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09화 (107/318)

103.

"어서 오시오."

"안녕하십니까? 총독각하!"

지금 최현필과 대정원 요원들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총독 무라비예프의 관저에 와

있었다. 며칠 전에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의 안내를 받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온 최현필 일행은 연락을 받고 영접을 나온 행정청 관리와 함께 이곳 총독 관저로

와서 이렇게 시베리아 일대의 지배자인 무라비예프와 만나게 된 것이다.

지난 해 보낸 통상요구 서한에 대한 아무런 답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조선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을 무라비예프는 결코 소홀하게 접대하지 않았다.

직급으로 따지면 결코 자신이 이렇게 함부로 만나줄 상대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최초로 건너온 외교사신이라는 점과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조선 정부의 외교서신을

휴대하고 왔다는 점에서 그 내용에 관계없이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무라비예프였기에 최현필 일행을 맞는 그의 표정은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토록 원하는 조선과의 통교가 자신의 손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라비예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라비예프의 총독 관저는 훌륭했다.

이제 겨우 지어진지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총독 관저는 잘 관리되어

있었으며, 그동안 러시아인들이 사냥한 각종 야생동물들의 박제나 머리 장식이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이 꽤나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최현필은 무라비예프의 환대에 깔끔한 러시아어로 이렇게 말하며 옆에서 배석한

박승인에게서 조선에서부터 준비해 가지고온 선물 꾸러미를 넘겨받으며 이렇게

말한다.

"총독각하, 이것은 아국에서 나는 인삼을 가공한 홍삼이라는 것인데 아국 조정이

각하께 드리는 약소한 선물입니다. 받아 주시지요."

무라비예프는 최현필이 건네준 홍삼꾸러미를 받고서 빨간 보자기에 싼 홍삼 꾸러미를

열어보는데 그 안에는 연한 우윳빛을 띤 자기(瓷器)에 쌓인 홍삼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황금빛이 나는 여러 가지 꽃 그림이 상감 되어 있는 자기는 그 가치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홍삼의 효능과 가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무라비예프였으나 조선의

자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던 터라 그 눈부신 자태에 감탄성이

절로 튀어 나왔다.

"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정말 고맙소. 소령."

"약소합니다. 마음에는 드십니까?"

이미 극동에서 여러 해를 살았고, 청국인들과 접촉한 경험으로 인해, 동양인의

겸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무라비예프에게 최현필은 품속에서 한 가지

편지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아국 외무부의 외무대신께서 각하께 전해드리라는 문서입니다."

최현필이 건네준 봉투에는 한글과 한문, 그리고 영어와, 불어, 러시아어로 쓰여진

다섯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각각의 내용은 같은 것이었다.

<조선국 외무대신(外務大臣) 유후조가 아라사국 동(東)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예프

백작 각하께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각하께서 지난해(1864년) 아국 조정에 보내 편지와 예물은 잘 받았습니다.

각하의 후의(厚意)와 배려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이렇게 답신이

늦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번에 각하께서 보내신 편지에서 언급한 양국 간의 통상요구에 대해서 그동안

아국의 조정에서는 그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심사숙고(深思熟考)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각하의 그러한 요구는 아직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각하께서 보여준 그동안의 후의는 가슴 깊이 새기고 있을 것이나, 아국의 사정이

귀국과의 통상을 허락하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이 아직은 미흡합니다.

더더군다나 아직까지 청국에 신속(臣屬)하고 있는 아국의 처지로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여, 부득이하게 각하의 그러한 뜻은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

본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은 장래에 수교와 통상의 길이 열릴 것을 본관은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아국과 귀국과는 이미 국경선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국 조정에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니 각하의 뜻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사료됩니다. 부디 각하께서는 이러한 점을 잘 살피시어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각하의 앞날에 무궁한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국 외무대신 유후조 올림.>

"으... 음..."

무라비예프는 편지를 다 읽고 이렇게 침음성을 흘렸다.

내심으로는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어쩌면 그의 실망감은 말 할 수 없이

컸으리라. 다행인 것이 있다면 편지의 말미에 머지 않은 장래에 수교와 통상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그 머지

않은 장래가 1년 후가 될지, 아니면 10년 후가 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기에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무라비예프였다.

"소령은 이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소?"

"편지는 살펴본 바 없으나 이미 본국을 출발할 때 그에 대한 내용을 설명 받았습니다.

"

무라비예의 약간은 따지는 듯한 이런 힐난조의 질문에 최현필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잘도 피해갔다. 무라비예프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시지 않자 최현필은

다시 말한다.

"각하!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될 일도 아니

된다는 우리 조선의 속담이 있습니다."

"소령은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오?"

자신을 비꼬는 듯한 최현필의 말에 무라비예프는 이렇게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최현필이 단지 러시아 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견됐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일반 조선 사람이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당장 오금이 저리면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였을 것이나, 최현필은 다름 아닌 천군이었다.

조선 사람은 물론이고 서양의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이들이 바로

천군이었다.

최현필은 그런 천군의 일원답게 무라비예프를 잘 다독이기 시작한다.

"어차피 귀국과 아국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얼마나 아국에서

귀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차츰차츰 교류가 이어지다 보면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머지 않은 장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각하."

"으음..."

"지금 아국의 사정상 다른 서양의 여러 나라와 통상을 한다든지 수교를 한다든지

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아국의 사정이 안정되고 주변 여건이 성숙해지면 반드시

머지 않은 장래에 각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현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난해에 보낸 통상요구 서한의 답신이 그동안 없었기에 무라비예프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렇게 완곡한 거절의 답신이지만 답신이라도 오지 않았는가,

더구나 최현필의 말대로 차근차근 교류의 수위를 높이다 보면 자신의 임기 내에

어떻게든 결판이 나지 않겠는가. 청국과 조선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무라비예프의

머리는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한다. 조선과의 수교와 통상이라는 큼지막한 업적을

남긴다면 자신의 숙원인 중앙 정치 무대로의 진출도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 무라비예프는 최현필을 잘 구슬려야 앞으로 있을 조선과의

관계가 잘 풀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알겠소, 내 소령의 말대로 참고 기다릴 것이오. 이렇게 우호를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겠지. 그나저나 부하들에게 듣기론 조선의 유민들의 실상에

대한 조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각하. 연전(年前)에 아국의 유민들이 대량으로 월경을 하여 귀국에

정착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들의 정확한 숫자와 이왕이면 그들의 사는 모습도 좀

확인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실상 최현필과 대정원 요원들이 이렇게 러시아를 방문한 뜻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조선에서 러시아로 월경한 정확한 유민의 숫자를 파악하고 더불어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는 동 시베리아 일대의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이 이번 방문의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겉으로는 우호관계의 끈을 만드는 것에 있었지만 그 우호관계의 끈을 이용한 공작은

나중을 위한 포석이었다. 일단은 중요한 것이 바로 러시아의 정확한 정보를 얻는

일이 중요했다.

이러한 일을 알리 없는 무라비예프는 일단 조선에서 온 사신이라면 사신이라고 할 수

있는 최현필 일행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협조할 생각을 했다.

무라비예프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잘 살려 수교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당면한 목표나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최현필이 준 홍삼 선물보다도 그 홍삼을 담고 있는 자기가 더

마음에 든 무라비예프는 어떻게든 조선의 자기를 수입하여 유럽으로 팔 수만 있다면

막대한 이득은 따 놓은 당상처럼 느껴졌다. 하여 최현필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알겠소, 최대한 소령의 조사에 협조하라고 지시하겠소."

"감사합니다. 총독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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