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정원에서 충청도 제천으로 파견 나온 단종진은 지금 자신의 위장 처소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제천 땅으로 잠입하여 단순한
농사꾼인양 살아오길 얼마였던가. 무려 넉 달만에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확실한
단서를 손에 쥔 것이다.
단종진의 두 손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이것인가?...오..."
몇 번을 보고 또 보았다.
틀림없었다. 민승호와 남종삼의 수결(手決)이 확실해 보였다.
"정말 고생했네. 정말 고생했어."
"고생은유... 쇤네는 그저 나으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걸유..."
"아니야, 아니야... 자네 덕분에 모든 일이 원만히 끝날 수 있었네, 이 모든 일이
자네의 공일세."
"이제 쇤네는 그 집에 갈 면목이 없구먼유. 글허구 가고 싶지도 않구유..."
단종진의 치사에 앞에 있는 아낙은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낙의 이름은 바로 이선이(李先伊).
배론 땅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던 과부로 나름대로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
이선이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천주교 신자들은 이선이를 돕는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맡기기도 하였으며 품삯도 후하게 쳐주곤 했다.
이선이는 천주교 신도들의 후의(厚意)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천주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이선이에게도 한 가지 말못할 아쉬움 같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남정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전 남편이 허무하게 죽고 나서 십 년을 하루같이 수절한 이선이였지만, 남정네 없이
잠드는 고통이 뼈에 사무친 그녀였기에 위장 잠입한 단종진의 눈에 포착되어
하루아침에 천주교를 배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이선이는 단종진을 위한
일이라는 명목으로 남종삼의 거처에서 남종삼이 그렇게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면서
숨겨놨던 약정서(約定書)를 빼 돌린 것이다.
사실 이선이는 그동안 나름대로 천주교 사회에서 신망을 쌓아왔다.
그동안 배론 천주교 공동체에서 온갖 궂은 일은 마다하지 않고 도맡아 해왔으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던 이선이였다. 그런 이선이였기에
천주교 사회에서도 근면과 성실함을 인정을 받게 되었고, 남종삼이 머무는 배론 집의
청소도 도맡아서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이선이도 남자를 위한다는 명목에
종교를 팔고 교우(敎友)들을 팔게되었으니, 이선이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여인이었다.
"일단 자네는 내가 이른 곳으로 피신해 있게, 나는 이 길로 서울로 갈 것이니."
"알겄구먼유, 근디 반드시 쇤네를 데리러 오실거지유?"
"이를 말인가. 내가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자네를 데리러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단종진은 이렇게 말하며 이선이의 궁둥이를 토닥거린다.
이선이도 그런 단종진의 손길이 싫지 만은 않은지 단종진의 품속으로 슬며시
파고들었다.
"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먼유, 나으리만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구먼유."
"어-허, 그런 소리 하지 말래두."
"예..."
처음 단종진이 이선이에게 접근할 때만해도 그저 단순하게 정보만을 빼내기 위한
접근이었으나, 나름대로 싹싹하고 후덕한 이선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
단종진이었다.
그리고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단종진이었기에, 비록 흠집이 있는
여자였지만 이런 여자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번 일만
끝나면 이선이를 정식으로 맞아들일 생각까지 하게된 것이다.
"어서 간단하게 보따리를 꾸리게, 나는 이 길로 서울로 갈 것이니, 어서!"
"보따리는 진즉에 꾸려 놨구먼유."
이선이는 단종진의 재촉이 못내 아쉬운 듯 이렇게 말하며 벽장에서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낸다. 그리고 그런 이선이를 보면서 단종진은 한 번 더 다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내가 이른 곳에 가면 우리 동료들이 안전하게 자네를 지켜줄 걸세. 내가 다시 올
동안 꼼짝 말고 거기에 있어야 하네, 알아듣겠는가?"
"알겄구먼유, 쇤네 걱정은 허덜 말고 나으리 일이나 후딱 끝내고 오셔유."
"그럼, 나 가네."
"조심허셔유."
단종진은 그 길로 그동안 위장 생활을 하고 있던 허름한 초가를 빠져 나와 제천 땅의
역참(驛站)으로 달려갔다. 이때가 막바지 폭염이 기승(氣勝)을 부리던 7월 24일
아침나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