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85화 (83/318)

80.

밤이 으슥한데 태평관(太平館) 어귀의 골목을 가로지르는 두 사내가 있다.

허우대가 큰 사내는 큼지막한 방갓을 눌러쓴 것이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했다.

허위허위 걷는 품새가 그럴 듯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일단 일반 조선 사람에 비해 허우대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천군으로 보이지는 않고..

.

옆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사내에 비해서 머리가 하나는 더 있어 보였다.

두 사내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한참을 들어가더니 이윽고 어느 집 대문

앞에 섰다.

키가 작은 사내가 대문에 달린 문고리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난다.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빼꼼하게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가 내다보더니 살며시 문을

연다.

행여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릴까 조심하여 문을 여는 품이 마치 비밀 모임이 있는 듯

하다.

"어서 오십시오, 주교님. 주교님께서 누추한 저희 집을 다 찾아주시고..."

"우선 안으로 듭세다."

주교님이라고 불린 방갓을 쓴 사내가 어딘지 어색한 조선 말로 이렇게 말했다.

문을 열어 두 사람을 영접한 사내는 주교님이라 불린 방갓의 사내가 이렇게 말하자

서둘러서 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지금 태평동(太平洞)의 홍봉주의 집으로 들어선 두 사내는 다름 아닌 법국인 신부

베르뇌(Berneux)주교와 전 도승지 남종삼이다.

홍봉주의 태평동 집은 베르뇌 주교가 오랜만에 들른 곳이다.

지난 1856년 3월에 조선에 밀입국한 베르뇌 주교는 한동안 홍봉주의 바로 이 집에서

숨어 지내면서 조선 말을 배우고, 조선 땅에 천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쓴

지가 벌써 10년이 넘은, 로마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천주교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당금 조선 천주교 사회에서 수장(首長)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와 함께 홍봉주의 집에 도착한 남종삼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버지인 남탄교(南坦敎)

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천주교에 입문한, 조선 천주교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이다.

이런 두 사람이 지금 홍봉주의 집에 왔다.

홍봉주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홍봉주의 아내 박씨와 젊은

사대부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바로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였다.

홍봉주의 아내 박씨는 베르뇌 주교에게,

"어서 오십시오, 주교님."

하고 인사를 하고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는 남종삼에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대감."

하며 인사를 한다.

마당에서 모든 사람이 이렇게 인사를 나누자 집 주인인 홍봉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남의 이목이 두렵습니다."

이렇게 말한 홍봉주는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을 모시고 안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뒤를 민슴호와 민겸호, 형제가 조용히 따른다.

"주교님 인사하시지요,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주상전하의 외삼촌 되시는 분들입니다."

남종삼의 소개로 베르뇌 주교와 민승호 민겸호 형제는 그때서야 인사를 나눈다.

"오! 바로 쿡왕천하의 외삼촌들이시쿤요. 반갑습네다. 장경일이라고 합네다."

이렇게 인사말을 한 베르뇌 주교는 그 큰손으로 앞에 앉아 있는 민승호와 민겸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말로만 듣던 서양인을 오늘 처음 본 민승호와 민겸호는 베르뇌 주교의

갑작스런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큼지막한 베르뇌 주교의 손을 떨쳐 내려고 손을

터는데, 그것은 두 사람의 이러한 행동을 자신이 청한 악수를 반갑게 받는 것으로

오해한 베르뇌 주교의 손아귀에 힘을 더 주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잠시

엉거주춤 어색한 인사가 끝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오늘 밤 이렇게 모인 이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그동안 박씨 내외로부터 얘기는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 번 대감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조대왕께서 400여 년 전 이 나라 조선을 창업하신 이래 우리 사대부들은 나라의

근간을 이루면서, 스스로를 문명국으로 자부하면서 지금껏 오랜 전통을 유지하면서

내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근본도 모르는 천군의 손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고 사대부를 능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저 순간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남발함으로써 드디어

작금에 이르러서는 강상(綱常)의 법도는 물론이고 나라의 통치 기반까지

흔들리게되는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조선의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이제 대감과 대감께서 이끄시는

천주학 신도들도 우리의 거룩한 뜻에 동참하기를 권유합니다.

그동안 서양에서 유래한 서학(西學)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받고 억압받아온 천주학

신도들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천주학을 더 이상 서학이라고

해서 차별하지도, 탄압하지도 않을 것이며 선교의 자유도 보장할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대감."

민승호는 이렇게 말하고 남종삼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민승호의 눈동자는 남종삼의 대답을 재촉하며 이글거리는데, 그 눈동자를 정면으로

받고 있는 남종삼의 얼굴은 의외로 차분하다.

이미 민승호가 말한 것은 홍봉주 내외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여기에 오기

전부터 남종삼의 마음은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민승호와 민겸호를 이 자리로 부른 것은 정확한 두 사람의 뜻을

재확인하고 천주교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남종삼의 무거운 입이 드디어 떨어진다.

"정확히 두 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사항이 무엇이오?"

자신들이 제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깔린 남종삼의 이와 같은 물음을 들은

민승호와 민겸호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화색이 돌았다.

민승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종삼에게 다시 말한다.

"우리가 대감과 대감께서 이끄시는 천주학 신도들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

"...?"

남종삼의 반응을 유도해 보기 위해서 잠시 말을 끊었던 민승호는 자신의 예상대로

궁금한 표정을 짓는 남종삼에게 쐐기를 박는 말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국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장경일 주교님의 모국인

법국은 당금 세계에서 영국과 함께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대감께서 생각하시는 방아책도 따지고 보면 아라사의 접근을 법국의 힘으로

방비하자는 계책이 아닙니까? 이러한 대감의 방아책에 약간의 방향만 전환한다면

섭정공 김영훈과 그의 떨거지들인 천군인지 지랄인지 하는 나부랭이들을 처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일도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떻습니까? 대감."

1838년 문과(文科)에 합격한 후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영월 현감(寧越縣監) 영해

부사(寧海府使) 등 지방관을 지낸 후 철종 때 도승지가 되어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한

남종삼이었다. 새 임금이 등극하자 모든 관직을 끊고 오로지 천주교에 대한 전교와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남종삼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나라 조선에 천주님의 은총을 퍼트리는 것이었으니, 천주님의

은총을 이 나라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 퍼트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오로지 천주님의 은총만 가까이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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