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86화 (84/318)

81.

밤이 깊어서야 태평동 홍봉주의 집을 빠져 나온 민승호와 민겸호는 민승호의 집이

있는 안국동 감고당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가끔씩 순라를 도는 경무청 소속 경무관들의 검문을 받았지만 어린 임금의 외삼촌인

민승호와 민겸호에게 무슨 용무로 밤길을 돌아다니냐고 심문할 간 큰 경무관들은

없었다.

지금은 소방청으로 이름이 바뀐 구 금화군(禁火軍) 소속 소방사들이 딱딱거리며

불조심을 외치는 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올 뿐 종로통은 한산했다.

하기야 자정이 가까운 이 시간에 서울 장안을 활보하는 놈들이 미친놈들이지만...

말없이 걷고 있는 민승호를 뒤따르던 민겸호가 나직이 묻는다.

"형님, 정말 법국의 힘을 빌리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담이 작은 편인 민겸호는 친형인 민승호가 너무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천주학 신도들을 끌어들이고 법국의 힘을 빌리는 것은

이미 이최응과도 모든 얘기가 끝난 사항이었지만 민겸호의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자칫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경우가 될지도 몰랐기에 하는 소리였다.

그런 민겸호의 걱정과 달리 민승호는 자신만만했다.

"왜? 아직도 불안한가?"

"...솔직히..."

"사람 참,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설사 법국의 군대가 조선 땅에 들어와서 저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법국인들이 우리 조선에 대해 할 수 것이 무에 있는가? 그저 무역과

통상만 바랄 뿐이겠지. 그리고 그 법국인들을 천주학쟁이들이 아무리 떠받든다고

해도 천주학쟁이들의 세력은 미미할 뿐이네. 결국 법국도 우리와 손을 잡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지. 설사 조선의 모든 것이 법국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지라도 우리로서는 하등 손해날 것이 없는 일일세.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조선을 다스리려면 어차피 우리들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음이야. 암,

그렇고 말고."

과연 민승호다운 생각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 나자빠지건 말건, 양이의 손에 조선이 침탈을 당하건 말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오로지 정권을 찬탈하여

김영훈과 천군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각오가 되어있는

민승호였다.

매형인 흥선만 살아있어도 어디 임금의 외숙(外叔)인 자신들이 이렇게 홀대를

받았겠는가 말이야. 임금의 외숙인데...어딜 감히....하는 특권의식이 뼛속깊이

새겨져 있는 민승호였다.

"자네는 내일 수원에 한 번 다녀오게나?"

"수원엘요?"

난데없이 수원에 다녀오라는 민승호의 말에 민겸호는 영문을 몰라 이렇게 되물었는데,

다시 민승호의 말이 이어진다.

"수원에 가서 귤산(橘山) 영감을 찾아뵙고 내 뜻을 전하면 귤산 영감이 다 알아서

하실게야."

"귤산 영감이라면 지난해 아라사의 통상요구 파문으로 파직된 이유원 영감을

말씀하시는 겝니까? 올해 겨우 복권되었으나 수원유수란 한직으로 좌천된 분이기도

하구요."

이들이 말하는 이유원은 지난 김씨 일파의 세도 때 의주부윤을 거쳐 함경감사에까지

올랐다가 김영훈이 집권한 후에 아라사의 통상요구를 빌미로 파직된 인물이었다.

기호지방에 뿌리를 내린 대표적인 권문세가의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원을 왜 접촉하라고 하는 것일까?

민겸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의구심을 나타내는데 민승호의 다음 말 덕분에 그런

민겸호의 의구심은 풀리고 말았다.

"흥인군 대감의 얘기론 귤산 영감이 수원유수로 있으면서 은밀히 힘을 기르고 있다고

하네. 자네는 내일 아침 일찍 내 집으로 와서 내가 써주는 서찰을 귤산 영감께

전하기만 하면 되네, 이미 흥인군 대감과 귤산 영감과는 어느 정도 얘기가 다 된

모양이야..."

행여나 누가 들을까 이렇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하는 민승호의 표정을 보자

민겸호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은밀하게 힘을 기르다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형님."

"이 사람도 참, 이렇게 둔할 수가 있나. 수원에 뭐가 있었나? 바로 구 총리영(總理營)

이 있었지 않는가? 그런데 그 총리영이 지난해 있었던 군제 개편 때 중앙의 오군영과

개성의 관리영(管理營), 강화의 진무영(鎭撫營)과 함께 근위, 친위천군으로

통폐합되지를 않았나?"

"그랬지요. 헌데..."

"그 총리영의 군관들과 군사들 중에 근위, 친위천군에서 탈락돼 불만이 있는 자들을

귤산 영감이 규합하고 있다는 소식일세. 벌써 상당수의 군사들을 모았다는 얘기를

들었네."

민승호의 이런 설명이 있자 그때서야 알아듣는 민겸호였다.

사실 귤산 이유원은 수원유수로 있으면서, 새로운 군편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한

구 총리영 소속 군관들을 규합하고 있었으니, 총리영의 전신인 장용영(壯勇營)의

군세(軍勢)가 많을 때는 12000명이나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벌써 상당수의 군사들을

규합했을 게 분명했다.

정조대왕의 친위군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장용영의 설치 목적이 붕당들의 세력

기반이었던 기존의 군영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이유원이

규합하려는 총리영의 군사들은 애초에 정조대왕이 설립할 때의 취지에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형국이었으니, 이것은 김영훈과 천군의 실책이라기 보다는 어디를 가도

존재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불만세력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불만세력을 규합하는 인물이 기호지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대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이유원임에야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상의를 마친 민승호와 민겸호는 각자의 집이 있는 안국동과 수송동 방향으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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