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지난해(1864년) 여름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의 대대적인 장가들이기 운동 덕분에
전준호도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외무부의 역관으로 있는
대표적 개화사상가 오경석의 누이동생이었다.
보위대신 유홍기의 친구이기도 한 오경석은 이미 22세(1853년)의 젊은 나이로 북경에
다녀온 이후 무려 13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그 개화사상이
조선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런 오경석의 친구로 보위대신 유홍기가 있었는데 유홍기 또한, 오경석, 박규수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개화사상가로 이름을 떨치는데 그런 유홍기가 중매를 선
전준호를 오경석은 아주 마음에 들어하였다.
하여 오경석은 자신의 집이 있는 보습곶이(하리동下犁洞 지금의 장교동 일대) 근처에
신접살림을 차려주었다.
전준호와 오경석은 겨우 몇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당시의 조선 여인 중에서는 출중한 외모로 이미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오경석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 전준호도 그런 아내를 무척 사랑하여 부부의
금실이 아주 돈독하였다.
그러다 전준호가 올해(1865년) 2월에 쥬신상사의 나가사끼 지점장으로 발령 받아
왜국으로 건너가자 가장 크게 낙심한 이도 바로 아내 오씨였다.
전준호는 나가사끼에서 그렇게 미래에 두고 온 부모와 고국이 그리워 울부짖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일을 계기로 조선에 두고 온 아내 오씨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二律背反)의 생각이 아닐 수 없었으나, 지금 자신이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과 아내 오씨였으니 그런 전준호의
마음을 무턱대고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전준호가 지금은 쥬신상사가 막부로부터 인수한 기선에 몸을 싣고 서울로 가고
있었다. 오늘이 5월하고도 13일이었으니 서울을 떠나온 지 석 달만의 귀경(歸京)
이었다.
전준호와 조선공사관 직원들과의 통음이 있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막부의
내륜기선 후지야마호가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후지야마호에는 조선에서 나가사끼로 보낸 쥬신상사의 물건이 가득했다.
전준호는 정운두와 토마스에게 쥬신상사 나가사끼 지사를 맡기고, 왜국에서 구입한
몇 가지 상품들을 가지고 서둘러 조선으로 향했다. 그때가 을축년(乙丑年1865년) 4월
25일이었다.
이미 막부의 내륜기선 후지야마호는 쥬신상사의 손에 인계되어 쥬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되었으니, 이로써 쥬신상사는 조선상계에서는 유일하게 증기선(蒸氣船)을
소유한 상단이 되었다.
4월 30일 동래에 도착한 쥬신호는 몇 가지의 물건만을 부산포에 내려놓고 서둘러
서울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남해안과 서해안의 복잡한 다도해(多島海)와 조류(潮流)를 왜국의 선원들이 알 수
없었기에 동래에서 물길에 밝고 조선술이 뛰어난 조선인 수부 열 몇 명을 새로
고용하고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전준호는 이렇게 고용한 조선인 수부들에게 증기선의 조작을 서서히 익히게 하여
조선인 수부들만으로, 막부에게서 인계 받을 두 번째 기선의 운용을 맡길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술과 물길에 밝은 조선인 수부들은 이러한 전준호의 뜻을 전해듣고 어렵고
힘들지만 새로운 조선술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증기선의 여러 가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있었다. 물론 전준호는 그런 조선인 수부들에게 충분한
보수를 약속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울을 향해 동래를 출발한 쥬신호는 통영에 있는 구(舊) 삼도 수군통제영의 임검(
臨檢)을 잠시 받고, 경상도 해안을 지나, 전라도의 복잡한 해안을 거쳐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이 있었던 완도를 거쳐, 전라도 서해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이제는 충청도의 서산 앞 바다를 지나 영흥도와 대부도 해협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항해 도중 조선의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왜국의 수부들의 사소한 실수가 있었지만
함께 승선한 조선 수부들의 도움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 이 해협만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남양의 해군사령부와 사관학교, 조선소가 보일
테지만 육안으로 관측하기에는 먼 위치였기에 전준호는 정보의 유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왜국에 나와 있던 전준호는 어서 빨리 서울에 당도하여 그리운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선장에게 기관 출력을 최대로 하라고 이르고 갑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울로 가까이 갈수록 서울에 있는 아내 오씨의 살 냄새가 실려 오는 것 같았기에
전준호의 지금 마음은 설레고 있었다.
쥬신호의 갑판에 나와 따뜻한 5월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왼쪽의 영흥도와 오른쪽의
대부도 일대를 조망하고 있던 전준호에게 쥬신호의 조선인 좌현(左舷) 견시수(見視手)
가 함교와 갑판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좌현 견시. 전방에 기범선 한 척이 빠른 속도로 우리 배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요!"
견시수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전준호는 품속을 뒤져 천리경(千里鏡)을 꺼내 들었다.
자신이 군에 있으면서 사용했던 고 배율(高倍率)의 군용 망원경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으나, 나가사끼에서 구입한 천리경은 나름대로 쓸만했다.
군용 망원경과 같은 일부 특수한 군 장비의 경우에는 일부 일선 군부대에서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왜국에 나가는 전준호가 가지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각 원정단원이 소지하고 있던 개인용 노트북이나 PDA 단말기, 전자수첩,
워크맨, 휴대용 게임기 등등의 모든 전자제품과 물품들은 천군에 대한 정보유출을
염려한 대정원에서 모두 압수하여 수퍼 컴퓨터의 운용을 위해 설립된 섭정공 직속의
전산연구소에서 새로운 장비로의 개발을 위해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몇 몇 특수한
위치의 천군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 천군에게는 안타깝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앞날을 위한 일이기에 모두들 말없이 따라 주었다.
천리경으로 전방을 관측한 전준호는 다가오는 배가 자신도 진수식에 참석하여 보았던
풍백함인 것을 알아보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왜인 선장에게,
"1번 마스트의 삼족오(三足烏) 깃발 바로 밑에 백기를 게양(揭揚)하시오. 빨리!"
전준호는 선장에게 이렇게 지시하고 다시 천리경을 들어 다시 한 번 다가오는 배를
확인했다. 풍백함이 틀림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국기(國旗)의 채택이 없었기에 마스트에 휘날리는 태극기(太極旗)의
모습은 없었지만 제독(提督)이 승선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수자기(帥字旗)가 펄럭이고
있는 게 아무래도 김종완 사령관이 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김종완 사령관이 무슨 일로 풍백함에 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전준호가 하고 있는데 갑판에 나와 있는 왜인 수부들과 조선인 수부들은 난리가 났다.
크기는 쥬신호보다 겨우 두 배정도 밖에 크지 않을 것 같은 배가 빠르기는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증기선이라고는 쥬신호가 처음인
조선인 수부들의 놀라움은 컸으니 가슴이 벌렁거리고 간이 콩알만하게 오그라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준호는 수부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큰소리로,
"모두 놀라지 말고 각자 일들 하세요. 저들이 우리 배를 헤치지 않습니다. 어서
각자의 소임을 보도록 하세요."
수부들은 선주(船主)이 전준호의 말에 어느 정도는 안심하는 눈치를 보이면서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다시 견시수가 소리 친다.
"저 배에서 백기를 내 걸었습니다."
다시 전준호가 천리경을 꺼내서 보니 풍백함의 1번 마스트에서 쥬신호와 마찬가지로
백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어서 풍백함의 우측에 마련된 작은 주정(舟艇)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고, 그
주정에는 한식보총을 손에 든 몇 명의 병사와 군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승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53 개혁(改革)의 첫걸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