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99화 (97/318)

94.

전준호는 이상한 생각에 밖으로 나오는데, 밖에는 웬 젊고 아리따운 처녀가 장옷을

머리에 쓰고 서 있다가 전준호가 나오자 그 장옷을 벗어 왼손에 들고 있던 보퉁이와

함께 들고서,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를 한다.

전준호는 처음 보는 처녀가 자신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자 의아한 마음이 들어 얼른

답례를 하고 이렇게 묻는다.

"제가 전준홉니다만, 누구 신지...?"

전준호의 질문에 젊은 그 처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장옷을 살짝 걷으며,

"혹시 정운두라는 이를 아시옵니까?"

"정운두씨요? 그 사람이라면 잘 알지요? 헌데 정운두씨와는 어떻게 되시길래...?"

전준호는 앞에 있는 아름다운 처녀가 도대체 팔난봉 정운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렇게 물었다.

젊은 처녀는 전준호의 물음에 살포시 웃으며 대답을 하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분이 제 오라버니시옵니다."

"예-에? 정운두씨가 오라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전준호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쥬신상사의 정운두라고 하면 나가사끼의 유곽에서 모르는 왜녀가 없을 정도로

난봉꾼이자 바람둥인데, 그런 정운두에게 이런 아름다운 동생이 있을 줄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는가?

보아하니 나이는 이제 20대 초반이나 되었을 성싶은데 쪽을 지지 않고 땋은 머리를

하고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시집을 가지는 않은 모양인데, 스물이 넘은 과년(瓜年)한

나이에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아서는 처녀에게 무슨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경우에 한하는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전준호의 놀람은 컸다.

"잠시 오라버니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칭 정운두의 누이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처녀의 이런 말에 자신의 실태(失態)를

깨달은 전준호는 그 처녀를 안으로 안내한다.

자신의 방으로 처녀를 안내한 전준호는 정운두의 누이동생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어련히 알아서 말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처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정운두의 누이동생은 전준호의 별다른 물음이 없자 알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나으리께서 보내주신 오라버니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 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정운두는 전준호가 조선으로 가는 편에 개성에 사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위한 편지를

전해 줄 것을 부탁했고, 전준호는 그런 정운두의 편지를 받아서 서울에 오자마자

우정국을 통하여 개성에 살고 있는 정운두의 누이동생에게 보낸 일이 그때야 생각이

났다.

정운두의 누이동생은 잠시 전준호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다 전준호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다시 말을 한다.

"오라버니께서는 편지에서 전준호 나으리의 말씀을 하시며,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답니다."

"이런...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전준호는 이 처녀가 할 말이 무엇인데 이렇게 뜸을 들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라는 말을 자신이 두 번이나 연거푸 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전준호의 연 이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라는 말에 정운두의

누이동생은 살짝 웃으며 말을 잇는다.

"소녀는 전준호 나으리께서 왜국으로 돌아가셨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였답니다.

오라버니의 편지대로 서둘러 오기는 했지만 아녀자의 신분과 그동안 살던 집과

가재도구들을 처분하고 오느라 시일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조마조마 했답니다."

"그러셨군요..."

무심결에 이렇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전준호는 곰곰이 처녀의

말을 생각해 보고는 깜짝 놀라며,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과 가재도구를 정리하다니요?"

"실은 저희 오라버니께서는 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집과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전준호 나으리와 함께 왜국으로 오라는 전갈이 있었답니다."

여기까지 말한 정운두의 누이동생은 한 쪽에 놓여져 있는 보퉁이를 주섬주섬 열더니

하나의 편지를 꺼내서 전준호에게 건넨다.

그 편지는 전준호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정운두가 누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틀림없었다. 점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전준호는 느끼고

조심조심하면서 정운두의 편지를 꺼내고 읽기 시작하는데,

편지를 일고 나서 전준호는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정운두가 자신의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개성에 있는 집과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자신이 있는 왜국으로 서둘러서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정운두는 막내 동생이 육사에 입교하고, 홀로 지내고 있을 누이동생이 걱정이 되어

자신이 있는 나가사끼로 부른 것이었는데, 오빠로서 누이동생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전준호에게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전준호에게 말을 했다가는 전준호가 분명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운두는 남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누이동생이 나가사끼에 들어오고 나서 실행에 옮겨지게 될 일이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진 전준호는 이미 모든 집과 가재도구를 처분하고 상경한

정운두의 누이동생에게 차마 안 된다고 거절하지는 못하고 승낙하고 말았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54 개혁(改革)의 첫걸음...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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