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윤정우는 이순신 함의 파견 요청 암호문을 조선으로 보내고, 바로 공사관 경비중대장
한성호를 불렀다. 나가사끼에 공사관을 설립하고 나서, 때로는 낭인(浪人로닌)으로,
때로는 승려로, 때로는 떠돌이 거렁뱅이로, 때로는 무사(武士)로 위장을 한 요원들이,
왜국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왜국의 주요한 자연환경이나, 인물, 지리, 정치상황
등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몇 가지 공작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성호를 부른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공사 님."
"아, 어서 오세요. 한 중대장. 앉아요."
"예. 헌데 무슨 일로...?"
한성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용무를 먼저 물었는데 막부의 감찰 구리모도
죠운이 다녀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와 관련된 일인 줄 짐작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어본 것이다.
"후후후...급하기는..."
"아... 예..."
"한 중대장의 급한 성격은 여전하고만, 이제 경비중대장이 된지도 꽤 됐는데 그런
성격 좀 고치면 안되나...?"
"아이구, 참... 공사 님도... 제 버릇 개주겠습니까? 헌데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막부의 동맹국 참관인 자격으로 막부의 죠슈번 정벌을
참관하게 되었소. 해서 몇몇 잠입과 암살에 능한 요원들을 파견하여 공작을 좀
벌여야겠소. 그리고 나를 따라 막부군으로 갈 요원들도 몇 명 필요하고..."
"그럼, 드디어 한 판 뜨는 겁니까?"
"그래, 드디어 한 판 뜨는 거야!"
한성호의 좋아하는 모습에 윤정우는 처음의 꽉 막힌 말투는 어디 가고 금새 편하게
말을 했다. 사실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한성호는 불만이 많았다.
처음 왜국에 건너올 때만해도 하마구리 어문의 변으로 말미암은 박진감 넘치는
칼싸움에도 참가하여 후련하게 싸울 수 있었으나, 그 뒤로는 공사관 경비나 서면서
따분한 일상을 보내야 했기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른 천군 출신 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군 출신 무관들이라면 일상적인 정보수집이라는 일이 재밌고, 신선할 수
있었으나, 천군 출신 무관들 대부분의 주특기가 잠입과 탈출, 파괴공작, 요인암살과
같은 특수한 것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왜국으로 파견 나올 때만해도 그런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피가 끓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왜국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정보수집 같은 하찮은? 일 아니면, 공사관 경비 같은 노가다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선에 있을 건데 괜히 왜국까지 나와서 생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하는 무관들이 많았다. 조선에 있었다면 지금쯤 자신들도 장가를 가서 마누라
궁둥이도 두드리고 토깽이 같은 자식새끼 낳고 할텐데 왜국으로 오는 바람에 남들 다
간 장가를 아직까지 가지 못했으니 그런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아... 일단 몇 개 조(組)의 요원들을 파견하여 몇 놈을 없애는 일이다."
"몇 놈을요? 그게 누군 데요...?"
"이 자료를 잘 봐라, 여기에 있는 자들은 필히 제거를 해야하는 놈들이다."
윤정우는 한성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는데 그 안에는 조선을 위해서, 또는
왜국의 가열찬 혼란(混亂)을 위해서, 사라져 줘야 할 자들의 명단이 있었다.
명단에 있는 숫자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채 열 명도 못되는 숫자였는데, 이름과 나이, 거주지, 행동양식, 지금 현재의 추정
위치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것을 본 한성호는 약간 실망을 하는데 겨우 열 명이 넘는 적은 수를 암살한다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서였다.
"근데 왜 이렇게 적어요? 한 백 놈쯤 죽이면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럼 이, 왜놈들
나라가 아주 잘 돌아갈 것 같은데...?"
"야! 무슨 전쟁할 일 있나?"
"아닙니다. 그저 그렇다는 거지요. 근데 사이고 다까모리(西鄕隆盛), 가쓰라 고고로(
桂小五郞), 나가오까 신따로(中岡愼太郞) 같은 애들은 이해가 가는데, 이와꾸라
도모미(岩倉具視)까지 없애야 합니까?"
"이와꾸라는 지금은 궁벽한 산골에서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왜국을 바꿔놓을 엄청난 책략이 숨어 있는 자(者)다. 필히 없애야 해."
"음... 알겠습니다."
이미 지난해(1864년) 사까모도 료마가 할복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사쓰마와 죠슈의 동맹(薩長同盟)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사이고와 가쓰라, 나가오까 같은 젊은 지사들은 반드시
없애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와꾸라 같은 경우에는 비록 궁벽한 산골에서 은거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그가 나중에 왜왕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는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실현시키는
책략을 내놓는 것으로 볼 때 그가 살아있다면 왜국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없애야할 필요가 있는 자였다.
한성호에게 이 점을 설명한 윤정우는 다시 말을 하는데 그 말에 한성호가 기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성호 자네는 공사관의 경비책임자답게 내가 없는 동안 공사관에 남아서
이곳을 잘 지키고 있어라."
"예? 저보고 공사관이나 지키고 있으라구요?"
"그래... 자네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기겠나..."
"아니, 다른 애들에게 맡기면 되는데 왜 하필 접니까?"
"이 사람이... 경비책임자가 공사관 경비를 맡아야지 어딜 가겠다고 그래! 하여튼
그렇게 알고 이번 공작에 참여할 요원들의 인선에나 신경 쓰라구..."
"우이...씨... 알았다구요... 공사 님은 나만 미워해..."
이렇게 말한 한성호의 입은 오리 입처럼 튀어나오는데, 모처럼 재밋는 일 좀 하는 가
싶었는데 겨우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윤정우의 그런 처사가 이해가 가는 게 다름 아닌 한성호가 공사관의 경비책임자라는
점과 나가사끼의 막부 행정청 관리들과도 잘 통한다는 점에서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