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오경석이 돌아가자 김영훈은 한상덕을 찾는다.
몇 가지 의논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상덕이 아재당으로 들어오자 김영훈은 용건부터 꺼낸다.
"한원장, 아까 내가 진재 영감에게 청국에 공관을 설치할 것을 허락했는데 한원장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청국에 공관을요...?"
"그렇소."
난데없는 김영훈의 말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이미 청국에 설치할 공관의 필요성은 잘
인지하고 있던 한상덕이었기에 김영훈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금방 알아차린다.
"그럼, 우리 대정원 요원들을 공관에 합류시켜야겠군요. 그리고 새로운 요원들을 좀
더 보강하구요."
"그렇지, 한원장은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는구만... 이미
대정원에서 여러 요원들을 청국에 파견했다고는 하지만 그들로는 좀 부족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소. 이번 기회에 좀 더 많은 정예 요원들을 선발하여 파견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합하. 그런데 언제쯤 출발하는 것입니까?"
"아--- 그것은, 진재 영감을 다음 번 동지사의 정사로 파견하고, 거기에 그냥 진재
영감을 눌러 있게 할 생각이니 아직은 시간이 조금 있소, 한원장은 외무부와 잘
협의하여 준비하세요. 요원들 교육도 좀 더 시키고."
"알겠습니다, 합하. 헌데... 저들을 저렇게 그냥 놔두시렵니까?"
"저들이라면...?"
"이최응과 민씨 일당 말입니다."
한상덕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최응과 민씨 일당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김영훈에게 보고하였다. 민승호, 민겸호 형제가 남종삼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한 일이며, 이최응이 민씨 형제들에게 놀아나는 것이며, 최근에는 민치상과
이유원에게까지 접근하여 세(勢)를 불리고 있는 것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유원이 조련하고 있는 사병(私兵)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것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저들을 잡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김영훈의 결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훈은 이번 일이 어린 임금의 외숙들과 백부가 연루된 역모(逆謀)였기에 주저하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생부도 죽고 없는 마당에 남아 있는 친척들이 줄줄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면 어린 임금이 받게 될 충격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천주교 세력까지 얽혀 있었으니 그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 천주교 세력이 법국의 힘을 빌리려는 움직임을 포착하지는 못하였지만,
천주교 세력까지 개입하였다는 것에 그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
김영훈을 비롯한 1500여 명의 천군 중에는 한국에 있을 때 천주교 신자였던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으며, 김영훈도 큰누나가 수녀님일 정도로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불교에 인연을 맺게 되었고, 불교로의
개종 아닌 개종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천주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천군 출신 중에서 김영훈이 역모의 혐의가 있는 천주교 세력을 속아낸다고 해서
항거하거나 반발하지는 않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역사 속의 대원군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영훈은 한상덕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유원이 키우고 있는 사병이 얼마나 된다고 하셨죠?"
"이유원의 사병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 장용원 출신의 구(舊) 조선군의 떨거지를 규합한 이유원의 사병
말입니다."
김영훈은 이렇게 말하며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군인을 천직으로 알고 지금까지 살아온
김영훈으로서는 천군의 현대식 군제와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낱 역모에 동원되는
가엾은 처지로 전락하고만 장용영을 비롯한 구 중앙군 출신의 군사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였기에 이런 강한 불쾌감이 표출된 것이다.
"지금까지 저들에게 포섭되어 조련을 받고 있는 자들의 총수는 약 팔백(八百) 명이
넘습니다. 이대로 가면 올해가 가기 전에 천(千)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천 명이라... 천 명..."
"솔직히 저들의 인원으로 도성을 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넌센스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서울과 바로 지척인 수원에서 거병(擧兵)이 일어난다면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동요가 심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또한 수구
세력의 준동을 불러올 수도 있는 소지도 다분하고요..."
"으.. 음..."
"..."
"저들이 사용하는 총포의 제조 장소는 파악했습니까?"
"그것이, 아직..."
"음..."
지금 이유원의 사병들은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비록 조선군이 보유한 양식보총이나 한식보총이 아닌 조잡한 사제 화승총이었지만 그
살상 능력은 충분했다. 맞으면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양식보총이나 화승총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유원은 구 중앙군을 규합하면서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자신이 노리고 있는 한식보총은 물론이고 양식보총의 확보도 여의치 않았다.
현대 한국군의 철두철미한 총기관리를 조선군에게도 그대로 적용시키는 상태에서
이유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사제
화승총의 제작이었다.
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조선의 장인들에게 이유원의 입맛에 맞는 화승총의 제작은
일도 아니었다.
경화거족의 집안을 대대로 물려받은 이유원의 재력이라면 화승총보다 더한 것이라도
만들 수 있었다.
김영훈이 우려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직까지 이유원이 사제 화승총을 제작하는 공장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설프게
일을 마무리짓고 싶지는 않았다. 잡초의 뿌리를 뽑으려면 확실히 뽑아야지 괜히
어설프게 뽑았다가는 그 잡초가 언젠가는 다시 자라게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였다.
김영훈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고 이번 기회에 잡초를 확실히 제거하여, 수구
사대부들이 조선이 웅비(雄飛)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비록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한번의 피
흘림으로 다시는 정치 싸움으로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 본보기를
삼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제거할 마음이 있었다.
"일단 한원장은 최대한 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도록 하세요. 반드시 저들의 사제
총포 제조 공장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저들 내부의 변절자가 있는지도
알아보세요.
어차피 역모라는 것은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일이기에, 제 한 목숨 아까운 변절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알겠습니다. 합하."
"그런데 대정원에서 러시아로 파견한 요원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까?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도 된 것 같은데요."
"아직까지 연락이 온 것은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대정원 요원들은
합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함경감사 조성하에게도 협조를
지시하였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민족이 웅비할 수 있는 발판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중차대(重且大)한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합하."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길래 러시아로 최 정예의 요원들을 파견했는지, 뭐가 중차대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김영훈과 한상덕의 표정은 비장했다. 과연 뭘까...?
궁금하기도 하구나...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55 개혁(改革)의 첫걸음...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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