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오경석이 이렇게 운현궁에서 나와 보습곶이의 자신의 집으로 가자, 이미 자신의
집에는 한 무리의 인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전준호와 선우재덕, 그리고 보위대신 유홍기였다.
유홍기는 말할 것도 없이 오경석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선우재덕은 전준호의 소개로
오경석과 알게되어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형님."
"오서 오시게."
"오랜만입니다. 진재 영감."
모두들이 이렇게 인사를 하며 오경석과 악수를 하는데, 개화사상의 거두인 오경석과
유홍기는 이렇게 양식(洋式)으로 악수를 하는 인사법에 이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방문이 열리면서 오경석의 아내와 전준호의 처가
주안상을 내온다. 오경석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현명한 오경석의 아내가
알아서 준비한 모양이다. 네모 반듯한 해주반에는 몇 가지의 안주와 술이 놓여져
있을 뿐 화려한 상차림과는 거리가 먼 그런 주안상이다.
섭정공 김영훈이 검소함의 모범을 스스로 보인 것도 있지만 원래부터 검소한 습관이
몸에 배여 있는 오경석이었다.
술이 몇 순배(巡杯) 돌아가자 오경석이 먼저 운현궁에 다녀온 얘기를 한다.
"방금 운현궁에서 섭정공 합하를 배알하고 오는 길이네. 내 합하께 청국에도 공관을
설치하여 외교관을 상주시킬 것을 주청(奏請)드렸다네."
"그래? 합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오경석의 절친한 친구인 유홍기가 이렇게 물었다.
대치(大致) 유홍기는 원래의 역사에서도 오경석이 청국에 출입하면서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다수의 신서(新書)를
탐독하고 연구하여 국제정세의 변화와 서양의 제도와 문화를 인식하게 되어 민족적
차원에서의 개화사상을 발달시키는 인물이지만, 천군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그런
개화사상이 옳았음을 인정받게 되고 그리하여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이 하는 일에
앞장서서 지지하고, 때로는 김영훈의 주장보다도 한 발 앞서는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로 이미 김영훈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원래 유홍기와 오경석은 선배 실학자이자 사상가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
1783)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지구 구형설과 지구 자전설에
탐닉한 적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태양, 달, 지구를 같은 부류하고
보고 그것이 공중에 떠서 움직이니 지구도 회전한다는 삼환설(三丸說)과 공통되는
이론을 전개했고, 또 하늘이 만든 것이 둥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구도 둥글고,
그렇게 만들어진 둥근 것은 반드시 돌게 마련이라 했고, 만일 대지가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는 다면 즉시 부수사토(腐水死土)할 것이 틀림없을 것인데, 지상의
수목과 하천은 생동하고 있으니 대지는 회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라는 주장을
펼쳤다.
[지(地)의 일전함을 일일(一日)이라 하고, 월(月)이 지(地)를 일포(周)함을 일삭(
一朔)이라 하고, 일(日)이 지(地)를 일잡(一覲)함을 일세(一歲)라 하고, 세(歲)가 지(
地)를 일포함을 일기(一紀)라 하고, 성(星)이 지(地)를 일포함을 일회(一會)라 한다.]
연암집(燕巖集) 권 4
또 담헌 홍대용은 그의 저서 담헌서(湛軒書) 내집(內集) 권 4에서 "지구가
하루동안에 한번씩 돌아가되 9만리의 넓은 지도에 12시의 짧은 시간이 배당되므로
지구의 달리는 것이 진뢰(震雷) 구환(暑丸)보다도 빠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오경석과 유홍기는 동양 전통의 우주관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두 선배 사상가의 생각에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이후 오경석과 유홍기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朴珪壽)를 만나
교류함으로써 홍대용과 박지원의 우주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있음을 알고
크게 놀라며, 그 사람에 대한 학습을 하게 되니 그가 바로 숙종, 영종 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사상가인 대곡 김석문(大谷 金錫文, 1658-1735)이다.
김석문은 그의 저서 역학이십사도해(易學二十四圖解)-이하 역학도해-에서 동양
전통의 우주관인 천원지방을 이렇게 해석하였는데 그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소위지방자(所謂地方者), 지위음물(地爲陰物), 외수일광(外受日光), 이유팔방지이이(
而有八方之異耳), 비위여기국지방야(非謂如棋局之方也)"
"이른바 '땅이 네모나다'[地方]라는 것은 지구가 음(陰)의 물체여서 외부로부터
햇빛을 받는데, 팔방(八方)의 다름이 있을 뿐이지 바둑판의 네모남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동양적 우주관인 천원지방을 지구 구형설에 입각하여 해석한 김석문의 생각이다.
또한 김석문은 천체의 거리까지 계산하였는데, 역학도해를 보면 "역지우일(曆指又日),
제천능력필등(諸天能力必等), 지지일주위구만리(地之一周爲九萬理), 지전일일(
地轉一日)"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둘레가 9만 리인 지구가 하루에
1회전한다는 법칙과 모든 천체의 운행 능력이 같다는 원리이다."였으니 각 천체의
공전 주기에 근거해서 도출한 것이다.
이것을 1년에 1회전을 하는 태양을 예로 들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태양이 1년 동안 움직인 거리는 하루에 움직인 거리(90,000리)에다 365일을 곱하면
나온다. 태양이 1년 동안 움직인 거리가 바로 태양 궤도의 둘레이다. 태양 궤도의
둘레를 원주율 3.14159로 나누면 그 궤도의 직경이 나오며, 이것을 다시 반으로
나누면 반경이 나온다. 여기에다 천심과 지심(地心)간의 거리(약 18만 리) 및 지구의
반경(약 28,647리)을 빼면 지표면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나온다.(*2)
김석문의 이러한 우주관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김석문은 그동안 자신이 수집한 서양의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에 나와 있는 사상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동양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응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우주관을 수립하였는데, 기존의 꽉 막히고 획일적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에서 김석문같은 천문학자이자 사상가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김석문과 홍대용, 박지원의 사상을 학습한 오경석과 유홍기는 언젠가
오경석이 청국에서 구입하여 들여온 지구의(地球儀)를 보고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선배들이 생각하였던 것들이
옳았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으리라...
유횽기도 이미 그동안 청국에 외교 공관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지만 그동안 천군의 의료진들에게 새로운 의학을 교육받고 또 보위부의
대신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느라 정신 없이 바빴기 때문에 청국에 공관을 설치하자고
주청할 짬이 나질 않았었기에 오늘 이렇게 오경석이 직접 김영훈에게 공관설치를
주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궁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유홍기의 질문을 받은 오경석은 지나온 옛일을 생각하며 회상에 잠겼으나 유홍기의
채근이 다시 있자 앞에 놓여 있는 술을 쭉 들이키고는 이렇게 말한다.
"합하께서 허락하셨다네. 다음 번 동지사에는 내가 정사(正使)로 청국에 갔다가
천진이나 북경에 공관을 설치하라고 하셨다네."
오경석의 말이 떨어지자 유홍기와 선우재덕, 전준호는 크게 기뻐하며 분분히 축하
인사를 건넨다.
"오--- 그것 참 잘됐네..."
"축하드립니다. 진재 영감."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 중에서도 유홍기는 자신의 일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역시 친구가 좋긴
좋은가 보다.
"이제야 청국에 광관을 설치한다는 것이 좀 늦은 감은 없잖아 있지만 지금이라도
설치를 하도록 가납(嘉納)하셨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야, 암 그렇고 말고."
네 사람은 이렇게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술을 마시는데 전준호가 오경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형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말해보시게?"
"실은 집사람을 왜국으로 데리고가고 싶습니다."
"응? 수경이를...?"
"그렇습니다."
난데없는 전준호의 말에 오경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게 하게. 자네가 언제까지 왜국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신혼인 처지에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네... 어차피 나도 이번 가을이 되면
청국으로 갈 건데 그렇게 되면 수경이가 많이 외로울지 몰라. 잘 생각했네."
사실 전준호가 오경석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정운두가 자신의 누이동생을 나가사끼로 부르는 마당에 자신이라고 가족들을
나가사끼로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차피 정운두의 누이동생을 데리고 가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집사람까지 데리고
간다면 외로운 타국 생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말동무도 되고 좀 좋겠는가.
네 사람은 취기가 오를 때까지 청국와 왜국의 사정을 주제로 환담을 하였으니 그
분위기가 화기애애(和氣靄靄)한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