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로롱... 호로롱... 호롱....."
탈곡기(脫穀機)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후두둑하고 벼이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벼 베기가 끝난 논에서는 이렇게 탈곡기를 이용한 탈곡이 한창이었는데, 발로
굴러서 탈곡을 하는 족답식(足踏式)의 원추형 탈곡기는 농림도감의 의뢰를 받은
신기도감 신기창에서 생산한 것으로 원추형의 통에 역 V 자(字) 모양의 못이
촘촘하게 박혀있어서 발을 구르면서 벼이삭을 대기만 하면 알아서 나락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 여간 편리한 물건이 아니었다.
탈곡기는 작년에 이미 시제품이 나와 그 성능을 인정받고 올해부터는 전국의 모든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니 농민들의 일손을 한결 덜 수 있는 획기적인 농기계로
호평을 받고 있는 물건이었다.
보통 조선의 농민들은 탈곡기라는 어려운 이름보다는, 탈곡기를 발로 구를 때 호로롱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때문에 호롱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어이! 손돌이-- 어여 와서 새참 먹어!"
"알았구만요, 요것만 마저 허고 가겄구만요.---"
멀리서 새참 먹으라는 소리가 들리자 손돌이라 불린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이렇게
말하며 탈곡기의 발판을 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왼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로 오른 발로만 발판을 굴리느라 왼 발의 오금이 댕기고
허리도 아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탈곡기 덕분에 일손을 크게 덜 수 있었고, 그만큼
시간도 덜 수 있었기에 손돌이는 힘든 줄을 몰랐다. 행여 이삭이 달려있는 볏단이
다칠까 조심조심 탈곡기에 볏단을 대는 손돌이의 행동은 누가 봐도 갖은 정성을
다한다는 소리가 나올 법했다.
사실 이렇게 손돌이가 볏단을 소중히 여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볏단의
쓸모가 무궁무진(無窮無盡)했기 때문이다.
볏단은 보릿단과는 달리 쓸모가 아주 많았는데 우선, 농가의 중요한 노동력이자 부의
상징인 소를 먹이는 여물로도 사용할 수 있었고, 짚신을 엮는데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기도 하였으며, 초가집의 지붕을 올리는데도 사용되는 중요한 물건이었고,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엮거나 할 때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볏단이 하나라도 다칠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손돌이는 마지막 볏단을 탈곡하고 나서 허리춤에 꼬불쳐 논 면포를 빼어 들더니 온
몸을 탈탈 털면서 새참을 먹는 곳으로 향했다.
"아따, 이 사람아! 어여와서 새참 먹소. 뭔 일을 고로코롬 열심히 한당가?"
"아따, 형님도 이제 이 논의 곡식이 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인디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헌 일 아니든갑요?"
"참말로 자네도 그렇게 생각허는가?"
"아무렴요! 두고 보셔요. 필시 섭정공 합하께서 이 논을 우리들에게 나눠줄 꺼구만요.
"
손돌이가 이렇게 장담을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손돌이의 처(妻) 개똥어미가 쌀
됫박만큼 큰 함지에 보리가 많고 거기에 고구마가 드문드문 석인 밥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씰데 없는 소리허덜 말고 어여 밥이나 먹어요!"
개똥어미는 손돌의 함지에 콩나물과 고추장을 한 수저 떠주면서 이렇게 말하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만 있을 손돌이 아니었다.
"이눔의 여편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어디서 서방 말허는디 멀 허리를 짤르고
지랄여 지랄이!"
"알았구먼요, 알았응께, 어여 밥이나 먹어요. 이년이 잘못혔응께..."
손돌은 개똥어미가 이렇게 말하며 꼬랑지를 내리자 그제서야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함지에 담긴 밥을 수저로 푹푹 퍼먹는 모습이 영락없는 머슴이 밥을 먹는
것과 진배없었는데, 손돌이가 형님이라 부르는 창수 아범이 다시 한마디한다.
"참말로 그렇게만 되믄 내가 시방 죽어도 원이 없겄네..."
"우걱우걱... 쩝... 쩝... 두고 보셔요... 천군이 달리 천군이것어요? 글구 앞으로
좋은 시상이 올낀디 죽기는 왜 죽는담...?"
손돌이 입안 가득 밥을 밀어 넣고 이렇게 말하는데 개똥어미가 꽥하고 소리치며
탈곡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
"개똥아! 니가 시방 죽으려고 환장을 혔냐! 어여 이리 못 와!"
손돌이 저눔의 여편네가 뭔 일인데 저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냐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다름 아닌 손돌의 큰아들 개똥이가 탈곡기에서 나락을 털어
내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개똥어미는 개똥이에게로 뛰어가더니 이제 겨우 다섯 살
먹은 개똥이의 팔을 낚아채면서,
"이눔의 자식! 아부지가 호롱기 곁으로는 얼씬도 허지 말라는 소리혔냐? 안혔냐?"
하면서 개똥이의 궁둥이를 철썩 철썩 때리기 시작하는데, 삽시간에 조용한 들녘에
개똥이 우는 소리와 개똥어미 악 쓰는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사실 호롱기라 불리는 탈곡기는 아이들이 손대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발판을 구르는 힘에 의해 회전되는 탈곡기는 힘없는 아이들이 나락을 대고 있다가는
아이들의 손이나 몸뚱이까지 끌고 들어갈 소지가 다분했다.
탈곡기의 운동원리라는 것이 자전거가 전진하는 이치와 같았는데 한 번 발판을 굴러
회전하기 시작하면 탄력이 붙은 탈곡기는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른도 잘못하면 팔이나 몸뚱이까지 딸려갈 위험이 있었다. 하여 농림도감이나
신기창에서는 반드시 어른이 아니면 탈곡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엄한 사용지침까지
내리고 있었다.
탈곡기의 보급초기에는 탈곡기와 같은 신기한 물건을 처음 사용하는 조선의 백성들의
부주의로 사고도 많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계몽이 된 터라 그런 사고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함부로 맡기기에는 위험천만한 물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창수 아범은 개똥이와 개똥어미의 그런 실갱이를 보다가 고개를 황금 들녘으로
돌리며,
"아따! 그나저나 올해는 유래 없는 대풍(大豊)인갑네. 나락도 쭉쩡이가 거의 없는
것이 참말로 좋아 불고만..."
"그러게 말이요, 참말로 천군은 무신 재주가 그러코롬 좋은지 낱알도 많이 달린 게
자라기는 어찌 요로코롬 빨리 자라는 볍씨를 만들어 낸당가요...?"
손돌이는 창수 아범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밥을 담은 함지를 내려놓는데 수북한
함지 속의 밥은 다 어디로 가고 안에는 밥알 몇 개만이 남아서 뒹굴고 있었다.
손돌이가 내려는 함지를 유심히 쳐다보던 창수 아범은,
"이 사람, 손돌이!"
"말씀허셔요..."
"자네 쌀 미(米) 자가 왜 쌀 미 잔줄 아는가?"
"고것이 시방 뭔 소리다요?"
"이 사람아, 한문으로 왜 쌀을 미(米)라고 하는가 아냔 말일세!"
손돌이는 창수 아범의 느닷없는 한문 타령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소리 않고
있는데 창수 아범이 다시 말한다.
"쌀 미 자는 여덟 팔(八) 자가 두 개에다 열 십(十) 자가 하나 있는 모양이네."
이렇게 말한 창수 아범은 옆에 있는 얄팍한 돌을 하나 짚어들더니 손수 쌀 미 자를
파자(破字)를 하면서 쓰는데 역 팔 자와 열 십 자, 그리고 다시 여덟 팔자를 쓰는
것이 그렇게 놓고 보니 팔(八) 십(十) 팔(八)이 되었다.
"내가 동학에서 운영하는 야학에서 배웠는디, 우리가 농사짓는 이 쌀 한 톨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 같은 농사꾼의 손이 여든 여덟 번이나 거쳐야 비로소 한 알의 쌀이
나온다 그런 소리여. 내 말 알아 듣건는가?"
"그려서요?"
"그 만큼 많이 손이 가는 쌀 농사니께 우리 같은 농사꾼의 노고를 생각혀서라도 쌀
한 톨이라도 아껴야 한다 그 말이제... 헌데 자네의 그 함지를 보소, 어쩐가..."
그때서야 창수 아범이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가를 알아차린 손돌이는 자신의 발 앞에
있는 함지를 끌어오더니 박박 긁어서 한 알의 밥알도 없게 먹어 치웠다.
원래 벼농사를 짓는데 한반도의 지형과 기후는 잘 맞지 않았다.
벼라는 작물은 원래가 열대나 아열대지방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었으니,
열대지방에서는 그냥 씨 뿌려 놓고 나중에 낫질해서 수확만 하면 될 정도로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달랐다.
열대지방에서 그렇게 쉽게 벼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것에 비해, 엄밀히 말해서
한대지방의 기후에 가까운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일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까다롭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쌀 농사를 굳이 하였느냐? 거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단위면적 당
수확량 때문이었다.
보리나 밀이 한 알의 씨앗을 뿌리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약 15배에서 30배
정도에 불과한데, 쌀은 한 알의 씨앗을 가지고 약 130배 이상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은 좁은 국토에서 많은 수확량을 자랑하는 쌀만이 우리 조상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하였으니, 그렇게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는 쌀 농사를 지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헌디 정말로 섭정공 합하께서 우리 같은 가난뱅이 무지렁이헌티 논을 나놔 줄랑가?"
"아따, 형님은 참말로, 지난 봄에 서원 철폐헐 때 못 봤소? 서원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전답(田畓)들을 소작인에게 나놔 준 것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허요?"
"그럴까? 참말로 그럴까?"
"걱정 허덜 마소! 섭정공 합하가 어떤 분이신디..."
손돌은 이렇게 말하고 뒤 춤에 꽂아둔 곰방대를 꺼내더니 담배를 재기 시작했다.
이내 담배를 다 재더니 성냥을 탁하니 키면서 담배를 빨아 재끼는데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너른 들녘을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손돌과 창수 아범이 탈곡을 하고 있는 논(畓)은 원래는 수원유수(水原留守)
이유원 소유의 논이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이유원의 전답은 모두 합쳐서 10만
결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는데, 이유원이 지난 7월에 역모(逆謀)를 꾀하다 일가(
一家)가 모조리 도륙(屠戮)나고, 그의 재산이나 토지, 등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게
되었고, 딸린 노비는 해방되었다.
아직까지 조정의 섭정공 김영훈은 그에 따른 후속조치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섭정공과 천군이 그동안 해온 일을 보더라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줄
것이라는 짐작과 기대는 누구라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