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지금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가 다녀간 홍봉주의 태평동 집에서는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 그리고 홍봉주의 갑론을박(甲論乙駁)이 한창이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민승호 민겸호에게 약속한대로 청국에 주둔하고 있는 법국의
아시아함대를 불러들이자고 주장하고 있었고, 베르뇌 주교는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선의 천주교가 다시 한 번 정치 세력의 이용을 당함으로써 철퇴를
받게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남종삼과 홍봉주에게 자중(自重) 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두 분은 부디 제 말을 명심해 주십시오."
이렇게 운을 뗀 베르뇌 주교는 잠시 침을 삼키더니 다시 말을 한다.
"이 땅 조선에 우리 천주교가 전래된 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네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상당한 선교의 업적도 이루었고요. 조선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네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 말입네다. 솔직히 저는 우리가 정치세력과
결탁함으로써 저들에게 이용만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네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베르뇌 주교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
"우리 천주교가 조선 땅에서 선교의 자유를 얻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임에는 분명합네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조급하게 서두르다가는 지난 신유박해
때와 같은 대 학살이 벌어질 수도 있습네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의 얼굴이 다른 법입네다. 더군다나 지금 여러분들이 하려는
일은 현정권을 뒤엎으려는 세력과 손을 잡고 다른 나라의 힘을 조선에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아닙네까? 여러분들은 지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있었던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에 대해 벌써 잊으신 겁네까?"
남종삼은 베르뇌 주교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듣고 있었다.
실상 지난 신유백해 때 있었던 황사영의 백서사건도 따지고 보면 조선의 문제를
가지고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려는 황사영 개인의 소아병적(小兒病的)인 작태에
지나지 않았으나, 천주교 신도들의 입장으로 보면 천주님의 은총을 척박하고 미개한
조선 땅에 심어보려는 헌신적인 신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황사영은 순교자로
지금까지 추앙 받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남종삼은 베르뇌 주교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뜻을 밝힌다.
"주교님! 저는 주교님의 생각과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은 그동안 관의 눈을 피하며 암암리에 신앙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숫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천주님의 은총을 이 나라 조선에 널리 퍼트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순교한 교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에게 그동안 누누이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천주님의 뜻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가장 원대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천주님의 은총을 조선 땅에 마음껏 펼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순교할 각오가 되어있으며, 누구와도 손을 잡을 생각입니다."
남종삼의 말이 끝나자 베르뇌 주교의 얼굴이 처음보다 더 어두워졌다.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의 힘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를 얻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의 생각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10년
동안 있으면서 정이 들대로 든, 선량한 성품과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살아온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천주교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종교라는 각인이 새겨질까 두려운 것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베르뇌 주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남종삼이 하는 일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에게 부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베르뇌 주교는 남종삼과 함께 태평동 홍봉주의 집을 빠져 나오면서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남종삼이 그런 베르뇌 주교에게 이번에는 어느 지방으로 선교를 떠날 생각이냐고
묻자. 그때서야 황해도 이북 지방을 선교할 생각이라는 말과 함께 요즘 조선
백성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동학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남종삼은 그런 베르뇌 주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동학에 대해서 설명하며 북쪽
지방은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으니 좀더 날씨가 풀리면 올라 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베르뇌 주교는 남종삼의 말을 듣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 갈 것을 고집한다.
*초청작품*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 조아라와 데프콘까페에 연재중인 인기작입니다
.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49 개혁(改革)의 첫걸음...20
번호:56 글쓴이: yskevin
조회:199 날짜:2003/11/13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