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의 군사령관이자 약탈자였던 예르마크(Yermak Timofeyevich , ? ~ 1584. 8. 6)
는 그 뭐시냐, 봉가강하고 또 무슨 강인지 하는 곳에서..."
"볼가강입니다. 그리고 돈강이고요."
아무래도 조선 사람이 서양의 이름이나 지명을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김기배는 예르마크까지는 잘 말하였으나 볼가강과 돈강을 얘기하면서 버벅대기
시작했다. 최현필의 그런 지적이 있고, 아래에 부리던 관헌들이 키득거리는 웃음을
내뿜자 무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쨌거나 하던 말은 계속해야 했다.
속으로 천군이지 지랄인지만 떠나면 오늘 웃었던 아랫것들을 모조리 잡들이 할
생각을 하는 김기배는 그런 내색을 애써 감추며 다시 말을 한다.
"험...험... 어쨌든 그 예르마트는 봉가강인지 뭔 강인지의 유역에서 약탈을 하다
이반 4세의 토벌을 받고 카마강 상류 쪽으로 도망을 가서, 페르미의 스트로가노프가(
家)의 보호를 받았다고 본관은 배웠소이다."
실상 서양의 거대한 나라 러시아가 동방으로 진출한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2003년을 기준으로 따지면 정확히 364년에 불과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따지느냐 하면 러시아인이 시베리아 평원을 횡단해 태평양
연안에 당도한 때가 바로 364년 전인 1639년이기 때문이다. 그 태평양 연안이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지금의 오호츠크해(海) 연안의 항구도시 아얀이다.
원래부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정신이 강했던 슬라브 민족은 1579년 서(西)
시베리아의 정복자로 알려진 러시아의 카쟈흐군 지휘관인 예르마크(Yermak
Timofeyevich)의 군대가 러시아의 상업자본가(商業資本家)인 스트로가노프가(家)의
지원을 받아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부르고 있는 시베리아라는 말의 어원은 예르마크의 원정에
무너진 시비르 한국의 수도인 시비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럼 왜 스트로가노프가(家)는 도망자 예르마크를 군대까지 딸려서 지원하면서
험준한 우랄산맥을 넘어서 서 시베리아 평원으로 진출하게 했을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담비 가죽에서 찾을 수 있다.
어둡기가 어둠보다도 더 까맣고 곱기가 비단 보다도 더 고왔던 까만 담비 가죽의
유혹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렬하게 러시아인들을 유혹했으며 결국에 서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타타르족을 물리친 예르마크의 러시아 군은 그곳에 토볼스크라는 요새를
건설하여 담비 가죽을 유럽의 부유층에게 팔기 위해 여념이 없었으며, 검은담비
가죽은 권위과 부의 상징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서 담비 가죽은 러시아 경제를 살찌우는 데 큰 몫을 차지할 정도로 러시아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물론 거기에는 스트로가노프가(家)의 막대한
부의 축적도 빠질 수 없었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스트로가노프가(家)는
18∼19세기에는 많은 일족들이 남작 및 백작 등 귀족의 지위에 올랐으며, 정치, 외교,
군사의 요직에도 취임하였다.
그러나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약탈을 하는 자가 있으면 약탈을 당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었다. 시베리아에게 검은담비의 숫자가 줄어드는 대신 보드카와 담배가
들어왔고, 그와 함께 매독과 천연두가 침투해 들어왔다.
그것은 서 시베리아와 중앙 시베리아 고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오고 있던
수많은 토착 원주민 부족들에게 그것은 재앙으로 다가왔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일은 순식간의 일이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러시아인들의
노예로 전락한 것은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렇게 토착 원주민 부족들이 몰락하는 것과는 반비례(反比例)로 돈과 모험심,
정복욕과 약탈욕에 불타는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동(東)으로 동으로
몰려들었다.
바야흐로 동방원정의 물결이 러시아에 불어닥친 것이다.
이렇게 시베리아를 횡단한 러시아인들의 탐험심은 지칠 줄 몰랐다.
겨우 우랄산맥을 넘은 지 60년 만에 태평양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러시아는
필연적으로 동양의 강국 청국과 분쟁을 겪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