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절은 어느덧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장마도 지나고, 이제는 절기(節氣) 상으로 소서(小暑)와 대서(大暑)
를 지나 입추(立秋)로 들어서고 있는데 이 땅에는 참외니 수박이니 하는 여름 과일도
들어가고 이제는 복숭아와 포도가 나오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난 여름 조선의 백성들은 햇밀과 보리, 풍족한 채소로 만든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었으니 여름의 풍요로움이 바로 그런 것에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들녘에는 벌써부터 겨울 김장을 위한 무와 배추를 심느라고 농사짓는 백성들의
허리는 하루도 펴질 날이 없는 때가 또 지금이기도 했다.
여름이 물러가기 싫은지 며칠 째 막바지 폭염(暴炎)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氣勝)을 부리고 있어서 그런지 전통 한옥(韓屋) 양식인
외무부의 모든 건물들이 들창문을 활짝 열어서 위로 들어 올려, 처마 밑에 달려 있는
고리에 걸면 시원한 바람이 이쪽 저쪽에서 불어 들어온다. 이 방문도 그렇게 올렸고
저 방문도 그렇게 들어 올렸다.
점심을 근처에 새로 생긴 음식점에서 먹고 온 민치상은 느긋한 걸음으로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전 같으면 집에서 하인들이 점심상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을
것이나 섭정공 김영훈이 그런 폐단을 금지할 것을 정한 후로 이렇게 근처 식당이나
허름한 주막에서 점심을 해결하였으니 때 아니게 12부 거리에는 음식장사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민치상이 이렇게 점심을 먹고 자신의 집무실로 통하는 회랑(回廊)을 지나가고 있는데
열려진 문 사이로 외무부 소속 관헌 두 사람이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민치상이 방으로 들어서자 그 관헌 둘은
황급히 뭔가를 뒤로 감추며 인사를 한다.
민치상은 뭔가를 감추는 모습에 더욱 그것이 궁금해지는 것을 느낀다.
"뭘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소란스러운가? 어디 한 번 줘보게."
지적을 받은 관헌은 잠시 쭈뼛쭈뼛하며 쉽사리 꺼내놓지를 않는 것이 뭔가 민치상이
알아서는 안될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허... 그것이 뭐냐니까? 어서 이리 내놓지 못할까?"
거듭되는 민치상의 호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관헌은 뒤로 감춘 것을 내놓는다.
관헌이 건넨 종이 쪽지를 본 민치상은 순간 정신이 멍했다. 뭔가 알아 볼 수 없는
꼬부랑 글씨가 잔뜩 써 있는 것이 필시 양이의 글씨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종이냐?"
"..."
"..."
"어-허, 정녕 네 놈들이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서슬 퍼런 민치상의 호통에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한 그 관헌이 사실대로 말하길 그
종이는 바로 아라사(俄羅斯)의 총독 무라비예프의 답신이라는 것이다.
민치상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걸 느낀다.
비록 이름뿐인 외무차관이었지만 이런 중차대(重且大)한 일을 자신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처리하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시 운현궁에서 주도가
되어 벌인 일이겠지만 자신에게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번에는 외무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청국에 공사관을 설립한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러시아와의 외교서신 교환이라니...
사실 말이 외무차관이지 그동안 민치상은 조정에서 소외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인 출신의 외무대신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어야 했으며, 천군이나 중인 출신의
아랫것들까지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뒤통수가 가려운 것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청국에 공사관을 설치한다는 소식이 운현궁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왔을 때에도
그러려니 했었다. 중인 출신의 오경석을 그 공사관의 책임자로 임명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던 민치상이었다. 그러나 한 술 더 떠서
빌어먹을 운현궁과 외무대신 유후조는 자신에게 한 마디의 상의나 통보도 없이
급기야는 아라사와의 외교서신 교환이라는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
어차피 유후조는 지난 안동 김씨 세도 시절에 남인이라는 이유로 찬밥을 먹었던 터라
자신을 등용해준 섭정공과 천군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해도
너무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운현궁의 지시였다지만 일국의 외무대신이라는 자(者)가
외무차관인 자신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외교서신을 교환하다니, 그것도
미수교국(未修交國)인 아라사와 이런 일을 벌이다니 도저히 묵과(默過)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격노한 민치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 길로 외무대신 유후조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마친 유후조는 자리에 있었다.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낸 민치상은 유후조의 집무실 여닫이문을 소리내서 열고
들어온다.
"어서 오시오, 하당(荷堂)."
넉살도 좋게 유후조는 합죽선(合竹扇)을 살랑살랑 부치면서 웃는 낯으로 민치상의 호(
號)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민치상은 속으로는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하고, 다만
인상만 찌푸린 채 찾아온 용건부터 말한다.
"대감, 이러 실 수가 있사옵니까?"
"무엇을 말이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응수하는 유후조의 능청스러운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낀 민치상은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오이까?"
이렇게 말한 민치상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 비슷한 것을 탕하는 소리와 함께 유후조
앞의 탁자에 내려놓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러시아 동 시베리아 총독인 무라비예프의
답신이었다.
민치상이 내려놓은 것은 바로 무라비예프의 답신임을 확인한 유후조의 안색은 눈에
띠게 창백해져 갔다.
유후조는 민치상의 호통에 절절매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 그것은 내가 하당에게 말씀드리려고 했소이다. 자, 자 고정하시고 내 말을 좀
들어보세요."
유후조의 이런 움직임에 약간은 마음이 풀리는 민치상이었으나, 그 다음 말에 다시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유후조의 말은 계속된다.
"하당이나 나나 모두가 섭정공 합하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오이까? 괜히
그 분의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하당 영감."
유후조는 말끝에 '영감'을 붙이면서 말꼬리를 살짝 올리며 약간은 놀리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명백하게 민치상을 희롱하는 듯 보였다.
지난해에 있었던 천군 장가들이기 운동에서 유후조도 역시 다른 권신(權臣)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녀딸을 천군에게 시집을 보냈기에 김영훈과 천군에게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아니, 지난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던 처지였던 유후조에게
외무대신이라는 큼지막한 감투를 씌워줬기에 그런 혼인도 가능했으리라.
이런 유후조의 말에 성질을 불끈하고 솟는 것을 느낀 민치상은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쾅하고 열면서 나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