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88화 (86/318)

83.

"정운두씨, 사가현(佐賀縣) 우레시노(嬉野)까지 가서도 여자 꽁무니만 쫓지 말고

먼저 일부터 잘 보고 오세요, 그리고 볼일 다 보면 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정운두씨가 돌아와야 내가 조선으로 갈 수 있으니까."

"알겠다구요. 지점장님은 제가 무슨 어린앤 줄 아십니까?"

쥬신상사에 처음 들어와 나가사끼에 올 때만해도 지점장님이라는 말이 어색해 보통

지점장 나으리라고 전준호를 부르던 정운두였지만 이제는 전준호와 생활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기에 전준호와 같은 천군이 사용하는 현대 한국어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쥬신상사의 뒤뜰에서 말에 안장을 올리고 여러 가지 짐을 꾸리고 있던 정운두는

이렇게 볼 멘 소리를 했지만 마음만은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말안장 좌우로 여러 가지 짐을 꾸리는 정운두는 어서 빨리 떠나고만 싶은 지 설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정운두 옆에는 쥬신상사 나가사끼 지점의 새로운 일꾼인 토마스 글로버-이하

토마스-가 역시 말 한 필을 준비한 채 짐을 꾸리고 있었다.

토마스는 지난 2월 20일에 쥬신상사의 정운두로부터 구원을 받은 이후, 지점장인

전준호의 제의를 받아들여 쥬신상사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줄곧 성실하게

일을 해 왔다. 빈털터리에다 죽기 일보직전의 그를 살린 것은 정두운였기에 토마스는

쥬신상사에서 일하면서도 늘 그와 함께 붙어있다시피 했다.

정운두는 홀로 남겨진 토마스가 안쓰러운지 무슨 일을 하든지 토마스를 데리고

다녔으며 숙소도 같은 방을 사용할 정도로 토마스를 아끼고 챙겼다.

이제 겨우 25살인 토마스와 27살인 정운두는 이렇게 친형제 이상으로 친해지고

있었는데, 사실 상재(商材)로 봐서는 정운두에 뒤지지 않는 토마스였고 더군다나

청국을 비롯한 왜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청국말과 왜국말을 아주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왜국말을 비롯한 외국어를 거의 못하는 정운두로서는 그런 토마스가 지신의 왜국말

선생이자 영어 선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달 전의 불안하고, 초췌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얼굴색도 많이 좋아졌고,

온화한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는 모습이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어이 토마스."

"예, 지점장님."

"자네가 부 지점장을 잘 좀 돌봐주라고, 이거 당최 마음이 놓이지 않는고 만. 그래도

자네가 옆에 있으니 한결 든든하기는 한데...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준호가 정운두와 토마스 단 둘만의 지방 출장이 못내 불안한지 이렇게 토마스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데 눈치 빠른 정운두가 그걸 알아채고 소리를 꽥지른다.

"지점장님. 제가 무슨 어린앱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라구요."

"어? 자네 어떻게 영어를 알아듣지? 혹시 이번에도 눈치로 때려잡았나?"

전준호는 사실 지금 많이 놀랐다.

정운두가 토마스와 같이 생활하면서 영어와 왜국말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확한

의사표현을 하기에는 많이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운두가

자신이 토마스에게 영어로 지시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듣는 눈치가 아닌가.

"지점장님은 너무 저를 우습게 보시는 것 아닙니까? 지난 두 달 동안 토마스에게

왜국말과 영어를 제가 얼마나 열심히 배우고 익혔는데요..."

"맞습니다. 지점장님. 운두 형님의 언어 습득능력이 의외로 탁월합니다. 저도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걸요."

"호오! 그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하하하..."

같이 지내면서 조선식으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된 토마스가 정운두를

옹호하는 말을 하자 짐짓 놀랐다는 표정으로 정운두를 다시 한 번 쳐다보는 전준호다.

원래부터 상재가 뛰어났던 정운두는 왜국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그 좋은 머리를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왜국 상인들, 외국 상인들과의 상담에서 이미 그 능력을 충분히

보여 주었으며 이제는 외국어에 대해서도 그 능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조선 사람이 외국어를 배우기가 어려웠던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한

가지 언어만을 듣고 말하고 썼기 때문인데, 정운두처럼 토마스와 같은 외국인과 한

달만 생활한다면 머리 좋은 조선 민족이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준호와 토마스가 자신을 가지고 놀리고 있는 것을 알아듣는 정운두였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우쭐한 마음이 든 정운두는 전준호에게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렇게 묻는다.

"그나저나 지점장님."

"응?"

"하시마섬(端島)의 매입문제는 오늘 오후에 계약을 하기로 하셨다구요?"

"그래요. 오늘 오후에 막부의 행정관과 하지마섬의 매입계약을 체결하기로 했어요."

"근데 그 조그만 섬을 굳이 우리가 매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운두는 이렇게 말하며 약간은 회의적인 생각을 피력하는데, 사실 자신의 눈으로 볼

때는 굳이 큰돈을 투자하면서까지 겨우 1.2평방Km에 불과한 코딱지 만한 작은 섬을

매입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비록 그 섬에 있는 다카지마 탄광에서 약간의 석탄이

채굴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극히 소량에 불과했다.

하시마섬은 나가사끼의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버려진 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섬이라고 해서 다 쓸모 없는 섬이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겨우 1.2평방Km에 불과한 하지마섬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는 1810년에 이 섬에서

양질의 석탄이 발견되고부터였다. 그러다 1890년 미쓰비시 광업에서 매입한 후로

당시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기록인 지하 199m까지 갱도(坑道)를 열어 석탄 채굴에

성공한다.

하시마섬의 다카지마 탄광은 또한 일제시대에 징용으로 끌려간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하시마섬의 다카지마 탄광과 하시마 탄광에서 2차 대전 당시 4000명이 넘는 징용

한국인들이 강제 노역을 당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실 하지마섬의 매입을 건의한 이는 토마스였다.

일찍부터 이곳 나가사끼에서 상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경험이 있는 토마스는

전준호에게 하시마섬의 다카지마 탄광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매입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는데, 당시 왜국의 낙후된 채탄기술로는 극히 소량의 석탄만을 채굴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막부의 나가사끼 행정관은 조선의

쥬신상사에서 하지마섬의 매입의사를 밝히자 냉큼 팔아치울 생각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쥬신상사에 넘기기로 합의를 하고 오늘 오후에 정식 계약을 체결하기로

하였으니, 토마스가 유럽에서 들여올 선진 채굴기술과 장비만 있으면 왜국의 어느

탄광의 석탄보다도 양질의 석탄을 채굴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왜국 정부에서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누구도

하시마섬의 가능성을 모르고 있었다.

전준호도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쥬신상사의 개점(開店)과

여러 외국 상인들과의 거래와 상담으로 바쁘게 지내온 덕분에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토마스의 건의가 있자 바로 추진하여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그곳은 왜국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양질의 석탄이

나올 겁니다. 이미 토마스가 영국에 새로운 채탄설비를 주문했기 때문에 새로운

채탄설비만 도착하면 앞으로 그곳은 우리 쥬신상사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주게 될

겁니다."

전준호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정운두는 내심으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런 정운두의 생각을 짐작한 전준호는 정운두에게 다시 말한다.

"정운두씨는 하시마섬에 대해서는 나한테 일임하시고 우레시노에 가서 일이나 잘

보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지점장님."

"막부에서 발행한 통행증과 추천장은 잘 챙겼겠지요?"

"하이고, 걱정 붙들어 매십쇼, 제가 어련히 알아서 챙겼을라구요."

"그럼 출발하세요. 오늘 중으로 우레시노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요. 지점장님."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꼭 성공하시구요."

"예--"

정운두와 토마스가 말에 오르자, 견마잡이로 동행하는 왜인 종업원 둘이 말고삐를

잡아들고 천천히 사가현 우레시노를 향해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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