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을 지나 일명 '살곶이다리'라고 불리는 전관교(箭串橋)를
지나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경기도 고양주를 거쳐 강원도
강릉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송파(松坡)를 거쳐 경기도 광주,
이천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 길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모든 통행인들과 물동량이 운집하는 곳답게
번잡했다.
지금 그 길을 따라 등짐장수로 위장한 장순규와 정순남이 한 사내를 미행(尾行)하고
있었다.
지난 계해년(癸亥年) 섣달 그동안 줄 곳 모시던 주인인 흥선이 하루아침에 죽고 나서
한상덕이 이끄는 대정원의 요원으로 발탁된 장순규와 역시 처음부터 천군을 따라와
대정원 요원이 된 정순남은 약 30보 정도를 사이에 두고 한 사내를 미행하고
있었는데, 그 사내는 가끔씩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청파 연화봉(蓮花峰) 밑 마을에서부터 미행하고 있는 사내는 그동안 대정원에서 끊질
기게 추적하고 있던 검계(劍契)의 우두머리 기(奇)가였다.
사실 기가는 대정원의 촉수에 처음부터 드러나 있던 사내는 아니었다.
그저 우연찮게 이최응을 감시하던 장순규와 정순남에게 신분이 노출된 것뿐이었다.
전혀 이최응과 같은 종친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의 사내가 이최응의 집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장순규와 정순남은 근 한 달 동안의 미행과 탐문(
探問) 끝에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사내가 바로 세간(世間)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검계의 우두머리였다.
"형님, 저눔아가 어디로 가는 것이다요? 시방?"
정순남은 뙤약볕 내리쬐는 폭염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면포로 닦으며 이렇게 물었다.
등에 맨 등짐의 무게가 부담스러운지 어깨를 한 번 추켜세우고 정순남이었다.
정순남은 장순규보다 몇 살이 적었기에 자연스럽게 장순규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지난 1년 반 동안 대정원에서 일하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해왔기에 두 사람은
형제와도 같은 끈끈한 정으로 뭉쳐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천하장안과 대정원
요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순규는 그런 정순남을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왜? 등짐이 무거운가?"
"아닙니다요. 다만 서울을 빠져나온 저눔아가 도대체 어디까지 갈랑가 모르는 일잉께
하는 소리지요잉."
"글쎄...? 내 생각에는 경기도 어디쯤으로 가는 것 같은데..."
장순규의 하나마나 한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정순남은 속으로 '저런 육실헐 놈이
도대체 뭔 일로 어디까지 가는디 사람을 요로코롬 욕을 보이는 거여 시방...' 하는
욕을 하며 칵하고 가래침을 뱉는다.
흔히들 검계라고 하면 조선시대 민중 저항운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검계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렇게 거창한 민중 저항조직이 아닌
그저 양반 사대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조선 사회의 반항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비밀 조직으로 주로 사회에서 소외 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일반 민중들이 그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외 받고 억압받아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중 저항조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이 취한 행태는 민중 저항 조직이라기 보다는 그저 단순한 조선시대의
조직 폭력배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검계의 출발은 향도계(香徒契)에서 찾을 수 있다.
향도계란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친목계(親睦契)였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검계가 되었다. 주로 하는 일은 양반들을 살육하고, 부녀자를 납치
강간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었다.
숙종 시절에 처음 등장하다가 영조 시대에 포도대장(捕盜大將) 장붕익(張鵬翼)에
의해 일망타진(一網打盡)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후에 순조 시대에도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봐 그 뿌리까지 제거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검계원(員)은 주로 색주가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면서 생활하기도 하고, 아예 기방을
차려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의 등골을 빼먹으면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는 짓이 지금의 조폭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교량으로는 최장인 길이 76m, 폭 6m로 당시 한양과 동남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도성내의 금천교, 수표교와 함께 유명한 다리다. 물론
동남방으로 가려면 한강진에서 말죽거리로 가는 통로로 있으나 세 곳으로 연결되는
살곶이다리가 특히 유명하였다.
살곶이다리를 지나자 기가는 광주 방면을 가는 것인지 오른쪽에 난 길로 방향을
틀었다.
가끔 두리번거리며 걷는 품새가 역시 누군가의 미행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행인과 우마차가 다니는 그 길에서 설령 미행 당하는 줄 안다고 해도 그
미행자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전혀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상황에서 장순규와 정순남의 미행을 눈치채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기가는 그저 습관적으로 두리번거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기가는 광주부(廣州府)로 접어들더니 광주 외곽에 산재한 사요(私窯)
중에서 어느 허름한 곳을 찾아 기어들어 간다.
"어! 형님, 저눔아가 요상시런 곳으로 들어가는데요잉?"
장순규는 정순남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좀 하게."
이렇게 면박을 준다.
정순남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 장순규의 심각한 얼굴에 그
소리가 쏙 들어가고 만다.
잠시 후 기가는 어느 중늙은이 한 사람과 나오는데 등에는 길쭉한 봇짐 같은 것을 맨
것이 들어갈 때와는 사뭇 그 모양새가 달랐다.
기가는 사요에서 나온 중늙은이는 주변을 잠시 경계하다가 걸음을 옮긴다.
광주 외곽의 사요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남한산(南漢山)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장순규와 정순남은 미행에 더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남한산으로 접어들수록 사람의 발길은 끊어지기 시작했으니 장순규와 정순남은
저들이 갈만한 곳을 예상하고 미리 갈 것을 생각하였는데, 원래부터 고향이
용인이었던 장순규는 이 일대가 손바닥을 보듯이 훤했으며, 지난 해 남한산성(
南漢山城)에 주둔하고 있는 친위천군에게서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특공무술에 대한
위탁교육을 받았을 때 이곳 남한산 일대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았던 장순규와
정순남이었기에 저 두 사람이 어디 방향을 잡고 가는지만 알아도 대략 어디를
목적지로 하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역시 장순규의 예측이 맞았다.
기가와 사요에서 나온 중늙은이는 지금 장순규와 정순남이 매복하고 있는 바로 언덕
아래의 공터로 왔다. 장순규와 정순남이 매복하고 있는 곳과는 거의 150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공터는 주변이 울창한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곳이 있는 줄 짐작도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숨어서 무슨 음모를 꾸미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장소였다.
기가와 중늙은이는 등에 지고 온 것을 벗어놓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잠시 쉬다가,
등짐의 주둥이를 열고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한다.
기가와 중늙은이가 꺼내는 것을 보고 정순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심결에 뭐라고
소리치려고 하는데 장순규의 손이 재빨리 그런 정순남의 입을 틀어막는다.
입이 장순규의 큼지막한 손에 막힌 정순남은 속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59 휘몰아치는 태풍(颱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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