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에서 역모의 적발과 역도(逆徒)들의 처벌 문제로 시끄러울 때 왜국이라고 해서
조용하지 않았다. 아니 조선이 비교적 무난하게 일을 마무리지은 것과는 달리 왜국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 안이 시끄러웠다.
막부에서는 지난해(1864년) 있었던 하마구리 어문의 변에 대한 응징과 지난해부터
부활시킨 참관교대의 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죠슈번에 대한 토벌을 계획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제 1차 죠슈번 정벌이다
지난해에 이미 양이를 추구하는 죠슈번의 움직임에 분개한 영국(英國), 법국(法國),
미국(米國), 네덜란드(和蘭) 등 4개국 연합함대에 의해 시모노세키의 연안포대가
궤멸된 수모를 당했던 죠슈번으로서는 또 한번 막부의 정벌로 타격을 입기에
이르렀는데, 앞으로 있을 막부의 제 1차 죠슈번 원정에서 가장 크게 활약하는 이가
다름 아닌 나가사끼 주재 조선공사인 윤정우였다. 물론 아직은 죠슈번 정벌의 조짐이
보일 뿐이었지만 윤정우는 벌써부터 그 일에 깊숙하게 관여를 하게 된다. 그것도
막부의 요청에 의해서...
사실 죠슈번 정벌이 처음 결정난 때는 계해년(癸亥年1865년) 8월 2일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정벌군 사령관을 인선하는 문제가 난관에 부딪치면서 토벌이
미루어졌고, 외부적으로는 9월 10일 효고현 앞 바다에 나타나서 무력시위를 벌였던
4개국 연합함대로 인하여 또 다시 미루어졌다.
영국과 법국, 미국, 네덜란드의 4국 공사는 연명(聯名)으로 시모노세키 사건의
보상금 3분의 2를 받지 않는 대신에 조약의 칙허(勅許)와 효고항(港)을 조속히
개항할 것, 관세의 세율을 인하할 것 및 요코하마 세관에 영, 법, 미, 네덜란드의
4개국에서 보내는 조수(助手)를 1명씩 둘 것 등을 요구한 "개세약서"를 제시하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막부에서는 대집정 오구리 다다마사의 명으로 감찰인 구리모도
죠운이 직접 나가사끼의 조선공사관에 찾아와 조선공사 윤정우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의견을 물었다. 이미 지난해 윤정우의 의견을 받아들인 막부에서 참관교대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막부에 대항하는 제(諸) 번(藩)들의 움직임을 상당히 견제할 수
있었기에, 이번에도 조선공사 윤정우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부랴부랴 나가사끼로
달려온 것인데, 실상 왜국과 수교한 모든 나라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마땅히 기댈 수 있는 상대는 조선밖에 없었던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윤정우는 조선공사관에 찾아온 구리모도 죠운에게 몇 가지의 의견을 내놓았다.
첫 번째 의견은 4개국이 제시한 '개세약서'에 대한 인준을 불허(不許)할 것을
제시하였는데, 관세율을 인하하라는 것은 막부의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재정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 결국은 막부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왜국의 세관에 서양 4개국의
조수(助手)를 상주시킨다는 것은 주권국으로서는 취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함으로써,
차제에 왜국에 대한 4개국의 반(半) 식민지화를 촉발시킬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지금 막부의 힘으로는 4개국이 제시한 개세약서를 거부할 힘이 없으므로 일단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천천히 대응할 것을 권하였다.
두 번째 의견은 지난해 있었던 4개국 연합함대의 죠슈번 공격과 그에 따른 배상금
문제는 전적으로 4개국과 죠슈번 사이에 있었던 일인만큼 막부에서는 관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4개국에 설명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제 번의 막부에 대한 지지는 떨어질 수 있으나, 막부가 외국과의
협상에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기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의견이었다. 다만 그렇게되면 제 번에 대한 막부의 지도력이나 장악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 효고항의 개항을 요구하는 4개국의 요구는 절대로 받아드리지 말 것을
충고하였는데, 그 점은 오구리 다다마사나 구리모도 죠운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문제였다.
오사카의 코앞까지 개항을 하게 된다면 저들 서양 4개국이 교또에 있는 왜왕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할 수도 있었기에 막부에서도 그것에 대해 반대할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윤정우가 내놓은 의견은 자신을 비롯한 조선공사관의 무관 몇을 이번에
실시할 죠슈번 토벌에 동맹국 참관인 자격으로 참관할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윤정우의 갑작스런 참관 요청에 구리모도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참관을
허락하게 되는데 이미 많은 군사적 부분을 조선에 의지하고 있는 막부 측으로서는
조선공사의 참관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번 참관을 계기로 좀 더 많은
것을 조선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도 있었다.
윤정우는 그런 구리모도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넌지시 4개국 연합함대에 대한 것은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는데 구리모도는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지 계속해서
물었으나 윤정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저 "나중에 보시면 압니다." 한 마디에 불과
했다.
구리모도가 방문한 후로 윤정우는 급하게 서울에 있는 김영훈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통 썼다. 물론 천군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암호로 작성된 편지는 가장 빠른
선편으로 부산포로 향했는데, 마침 쥬신상사의 쥬신호가 조선으로 출발하고 없었기에
막부의 연락선을 이용하여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바로 조선에서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인 9월 18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