 야채를

비롯한 음식들과 석탄을 보급 받고, 본국의 가족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는 것으로

소일할 정도로 연합함대의 일상은 따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수병들의 불만도 고조되기에 이르렀는데 나가사끼에 있는

공사관에서 어떠한 연락이 오지 않는 한 이러한 일상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좀 더 기다려 봅시다. 나가사끼에 있는 우리의 공사관에도 지금쯤 죠슈번의

항복 소식이 전해졌을 겝니다. 그러면 무슨 명령이 있겠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이나 외교관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군인답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음..."

"음... 알겠습니다."

로저스 제독도 어찌 이런 따분한 일에 불만이 없겠는가.

그러나 이들과 달리 자신은 함대를 지휘하는 제독이었다. 그런 불만이 있더라도

함부로 입밖에 내뱉기에는 그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는 제독이라는 직함의 무게가

너무나 컸다.

포터 중령의 불만에 괜히 마음이 심란해진 로저스 제독은 자신의 잔을 채우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모처럼 마음껏 취해봅시다. 자! 건배."

"건배!"

"건배..."

"건배."

"..."

울적한 심사의 로저스 제독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술을 돌리며 권했다.

덕분에 양국의 지휘관들은 모처럼 대취(大醉)하게 되는데, 로저스 제독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뜨며 한 쪽에서 위스키를 홀짝거리던 부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보라우, 부관!"

"예, 제독님."

"오늘밤은 모든 수병들에게 아낌없이 술을 돌리라고 해. 그리고 경계병들과

견시수들에게도 한 잔씩 돌리고!"

"그렇지만 제독님..."

"어-허, 이 바다 한 가운데 어떤 미친놈이 온다고 그러나. 설마 저 노란 원숭이들이

쳐들어 올까봐? 노란 원숭이들이 그렇게도 겁나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내 명령대로 해, 오늘밤만큼은 마음껏 취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제독님."

처음의 기분 좋은 소식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이렇게 울적한 심사를 달래는 자리가

되고 말았으니, 오늘밤 이렇게 마시는 술이 이승에서 마시는 마지막 술이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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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65 밝아오는 아침의 나라...5

번호:5067  글쓴이:  yskevin

조회:127  날짜:2003/12/0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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