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94화 (92/318)

89.

"부기장님! 저 윤정웁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윤정우를 비롯한 조선공사관 직원들은 전준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정운두가 와서 전준호에 대한 얘기를 하자 공사관 경비책임자 한성호는 곧바로

조선공사 윤정우에게 알렸고, 윤정우는 서둘러 일과를 끝마치고 전준호에게로 온

것이다.

비록 소속된 병과는 다르고 조선에 온 후로 하는 일도 달랐지만 같은 원정단의

일원이라는 동질감으로 뭉친 그들은 어느 조직보다도 뜨거운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는 생각에 만사를 제쳐두고 이렇게 달려오게 된

것이다.

윤정우를 비롯한 공사관 직원들이 제일 처음 본 것은 술에 취한 전준호의 모습과

이리저리 어지럽게 뒹굴고 있는 빈 술병들이었다.

아직도 전준호는 간간이 울음을 토하면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윤정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에 신경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윤정우는 전준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부기장님. 무슨 일입니까? 다들 부기장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전준호는 윤정우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갈 뿐이다.

윤정우를 비롯한 공사관 직원들은 전준호가 아무 말이 없자 전준호의 옆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저앉았다.

전준호는 기계적으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갈 뿐 다른 말이 없다.

윤정우도 옆에 널브러진 술병을 들더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부함장님은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나질 않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

뜬금 없는 전준호의 질문에 윤정우는 할말을 잃고 이렇게 되물었다.

난데없이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라니...

사실 원정단 소속의 천군에게는 그동안 한국이라든지, 두고 온 가족이라든지 하는

말들은 일종의 금기사항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들의 얘기나 한국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를 꺼렸으며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금기와 같은 것이 되었던 것이다.

모든 원정단원들이 자진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지원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가족이 그립고 친구가 보고 싶고, 한국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표면에 드러내고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원정단에 우호적인 일부 대신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대신들이나

조선사람들에게는 비밀로 유지하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지도 몰랐고, 또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족들의 품과 고국에 대한 향수(鄕愁)를 건드린다는 것은 원정단

전체의 사기로 볼 때 결코 좋지는 않을 것이 자명했기에 누구도 입 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준호가 그것을 정면으로 건드리고 나선 것이다.

윤정우와 다른 공사관 직원들은 순간적으로 놀랬다.

몸을 움찔하는 이도 있었으며, 술을 들이키다 사레가 들려서 캑캑하고 기침을 토하는

이도 있었다.

"여기 있는 다른 분들은 모두 강인한 분들만 있나보구려..."

"아닙니다. 부기장님. 저희들도 사람인데 어찌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나지 않을

것이며, 어찌 한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실은 오늘 좀 마음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며 오늘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정운두가 우레시노에 출장을 간 일이며, 그 정운두가 우레시노에서 누구를 만났으며,

정운두가 만났던 사람의 후손을 자신이 한국에서 만났던 일이며, 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 9대 이삼평 노인의 말을 정운두에게서 들었을 때의 자신의 심정까지도 한

푼의 가감 없이 말을 한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며, 자신을 비롯한 원정단원

모두는 다시는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며,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는 전준호의 말과 그 말을 하면서 한

방울 두 방울 씩 떨어지는 전준호의 눈물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눈시울도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급기야 공사관 직원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박지현이 울음을 터뜨리자 좌중은

삽시간에 눈물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것은 이내

통곡이 되고 말았다.

전준호를 위로하기 위해 달려온 공사관 직원들이 전준호의 심정에 동화되어 너나없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모습은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슴속을 쥐어짜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통곡했을까 누구의 입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은 엉엉 울면서도 어머니의 은혜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고, 그것은 또 한

번 좌중을 눈물의 홍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엉엉엉...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흑흑흑...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엄마..엉엉엉...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엉엉엉...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하리오---흑흑흑...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없어라...엄마-------"

노래가 끝나고 어느 정도 좌중의 울음이 가라앉자, 다 큰 어른들이 울고불고 눈물을

짜면서 엄마를 외친 것에 스스로 생각해도 어색하고 무안한지 윤정우가 서둘러 말을

꺼낸다.

"부기장님의 심정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찌 우리가 한시라도 두고 온 가족들과 한국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누굽니까? 바로 천군입니다. 우리 천군 1500여 명의 손에 조선의 앞날이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천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립고 보고싶어도 참고 있는 거지요."

잠시 말을 끊은 윤정우는 전준호가 건네주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한다.

"사실, 이런 말씀을 이 자리에서 드리기는 뭐하지만... 말이 나왔기에 하겠습니다.

작년에 제가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특수수색대의 대원들을 이끌고 왜국으로 올 때

한상덕 대정원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원장님께서는 그때 출발하기 하루 전날 저를 부르시더니 김영훈 사령관님과 김종완

함장님, 그리고 당시 이렇게 세 분이 술을 마셨던 일을 말씀하셨는데, 그 때..."

김영훈과 김종완, 한상덕은 조선통신사를 왜국에 보내기 얼마 전에 함께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원정단이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모두들 변변한

술자리를 가질 수도 없었고, 원정단의 세 수뇌부가 한 자리에 모인 일도 드물 정도로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원정단의 세 수뇌부는 그 날 운현궁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그동안의 노고를 서로서로 격려하게 되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무렵에 한상덕이 김영훈에게,

"사령관님께서는 가족들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한상덕이 보기에 김영훈의 모습은 항상 온화하고 당당했으며, 그러면서도 부하들이나

일반 조선의 중신들을 대할 때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점의 사심 없는, 원정단의

숭고한 원정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김영훈의 모습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보아왔던 한상덕이었기에 과연 저 양반이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똑같은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마침 술

한잔하면서 긴장이 풀어진 이 때를 기회로 그동안 가슴속에 품고만 있던 의구심을

풀고 싶었기에 이렇게 김영훈에게 물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김영훈의 입이 떨어졌다.

"나라고 어찌 가족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다른 원정단원들처럼 가족이 그리운 걸요."

김영훈의 말은 잔잔하게 이어졌다.

"여러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사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싶고, 누님들과

형님들이 보고 싶답니다. 그리고 우리 조카들도 보고싶지요.

삐약삐약거리던 애기 때부터 봐왔던 우리 조카들의 얼굴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답니다. 가끔씩 휴가를 나와서 고향집에 가면 멀리서 저를 알아보고

달려오던 그 놈들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제가 감히 어떻게 다른 원정단원 앞에서 내색이나 하겠습니까?

모두들 저만 바라보고 있는 현실에서 제가 그런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

원정단 전체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조선으로 시간여행을 온

목적도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일인걸요.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저는 누구보다도 여린 마음의 소유자랍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의 성품을 닮아 눈물도 많고 정도 많지요.

지금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는지 가끔 밤에 혼자 잠자리에 들 때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남 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이런 저에게 원정단의 총 사령관이라는 과분한 직책이 주어졌고,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까지 주어진 것은 저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었지요.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요. 그러나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부담과 책임을 진다는 생각에 저에게는 과분한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수락하게 되었고,

여기까지 오게된 것이지요."

김영훈은 여기까지 말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감은 김영훈의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런 김영훈을 바라보는 김종완과 한상덕의 눈에서도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김종완과 한상덕의 마음 속에는 아! 우리 사령관님도 우리와 같은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우리만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서 한숨짓고 눈물지었던 것이 아니구나

하는 훈훈한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밤새도록 통음(

痛飮)을 하였다.

김영훈과 비슷한 또래의 두 사람은 그동안 김영훈에게 알 수 없는 경외감과 경쟁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가 이렇게 마음을 터 놓고 대화를 하면서 좀 더 서로를

알게 되었고, 후손들에게 다시는 우리 조상들이 밟았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온 몸을 다 바쳐 조선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그런

술자리였다.

"그때 한원장님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며 우리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을 미래에

두고 이곳 조선까지 왔지만 우리가 이곳에 온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아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하셨지요."

어느새 좌중은 윤정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좌중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분위기도 어느덧 많이 희석되었다.

윤정우의 말이 끝나자 듣고 있는 한성호가 윤정우에게 묻는다.

"정말 우리 사령관님도 우리와 똑같이 가족들이 그리워서 울고 그러셨단 말입니까?"

"왜? 한성호, 자네는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

윤정우의 이런 힐난조의 말에 찔끔한 한성호였지만 우선 할 말은 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런 것은 아니자만... 우리 사령관님 같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분이 우리들 몰래 가족들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에 하는 소립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김영훈의 지역대에 속해 있으면서 김영훈을 봐 왔던

한성호였기에 김영훈의 그런 모습이 얼른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성호가 알고 있는 김영훈의 모습은 부하들에게는 항상 다정다감했지만 맡은바

책임을 소홀히 하는 부하들이 있을 때에는 가차없는 징벌을 가하는 공과 사가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김영훈의 성격은 상관을 대할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성격이었기에 부하들의 신망도 두터웠지만 반대로 상관들에게는 미운 털이 박힌 그런

사람이었다.

"야. 한성호. 사령관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다만 그 분이 우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에 있다보니 스스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아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전준호의 안부를 챙기기 위한 자리는 뜻밖에도 서로의 인간미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고, 그것은 당연히 술자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윤정우의 위로의 말에 힘을 얻은 전준호는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아래층에서

위층만을 주시하고 있을 정운두를 부르더니 쥬신상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술을

꺼내오게 하고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밤새도록 이어지게 된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52 개혁(改革)의 첫걸음...23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