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또께서는 그동안 제가 가르쳐드린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넣고 계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최현필은 김기배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
최현필의 칭찬 한 마디에 김기배는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고 최현필의 박수를
시작으로 좌중에 자리한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그 우쭐한 기분은 절정을
향해 치 달렸다.
그러나 비상(飛翔)이 있으면 추락(墜落)이 기다리고 있는 법, 최현필은 그런
김기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다시 질문을 한다.
"그럼 사또께서는 러시아와 청국과의 국경분쟁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군요. 그것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지요, 아울러 원래 우리 조선의 영토가 틀림없는 간도 지방에
대해서도 아시는 대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현필의 갑작스런 질문에 김기배는 당황했다.
그냥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해서만 말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배운 대로 설명하여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뜬금 없이
러시아와 청국과의 국경분쟁에다, 조선의 북방영토가 분명한 간도 지방에 대한
설명까지 해 달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런 홍두깨가 없었다.
이런 김기배가 한 나라의 국경관문을 책임진 관장(官長)의 자리에 어떻게 오를 수
있었느냐고 의문을 품고 있을 사람이 있겠으나 당시 조선의 일반 관장이나 방백(方伯)
, 수령(首領)의 국제감각이나 나라간의 외교감각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비록 김기배가 최현필의 교육을 받아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지난해(1864년) 러시아의 동방 방문 사절단이 통상을
목적으로 바친 편지와 예물을 마땅히 알아서 처리하여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무슨
큰일이 벌어진 양 조정에 파발을 띄워 그 처리를 하교 받았을 정도로 용렬한
위인이었으니, 그것을 어찌 김기배만의 잘못이고, 허물이라고 탓할 수 있으리요,
당시 지방 수령이라는 자들의 행태가 모두 그러하였을 것을...
다행히 천군이 각 지방의 수령이나 병마사로 파견 나가 많이 바로 잡았다고는 하지만
국제감각과 외교감각이라는 것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직은 조선이 웅비(雄飛)하는데 있어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이치가
여기에도 있었다.
최현필의 난데없는 질문에 김기배의 우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는데, 그런 김기배를 위기에서
구해준 이는 다름 아닌 박승인이었다.
어차피 최현필도 김기배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최현필이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물어본 까닭은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우쭐해 있는
김기배의 자만심을 꺾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박승인이 말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박승인이 말을 하려고 하자 김기배를 비롯하여 좌중의 인물들이 하나 둘 씩 필기구(
筆記具)를 준비하는데 기존에 조선에서 쓰고 있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연필과 하얀 종이를 묶어놓은 일종의 공책이었다.
이미 연필은 관아의 관리는 물론이고 시전(市廛)의 상인이나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급이 어느 정도 됐기에 연필을 사용하여 필기를 하는 풍경은 그렇게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박승인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아까 사또에서 말씀하셨듯이 꾸준히 동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곡식을 재배할 땅과 여러 자원을 찾아서 흑룡강(黑龍江) 쪽으로 꾸준히
남진하면서 청국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국의 요청으로 우리 조선군도 두
차례에 걸쳐 출병하여 러시아와의 싸움에 끼어 드니 그것이 이름하여 나선정벌(
羅禪征伐)입니다."
박승인의 말이 이어지면서 나선정벌에 이르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북병사 소속의 무관들은 이미 천군이 파견한 지방관이나 병마사에게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기에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약간의 상식은 있었던 것이다. 탄성은 바로
그 북병사 소속의 군관들에게서 새어 나왔다.
박승인은 그런 군관들을 보면서 싱긋 한 번 웃어주고는 다시 말을 한다.
"지난 효종대왕 2년(1651년) 러시아는 흑룡강의 북쪽에 아극살(雅克薩) 하구에
아르바이잔 성을 세웠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다시 헤이룽강 동쪽을 따라 내려와
1652년(효종 3)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에 아찬스크(지금의 하바로프스크)성을
구축하자 그 지방의 원주민인 아창족(阿槍族)과 충돌합니다. 아창족이 당시 그들을
통치하고 있던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여 청국과 러시아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때 청은 중국 본토의 공략에 몰두하고 있어서 만주 수비가
허술했던 관계로 1차의 원병은 러시아군에게 패퇴 당하였고, 러시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남진을 계속하자 청국에서는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우리 조선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김기배를 비롯한 경흥부의 아전들은 물론이고 북병사에서 파견 나와 국경에 주둔하고
있던 군관들도 숨을 죽이고 박승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들 박승인의 손짓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조선이 출병하여 러시아와의 한판 싸움이 일어나는
대목이 곧 나올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박승인은 친절하게도 세계전도에 아극소가 어디며, 아르바이잔 성은 어디에 위치한
곳이며, 아찬스크는 또 어디 쪽에 붙어있는가를 나무막대기로 짚어 가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청국의 출병 요청이 있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주청에 따라
원병(援兵)을 보내기로 하고 함경도 병마우사 변급(邊쇘)을 사령관으로 삼아
출병하기에 이른다.
변급은 정예 조총군(鳥銃軍) 150여 명을 거느리고 1654년(효종 5년)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寧古塔 : 寧安)에서 출발하여 후통강(厚通江 : 混同江)에
이르러 러시아군과 접전, 호통(好通:依蘭)에서 격파한 뒤 그 자리에 토성을 쌓고
같은 해 7월에 돌아왔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나선정벌이다.
1658년(효종 9년) 3월에 청나라는 재차 구원병을 요청해 병마우후 신류(申瀏)가
선발된 정예군 200여 명을 인솔하여 출병한다. 조선군은 청군과 합세하여 같은 해
6월 10일에 헤이룽강에 진주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적선(敵船) 10척을 불태우고 적군
270명을 사살한다.
신류는 일단 송화강(松花江)으로 철수하였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개선하는데.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그리고 나서 청국과 러시아간에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과 캬흐타조약이 체결되고
일시적으로 안정돼 가는 듯 싶었다.
이렇게 체결된 네르친스크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흑룡강 일대로 더 이상 진출할 수
없었으나, 19세기 중반 동 시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무라비예프에 의해 다시 그
야욕을 드러낸다. 그리고 청국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과 영국 상선 애로우호(
號)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아편전쟁(阿片戰爭)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당시 청국의 전권대사였던 이산을 협박해 이름하여 아이훈 조약이라는 것을
맺게된다.
이때가 바로 몇 년 전인 1858년이다.
아이훈 조약은 총 3개조로 이루어진 조약인데 흑룡강 좌안(左岸)을 러시아령(領)으로
하고, 우안(右岸) 오소리강을 청국령으로 하여 오소리강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을
양국의 공동 관리구역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흑룡강 좌안의 만주인 부락을 청국의 관할에 둔다는 것과 흑룡강과 오소리강,
송화강의 항행(航行)을 오로지 양국의 선박에 한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어서 1860년에는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하는데, 이때도 러시아의 집요한
요구에 굴복한 청국이 러시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함으로써, 그동안 청국과 러시아가
공동관리하고 있던 오소리강 이동(以東)의 연해주 지역도 러시아령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인해 명백한 우리 땅인 간도(間島)마저 청국의 일부로 인정되는
근거가 마련되기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국과 러시아간의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며 설령 알았다고 해도 저들의 움직임을 제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백한 조선의 영토였던 간도 땅에 대한 권리마저 그대로 빼앗기게 되니
지하에 계신 윤관(尹瓘) 장군과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승인이 여기까지 얘기하자 좌중은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명백한 우리 땅인 간도를 그렇게 일은 것에 대한 분개(憤慨)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조정의 썩어빠진 중신을 성토(聲討)하는 소리도 들렸다.
특히 그런 목소리는 주로 북병사 소속의 젊은 군관들 사이에서 더 크게 들렸으니,
김기배를 위시한 나라의 녹을 먹는 관헌들의 얼굴이 부끄러운 마음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최현필이 나서서 좌중의 격앙(激昻)된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박승인 나으리의 말씀을 들으셨겠지만 우리 조선은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국제정세에 대처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저들의 도발에도
그저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자랑스러운 우리 땅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자리하신 모든 분들은 오늘 교육받은 것들을 잊지 마시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힘을 기르는데 매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현필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본다.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최현필은 다시 말한다.
"오늘의 교육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니
간도문제에 대한 교육은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이곳으로
모이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56 개혁(改革)의 첫걸음...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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