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24화 (121/318)

4.

운현궁 아재당에 홀로 앉아 있는 김영훈은 지금 굉장히 초조했다.

운현궁 안채에 있는 그의 아내 조씨가 첫 아이를 낳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밤부터 시작된 진통(陣痛)이 아침이 다 되도록 아직까지 어떤 소식이 없었기에

김영훈의 초조감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아내 조씨가 진통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장모가 산파를 데리고 달려왔지만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행여 무슨 불상사가 생길까 우려하여 전공이 산부인과가 아니지만 광혜원의 안연

원장을 부를 것을 아내에게 청해보았지만, 당시 남녀가 유별한 처지에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내밀(內密)한 모습을 외간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아무리 김영훈의

아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김영훈은 아재당에서 궐련만 피워대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피웠는지 놋쇠

재떨이에 구겨진 꽁초가 수북할 정도였고 옥수수 줄기를 이용해 만든 조악한 궐련의

필터는 얼마나 씹어댔던지 그 내용물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 정도였다.

21세기의 의료수준에 집착하는 한국여성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병원으로 바로

달려가서 아이를 낳든지 아니면 배를 갈라 안나오려는 아이를 억지로 꺼냈겠지만,

지금은 그런 21세기가 아닌 전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사고가 판을 치고 있는

19세기였다. 그리고 지금 시대의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시쳇말로 제사 밥을

떠놓고 일을 치르는 것과 같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으니, 김영훈이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경대신 김기현이나 대정원장 한상덕 같이 이미 애 아빠가 된 천군이 상당수

있었기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 별다르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이렇게 막상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을 하자

그렇게 담담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초조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니, 누가 그 모습을

봤다면 저 사람이 과연 섭정공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김영훈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김영훈이 막 다른 궐련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당기려고 하는 순간 밖에서 하인

춘삼이의 말소리가 들린다.

"합하, 소인 춘삼이옵니다."

"오! 그래 어떻게 됐는가?"

김영훈은 일국의 섭정공이라는 체통(體統)도 잊고, 아재당의 미닫이문을 활짝 열면서

이렇게 물었다. 평소의 김영훈의 모습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김영훈이 방문을 열고 이렇게 묻자 춘삼이란 하인은 순간 당황했지만, 자신도

아이를 기르는 어버이의 입장이었기에 그런 김영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춘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방금 마님께서 아기씨를 순산(順産)하셨사옵니다."

"뭐야! 그래? 아들인가? 딸인가?"

"사내 아기씨라고 들었사옵니다, 합하."

"오! 이럴 수가... 오!...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김영훈은 춘삼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대로 마당으로 뛰어 내려와 춘삼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는데, 춘삼으로서는 그저 황송하고 망극한 일이었으나, 김영훈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고맙다는 말만 연신 해대고 있었다.

"합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옵니다. 어서 마님께 가보시지요..."

춘삼이 이렇게 말하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김영훈은 흙 묻은 양말을 대충

바짓가랑이에다 쓱쓱 문지르더니 신발을 꾀어 신고 안채로 달려갔다.

안채에 도착한 김영훈은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장모(丈母)가 나오면서,

"어서 오시게."

하고 말하는데 이제야 자신의 딸이 제몫을 해냈구나 하는 안도하는 마음과

사내아이를 생산한 딸아이를 가진 어미로서의 뿌듯한 마음이 장모의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어떻습니까? 장모님. 그 사람은 괜찮습니까? 그리고 아이는요?"

"둘 다 무사하네, 어서 들어가 보시게."

그래도 사위가 자신의 딸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것을 본 장모는 흡족한 웃음을

머금으며 이렇게 말하는데, 김영훈은 그런 장모에게 깊숙이 허리를 한 번 굽히면서,

"그럼..."

하고, 말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여러 개의 병풍(屛風)이 겹겹이 펴져 있는 것이 행여나 찬바람이 들어올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그 병풍을 가만히 젖히고 들어가자 아랫목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내 조씨가 누워있었고, 그런 조씨의 오른 쪽 팔에는 핏덩이 같은

아이가 강보에 쌓여 있었는데 이미 목욕을 끝내고 초유(初乳)를 수유(授乳)했는지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다.

김영훈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조씨는 반색을 하고 배시시 웃으며 지아비를 반기는데,

사내아이를 순산했음인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대로 있어요. 힘들었을 텐데... 정말 수고했소."

김영훈은 땀에 절어있는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고, 아이의 자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아이의 얼굴은 어미의 뱃속에서

방금 나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쭈글쭈글 하였는데, 아직 얼굴 윤곽도 뚜렷하지

않은 것이 누구를 닮았는지 쉽게 분간이 가질 않았다.

"우리 아기 예쁘죠? 잘 생겼죠?"

"글쎄...?"

김영훈의 아내 조씨는 김영훈이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자 이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아이를 자랑하고 싶어하는데, 무심한 김영훈은 그런 조씨의 마음도 몰라주고

이렇게 말했지만 그런 말에 기죽을 조씨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당신을 닮았데요..."

"나를...?"

"그래요. 자세히 보면 당신의 오똑한 코와 영락없이 똑같데요. 내가봐도 그렇구요."

조씨는 아직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데, 그동안

김영훈과 같이 살면서 김영훈의 성격에 전염이 되었는지 당신이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이 21세기 현대 한국의 여느 아내와 다를 바 없는 말을 하였다.

그런 아내의 말을 들으며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실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감회는 남달랐다. 부모님을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누구보다도 먼저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고, 당신들의 손주를 안겨드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그의 마음은 아팠으며, 그래서 더욱 누워있는 아내와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김영훈과 조씨가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방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장모와 하녀였다.

하녀는 상보로 덮힌 커다란 쟁반 같은 것을 들고 오는데 아마도 미역국을 들고 오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장모는,

"이보시게, 사위. 한 원장 대감이 사위를 찾는고만..."

"한 원장이요?"

"그래,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그래요? 알겠습니다."

김영훈은 한 원장이 찾는 다는 장모의 말에 아내 조씨에게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서는데 그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조씨의 모습은 못내 서운하고

안타까운 눈치였다.

한상덕이 찾는다기에 김영훈은 대정원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에 마주치는 운현궁 식구들과 운현궁에 출입하는 관헌들이 너도나도 감축(

感祝) 드린다는 덕담(德談)을 하는 통에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가는 터라 김영훈의

발걸음은 자연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한 원장, 나요."

김영훈은 이렇게 말하고 방문을 여는데, 한상덕은 김영훈이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합하. 그리고 감축 드립니다."

"고맙소, 한 원장. 그래 무슨 일입니까?"

"아!... 방금 동래부사 신철균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그것은 바로 나가사끼의 윤정우

공사에게서 온 암호문이었습니다."

"그래요? 암호문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예, 윤 공사가 보낸 암호문에 의하면 지난 달 10일에 영국과 법국, 미국과 네덜란드

4개국의 연합함대가 왜국의 효고현 앞 바다에서 전함 9척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하고 막부 정부에게 몇 가지를 요구한 모양입니다. 그 처리를 둘러싸고 막부의 감찰

구리모도 죠운이 조언을 구하러 왔기에 몇 가지의 조언을 하고 죠슈번에 대한 막부의

토벌에서 윤 공사와 공사관 무관 몇몇이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하기로 했답니다. 한

번 보시지요."

한상덕이 내민 윤정우의 암호문을 건네 받은 김영훈은 그것을 세심하게 읽고 나더니,

"윤 공사가 잘하고 있구만. 한 원장의 생각은 어떻소? 저들 4개국 연합함대를

수장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음... 저도 윤 공사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일단 저들 4개국 함대의 위협에서 막부가

자유로울 수 없다면 윤 공사가 건의한 의견도 지켜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되면 막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서양 제국(諸國)에게 효고항까지 개항을 해주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그러면 왜왕(倭王)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힘을 얻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음..."

"그리고, 자칫 막부 내의 친(親) 조선 움직임에 제동이 걸려, 우리에게 의지하던

막부가 법국이나 미국을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막부가 정권을

더 잡고 있는 것이 여러모로 우리에게는 이로운 일입니다."

"한 원장 말이 맞습니다. 아직까지 왜국의 혼란이 더 지속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득이지요 그럼, 김종완 함장에게 왜국으로 출동하라고 명령을 내리세요.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가 직접 가서 김종완 함장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떻겠소?"

"합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뭐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남양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지난달에 진수한 운사함(

雲師艦)의 모습도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구요..."

지난해에 진수한 풍백함의 자매함인 운사함은 역모에 관련된 인사들의 참형이

한창이던 지난달 중순에 진수하였다. 풍백함 때와 같은 대대적인 진수식을 할 경황이

아니라서 그냥 해군 단독 행사로 진수식을 치르고 말지만, 그동안 김영훈은 아쉬운

마음이 많이 있었다.

김영훈의 이러한 뜻을 알아차린 한상덕은 짧게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혹시 막부의 장군이 앓고 있다는 병이 무슨 병인 줄 아십니까?"

"도꾸가와 이에모찌는 결핵을 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럼 우리가 보유한 결핵 치료제가 있습니까?"

"결핵 치료제는 왜...?"

"원래의 역사에서는 이에모찌라는 어린아이가 내년인가에 죽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 이에모찌라는 어린아이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몇 년 더 살아서 왜국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죽어야지요. 광혜원에

연락해서 결핵 치료제 중에 쓸만한 게 있는지 알아보고, 윤 공사에게 보내도록

하세요. 그렇게 해서 이에모찌라는 어린아이가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겝니다."

"알겠습니다, 합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