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다음날 오후가 되자 경흥부의 동헌에서는 전날과 똑같은 강의가 벌어졌다.
전날에 최현필이 예고한 바대로 오늘은 간도문제와 연해주가 러시아로 편입된 과정을
마저 강의하는 시간이었다.
최현필은 세계전도를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어제 배운 것들 중에서 한가지 빠진 부분을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자!
여기를 보십시오. 여기가 바로 사할린(Sakhalin) 섬이라는 곳입니다."
최현필은 지도에 나와 있는 사할린 섬을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한다.
"이 사할린 섬과 대륙(大陸)사이에는 타타르 해협(海峽)이라는 바다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가 흑룡강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하구(河口)입니다."
최현필의 지휘봉인 가리키는 곳은 타타르 해협과 대륙에서 발원한 흑룡강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흑룡강 하구였다. 최현필의 지휘봉이 움직이고 그의 입이 열릴 때마다
좌중에 자리한 경흥부의 사또와 아전을 비롯한 북병사(北兵使) 주둔군의 군관들은
바쁘게 손을 놀려 연필을 움직여 필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직은 21세기의 것처럼 완벽하고 부드럽게 써지지 않는 연필도 개중에는 있었기에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그 끝에 침을 바르고 필기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마치
20세기 중반 시골학교의 학생들의 모습과도 흡사하여 강의하는 최현필의 실소(失笑)
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전에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여 연해주 일대를 장악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1849년 러시아 제국 해군 중령인 네베리스코이가 사할린 섬과 대륙 사이의 타타르
해협 및 흑룡강구를 측량해 군함의 항행(航行) 가능성을 입증한다. 그 결과 1850년
니코라예프스크에 둔영(屯營)을 설치하게 되면서부터 흑룡강 지방이 러시아령(領)에
속한다는 러시아의 일방적인 선언이 있었다.(*1)
뒤이어 동 시베리아 총독인 무라비예프( . ) 백작은 흑룡강의 왼쪽과 강(江) 입구를
장악하는 자가 시베리아를 지배한다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연해주 지방까지 장악하려
든다.
결국 청나라는 1858년의 아이훈 조약에서 흑룡 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고 다시
1860년 북경 조약에서는 연해주 및 오소리 지방마저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 연해주 지방이 바로 우리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방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지역은 지난 십 수년 전 만해도 주인 없이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지금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그것은 바로
그 땅이 우리 땅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저들이 포시에트의 크라스노(Kraskino)라는
부르는 그 땅은 명백한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최현필의 이와 같은 말이 있자 좌중에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북병사 소속의 나이 들어 보이는 군관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한다.
"방금 나으리께서는 그 땅이 우리 땅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증거가 무엇이오이까? 소장이 십 수년을 이곳에서 군역에 종사하고 있지만 나으리의
말씀과 같은 말은 처음이오이다."
나이가 사십 줄은 되어 보이는 그 군관은 이곳에서 십 수년을 근무하였으나 최현필의
그와 같은 말은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 군관의 무지를 탓할 수 있으리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그와
같은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온 경우가 태반인 것을...
우리가 성웅(聖雄)으로 추앙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살펴보면 1576년에는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그 다음해 녹도둔전관(
鹿島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녹둔도(鹿屯島)에 필승비문(
必勝碑文)을 남겼는데, 그 필승비문에는,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되버린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녹둔도(鹿屯島)와 그 너머 연해주 일대의 땅은-지금의 포시에트
지방의 크라스노 일대-는 우리 땅이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앞에서
언급한 북경조약(1860년)으로 인해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최현필의 이러한 설명이 있자 그때서야 알아듣는 눈치들을 보인다.
최현필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이제 간도문제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라는 것입니다."
백두산 정계비란 1712년 (숙종 38년) 백두산에 청과 조선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후
세운 비석을 말한다. 여진족에 의한 청이 건국된 이후 백두산 주변은 청조(淸朝)가
일어난 영산(靈山)이라 하여 타민족의 접근을 금지시켜왔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던 조선에게 청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그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7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接伴使)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
朴權)을 접반사로 출영(出迎)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 측의 접반사와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는 목극등의 노함을 타 그의 명령으로
백두산에 오르지도 못하였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 측의 군관(軍官) 이의복, 감사군관(
監司軍官) 조태상, 통관(通官) 김경문 등만을 거느리고 등반하여 눈짐작으로, 제대로
실측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km, 해발 2,200 m 지점이었으며, 비석 상단에 목극등이 직접 대청(大淸)
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새긴 다음,
양쪽의 수행원 명단도 새겨 놓았다. 비석의 높이는 약 70cm, 높이는 약 55cm이다.
귀부는 즉석에서 주변의 돌을 주워 세워 놓았다.
목극등이 말하기를, "토문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 속으로 흐르므로 강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가볍게 비를 세우는 의논을 하여서는 안 되겠다" 하고... 물길을
살피게 하였다. ...60여리 가니 해가 저물어 두 사람은 돌아와서 백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보고했다. 목극등이 이어 사람을 시켜 돌을 깎으니 너비가 2자, 길이가 3자
남짓하였다. 또 분수령에서 귀부를 취하였다. 비에 글씨를 새겼는데 그 이마의 "대청"
이라는 두 자는 조금 크게 썼다. 그 아래 글에는, "오라 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년 5월 15일 필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 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이라 하고, 드디어 깎아서 세웠다.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와 무산에 돌아왔다. 목극등이 (박권과 이선부) 두 분에게 말하기를, "
토문강의 원류가 끊어진 곳에는 담이나 울타리 쌓아서 그 아래의 수원을 표시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통역으로 목극등과 백두산에 올랐던 김경문의 이야기를 기록한
홍세태의 '백두산 기'에서 발췌-
이 지도(출처: 교황청 지도)는 1924년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 데미시용
에트랑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시즘 앙꼬레>에 게재하였던 지도의 축소 사본으로, 도쿄
한국연구원 국경 자료지도 K 1호 이다. 18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의 제정을 허락하였다. 수차의 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세(敎勢)가
융성하여 1911년에는 조선 교구를 경성과 대구의 2교구로 분할하고 더욱이
1920년에는 경성교구에서 함경 남 북도와 간도 지구를 다시 분리, 원산교구를
설립하였다.
이 지도는 바티칸 정청이 한국에 있어서의 교구의 관할 영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 데미시용 에트랑 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즘 앙꼬레"
에 게재하였던 축소 복사본인 것이다.(1924)
한국의 조선 숙종 시대로부터 붙어있던 간도지방의 옛 강토 회복의 운동과 한국민과
한국정부의 의지를 억제. 배제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왜국(倭國)정부는 만주
침략의 계획으로 철도 건설 권을 얻기 위해, 소위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의 우리 정부는 간도와 길림지역을 청나라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티칸 정청은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장구한 기간 한국민족이 거주해 왔으며
대한 제국의 영토임이 명백하므로 이와 같이 표시한 것이다. 1965년 왜국은 한국을
대신하여 행사한 그 강압 시대의 모든 외교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간도
협약의 무효임은 말할 것도 없고, 간도 길림 등의 지역은 당연히 한국 영토임이
명백하다.
역사적으로 간도협약(間島協約)이라는 것이 주권을 왜놈들에게 상실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체결된 것이기에 그 무효성은 충분히 인정된다고 볼 수 있으나 그동안
우리의 위정자(爲政者)들은 그것에 대한 충분한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국경 조약 등 국가간 체결된 조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은
‘조약체결 후 100년 이내’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르면, 한국이 간도 문제를
국제법에 호소할 수 있는 시기는 간도협약 체결 100년째를 맞는 오는 2009년까지이다.
이 때까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간도는 영원히 중국 영토로 확정될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짱께들-중국-은 이미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때 영유권 문제가 본격 제기될 것에
대비해 문제 지역에 대한 ‘영토 굳히기’ 작업을 음으로 양으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짱께 총리 이붕은 당시 짱께를 방문한 한국 총리에게 ‘한국인이 짱께 영토인
백두산과 옌볜 지역(간도 지방)에서 고토(故土) 회복을 말하고 다닌다’며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영토 문제 연구가인 양태진씨는 “짱께 정부 외교부 안에는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간도 문제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모두
장래에 있을지 모를 영유권 분쟁에 대비해 미리 쐐기를 박아두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짱께는 이미 간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에 대비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영토 문제는 ‘계속 주장하지 않으면, 결국 현실적으로 문제의 땅을 점유한 나라에
우선권이 돌아간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통념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일찍이
1960년대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북한간 비밀 조약 등 간도 문제와 관련된
‘중대사’들에 대해 무관심· 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적어도 영토 문제에 관한 한
국가가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은 이 같은 사정으로 더 설득력을
얻는다.(*2)
이렇게 최현필의 간도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어떻게 일국의 관헌이란 자가 상국(上國)의 사신이 노했다는 것을 핑계로 국경선을
정하는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지도 못하였단 말인가!"
"실측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해진 국경선은 무효다!"
"우리 땅을 저렇게 잃을 순 없다.!"
이렇게 좌중의 인물들이 분노하고 있는데 경흥부 아전 하나가 달려오더니 최현필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